2. 1906년에
3. 1908년 2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이강년의 본은 전주이며, 경북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聞慶郡 加恩面 道胎里)에서 이기태(李起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벼슬하지 못한 한적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이강년은 188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용양위(折衝將軍行龍驤衛) 부사과(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때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벼슬아치 출신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한 예는 극히 드물지만 민족적 정의감이 그로 하여금 동학의 척왜(斥倭) 운동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그는 농민군을 거느리고 관군에 대항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이어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 노골화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강년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하였다. 처음에 훈척(勳戚) 심상훈(沈相薰)을 찾아가 함께 거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제천(堤川)에 유인석(柳麟錫)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1월 11일 출생지인 문경(聞慶)에서 봉기하였다. 그전에 그들의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는 안동 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 등 3인을 생포하여 농암(籠巖) 시장에서 그들이 적의 앞잡이 노릇한 것을 규탄하고 효수(梟首) 하였다.
일련의 사건으로 소모한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安東)의 창의대장 권세연(權世淵)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1월 15일 고성(姑城)에서 적병을 맞아 교전하였다.
1월 29일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보고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로써 유인석의 막하에서 유격장(遊擊將)이 되었다. 이때 김상태(金尙台)·민순호(閔舜鎬) 등이 문경에서 거의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강년은 대체로 생장지인 충청도에서 활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월 1일 전군장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水安保)의 병참을 공격하였으며, 2월 13일 9초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尹基榮)과 함께 문경 평천(枰川)으로 진군하였다.
4월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리는 관군에게 제천 의진이 패하자, 유인석은 거수지계(去守之計)를 정하고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강년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유인석의 뒤를 쫓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영월(寧越)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小白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7월에 소백산에서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그는 단양 금채동(丹陽 金采洞)에 은신하였다.
1897년 4월 요동으로 건너가 유인석을 만나고 7월에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을미 의병 활동 중에 유인석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으므로 그 이후 호남·영남의 지방의 선비들을 만나 성리(性理)·전고(典故)·예악(禮樂)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자기수양에 골몰하였다.
또한 1899년 충주(忠州) 유림에서 화서(華西)의 문집을 출간할 때 충주에까지 가서 편집·간행·배포에 앞장섰다.
1907년 3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므로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단양(丹陽)·제천(堤川)·원주(原州)·연풍(延豊)·영월(寧越)·횡성(橫城)·강릉(江陵)·청풍(淸風)·충주(忠州)·문경(聞慶)·예천(醴泉)·영주(榮州)·봉화(奉化)·안동(安東)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5일의 제천 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여 사기가 충천하였고 이어서 경상·강원·충청 일대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이 때 군대 해산에 반대하여 동료 진위대(鎭衛隊) 군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閔肯鎬) 의진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판서 심상훈이 원주 배양산(培陽山)으로 찾아와 노고를 치사하였다.
조정으로 돌아가 고종(高宗)에게 그 전과를 아뢰었다. 고종은 이강년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밀조(密詔)를 내렸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을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년을 내린 종묘 사직과 3천리 넓은 강토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날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 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殉節)할 것이다.…"
이 때 주천(酒泉)에 40여 진이 모여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중 군 장 김상태(金尙台) 우 군 장 이중봉(李重鳳)
우선봉장 백남규(白南奎) 좌 군 장 이용로(李容魯)
좌선봉장 하한서(河漢瑞) 감 군 장 이세영(李世榮)
전 군 장 윤기영(尹基榮)
등의 편제를 갖추었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하여 문지동(文池洞)을 거쳐 마수막(馬首幕)에 이르러 충주(忠州)를 치고자 하여 산하의 의진을 풀어서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지키지 않아 충주진격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불당곡(佛堂谷)의 이주승(李胄承)의 집에 머물면서 『국수원류(國讎源流)』, 『군계(軍戒)』12귀, 통고문(通告文) 등을 지어 군율을 가다듬었다. 이어서 풍기 도촌(豊基道村)에서 김기찬(金基燦)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金商虎)를 총살하여 친일행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7월 30일 문경(聞慶) 주흘루(主屹樓)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원주에 묻어 둔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시켰으며, 이 때 공을 세운 이만원(李萬源)을 도총독장(都總督將), 권용일(權用佾)을 우군 선봉장에 임명하였다. 청풍의 조동교(趙東敎)·여주의 김현규(金賢圭)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특히 김현규 의진에는 해산군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8월 2일 적군이 초곡(草谷)에 이르러 대전하게 되자 조동교와 김현규가 군대를 이끌고 가버려 작전의 허가 드러나 모항령(毛項嶺) 전투에서 32명의 인명 피해를 보게 되었다.
다음날 혜국사(惠國寺) 승려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용기 백배하여 갈평(葛坪)으로 진격하여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투구 등을 노획하였다.
