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732
성명
한자 尹奉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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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열투쟁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관련정보


2019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2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세 때(歲時)부터 야학을 경영함
2. 1931년 2월에 상해(上海)로 건너가 모직공장직공 세탁소외교원을 거쳐 김구(金九)를 만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함
3. 1932년 4월 29일 왜황(倭皇)천장절(天長節)을 기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하회가 상해 홍구공원(上海虹口公園)에서 개최됨을 듣고 일본시민차림으로 오전 11시 40분 식대(式台)정면에 투탄하여 왜 거류민단장(倭居留民團長) 하서(河瑞)가 즉사했고 최고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은 5월 26일에 죽고 제3함대사령관(艦隊司令官) 야촌길삼랑(野村吉三郞)은 한쪽 눈이 상실되고 제9사단장(師團長) 식전겸길(植田謙吉)은 다리가 절단되고 공사(公使) 중광규(重光葵)는 다리가 부러지고 촌정우야 민단서기 외(村井友野民團書記外)왜 부녀자(倭婦女子) 수명이 부상하였음
4. 윤의사(尹義士)왜 헌병(倭憲兵)피체되어 일본 대판(日本大阪)으로 이송되고 12월 9일 대판위수형무소(大阪衛戍刑務所)에서 취의(就義)하였음 향년 24(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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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德山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인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日帝)의 식민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 들어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이때부터 그의 학업은 일취월장하였고 특히 시(詩)에는 발군이었다. 16세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漢詩)를 보아도 그의 시재(詩才)를 짐작할 수 있다.

不朽聲名士氣明 길이 남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밝고

士氣明明萬古淸 밝고 밝은 그 기개 만고에 빛나리

萬古淸心都在學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느니

都在學行不一聲 부지런히 학행 쌓아 그 명성 스러지지 않으리

그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안 1920년대를 풍미했던 새 방향의 민족주의 운동에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당시 민족운동의 기조적인 방향을 잘 제시하여 주었던 ≪개벽(開闢)≫등의 잡지와 〈동아일보(東亞日報)〉등이 신문을 읽고 나름대로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7년 그는 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경제자립을 추구하였으며 독서회(讀書會)를 통해서 문맹퇴치에 힘썼다. 또한 1928년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을 설립하여 농민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월례강연회(月例講演會) 등을 열어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지어 허례허식을 지양하는 교육정신과 주체적 민족정신의 확립과 근검·절약 그리고 근로정신에 대한 그의 의식을 표출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929년에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월진회를 통해서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으나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한인 동포 실업인 박 진(朴震)이 경영하는 중국채품공사(中國채品公司)에 취직하여 말총모자 등을 만드는 직공으로 근무하며 한인공우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해서 회장의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2년 이른 봄부터 그는 상해의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군관계의 정보를 탐지하던 중 박 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교포단장(韓人僑胞團長)인 백범(白凡) 김 구(金九)를 만나게 되었다.

이 당시 김 구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 의열투쟁을 계획하고, 그 첫 결실로서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으로 하여금 왜왕(倭王)을 폭사시키려 하였으나 불행히 성공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봉창의 의거는 중국내의 동포들과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한민족의 독립투쟁에 대한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게 되었다. 또한 윤봉길에게는 일제(日帝)에 대해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김 구를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론하고 의열투쟁의 기회를 열망하는 상태에서 1932년 4월 29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해사변으로 상해에 진주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그리고 입장권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는 보도를 상해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에 보도하였다.

그는 이를 살신구국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그날의 전승경축식에는 상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軍)·정(政) 수뇌들이 그대로 이동하여 식장에 모일 것이며, 만약 그 원흉들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면 이봉창의 동경의거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자긍심을 동포들에게 줄 수가 있을뿐더러 중국군이 막대한 희생을 내고도 이기지 못하였던 일본 침략군의 수뇌부를 폭파시키는 전과를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그는 의거 4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단원자격으로 김 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고, 특히 28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곳에 머물러 준비하는 축하식장의 팻말을 보고 도륙의 대상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설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4월 29일 일찍 한 교포 집에서 한인애국단의 김 구 단장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 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고 손에 들었다. 이 준비된 폭탄은 김 구 단장의 요청으로 중국 상해 병공창(兵工廠) 창장 송식표(宋式·)가 기사(技師) 왕백수(王伯修)를 시켜 비밀리에 제조한 것으로, 병공창의 병기주임(兵器主任)이었던 김홍일(金弘壹)장군의 주선으로 김 구-윤봉길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새 시계를 김 구 단장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 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투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식단(式壇)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는 일본 관민이 정연히 도열하였고, 그 앞에 일본 학생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 그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식단 위에는 표적물인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자리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주중공사(駐中公使) 시게미쓰(重光葵)·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貞次), 주중(駐中)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민단 간부 도모노(友野盛) 등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참석해 있었다.

그는 미리 보아두었던 뒷편의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기념식의 첫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서 두 번째 순서인 축하식 순으로 접어들어 일본 국가가 제창되었고 그것이 거의 끝날 무렵이 되었다.

드디어 11시 40분경, 운명의 시각이 되자 그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걸매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그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가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 처의 파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였고, 제9사단장 육군총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실명하였다. 또한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이며 상해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 간부인 도모노(友野盛)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그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붙잡혀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그해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 이감된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그의 순국은 그의 뜻대로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민족의 마음 속에 살신구국의 높은 정신을 영원히 기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유시(遺詩)에서 의거 당시 그의 살신구국의 의열정신과 일제치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 의열사의 소원을 엿볼 수가 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25세의 나이로 이국(異國) 땅에서 순국한 그의 유해는 1946년 일본에서 박 열(朴烈)·이강훈(李康勳)의 주선으로 본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420~424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93·19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03·50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700~702·710·711·713·717·720·723~725·72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9·70·218·244·348·369·444·47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69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90·95·9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449·452·458·465·466·53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478·479·49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34·35·124·126·15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413·455·457면
  • 김구동정관련건(총독부경무국) 500·50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92·493·496~499·505·507~509·517·519·520·527·529·531·548~550·561·566·569·575·579·595·629·642·663·697·73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75·248·249·609·611~613·61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43~749·751·758·759·761·762·768·76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5·33·235·239·240·244·246·247·259·367·494·497·499·50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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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윤봉길 본명: 우의(禹儀), 호: 매헌(梅軒) 충남 예산 -
본문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시양리(柿梁里)에서 농민 윤황(尹璜)과 어머니 경주 김씨(金元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매헌(梅軒),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별명이 봉길(奉吉)이다. 1913년 6세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18년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3 · 1운동이 일어나자 어린 마음에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보통학교를 자퇴하였다. 1921년 14세 때부터 마을 부근의 유학자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熟)에서 6년 간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과 한학을 수학하였다. 특히 시재가 뛰어나서 오언 · 칠언 등 한시를 잘 지어 『명추(鳴椎)』, 『옥타(玉唾)』, 『임추(任椎)』 등의 제목으로 시집을 꾸며, 3백여 편의 자작 한시를 수록하였다. 오치서숙 수학 시기에 한문만 아니라 신문과 『개벽』 잡지 등을 탐독하면서 신학문을 자습하고 민족 문제와 농촌 문제들을 학습하였다. 1926년 19세 때 스승 성주록은 윤봉길에게 “나로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석별 기념으로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하여 첫 단계로 자기 집 사랑채에 야학을 차리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갑 · 을 2개 반으로 나누어 한글을 가르치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지식향상에도 노력하며, 월례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야학교재로 3권의 『농민독본』을 저술하였는데, 『농민독본』의 내용을 보면, 20