이튿날(4일) 다시 갈평에 나라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槐城)에서 적의 대장 과전 삼태랑(戈田三太郞)과 육군 보병 대토촌(大土村)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6일에는 대승사(大乘寺)에서 적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8일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이 문경 적성(赤城)에서 참패하여 아군 36명이 순국하였다. 이후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楡峙)·영월(寧越)·병두(屛杜)·연풍(延豊) 등지에서 적과 대치하였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하였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 정언(正言) 김상한(金商翰), 전 군장(前軍將) 윤기영, 소모장 주광식(朱光植)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杻峙)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竹嶺)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故里平)에서 적 80명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졌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적과 대치하게 되자 전세는 불리해졌다.
10월 6일의 소백산정(小白山頂)에서의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10월 23일 풍기 백자동(栢子洞) 전투에서 다시 적 100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이강년은 그간의 과로와 연이은 패전이 원인이 되어 득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2일 풍기 복상동(復上洞)에서 적을 만나 대적하였으나 그 결과는 대패였다. 이때 이강년은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었다" 하고 탄식하며 부하 장령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다음해 봄을 기약하고 의진을 해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강년은 끝내 해산시키지 않았다. 11월 21일 전동 월계봉(錢洞 月桂峰), 12월 3일 낭천 간척리(狼川 看尺里) 그리고 12월 5일 경기도 건천(乾川)에서 각각 적과 대적하여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용소동(龍沼洞)에서 적 백여 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하여 대청리(待淸里)·갈기동(葛基洞)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8년에 이강년 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 12일의 강원도 인제(麟蹄) 백담사(百潭寺)의 전투와 안동 서벽(西壁), 4월 6일 봉화 내성(乃城) 전투 그리고 4월 8일의 안동 재산(才山)의 전투를 들 수 있다.
1908년 3월 12일 백담사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일… 적이 많이 들어오므로 쳐서 무너뜨렸다. …이튿날 새벽에 파수병이 3번이나 급한 정세를 보고하기를 적 500여명이 북쪽에서 온다고 했다. 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여 반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 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 명이었다. 이날 간성(杆城) 신흥사(神興寺)로 옮겨 주둔하고 군사들을 교련시켰다. 다음날 다시 오세암(五歲庵)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들 이강년 의진은 하루를 교전하고도 여력이 남아 있어 군대를 이끌고 설악산(雪嶽山)을 넘나들며 훈련하였으니 이들의 능란한 기동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대는 일찍이 관동의진의 민긍호가 활약하던 지대로서 그가 체포된 후 곧 이어 이강년이 장악한 것이다.
이때 이강년은 이준명(李準明)·정원팔(鄭元八) 등 260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산악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이강년은 강원도를 떠나 4월에 경북 일월산(日月山)을 거점으로 삼고, 산하 의병장인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尙台)·정경태(鄭敬泰)·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連哲) 의진 4천여 명을 서벽(西壁)에 주둔시켰다.
이에 대하여 일군은 영천(永川)수비대를 파견하였으므로 이들과의 전투가 불가피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수백 명을 사로잡고 2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 때 적들은 내성(乃城)으로 퇴군하였으며, 의진 역시 내성 쪽으로 행군하여 유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적 수백 명이 영천으로부터 온다고 파수병이 고하였다.
이강년은 먼저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맞이하여 싸웠다.
반나절 동안 전투하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때 설치한 설복비계(設伏秘計)에 대하여 의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의진이 안동 재산(才山)에 이르자 대구로부터 적의 내습이 있었다. 이강년은 이만원(李萬源)·권용일(權用佾)을 동구(洞口)에 매복시키고, 하한서를 왼쪽에, 성익현(成益鉉)을 오른쪽에 매복시키고, 백남규는 분병(分兵)하여 양쪽에 매복하도록 한 후, 이강년은 갑사(甲士)들을 거느리고 남산(南山)에 올라가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은 의병 복장으로 변장하고, 의병기를 들고 달려왔다. 적이 깊숙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 복병이 일제히 사격을 하고 이강년은 산 위에서 독전(督戰)하였다. 탄환이 빗발같이 쏟아지자 적은 놀라고 짓밟혀 죽은 자가 과반이 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달아났다.
아군의 사망자 10명, 부상자 8명이었다.
이상으로 알 수 있듯이 이강년이 10여 년간에 걸친 의병활동에서 비견될 바 없이 혁혁한 공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능숙하고도 대담한 전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강년은 6월 4일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의 탄환이 복사뼈에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도선봉(都先鋒) 하한서 및 7명이 전사하였다. 이들을 돌아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고 부탁하고 제천으로 압송되었다. 처음에 일인들이 그의 부상을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거절하고 일음일식(一飮一食)하였다. 그나마 일본인이 가져다주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후 그는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丸子太無情 臥傷足不行 若中心腹裏 母尋到瑤京)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平理院)에 이송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9월 19일(음)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으니, 그의 애국충정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123·124면
- 276·278·279·380·384·394·396·400·408·414·423·428·429·441·442·482·496·54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72·600·62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86·546·547·54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223~226·228·229·230~242·246·256~264·276·278·279·380·384·394·396·400·408·414·423·428·429·441·442·482·496·54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72·600·62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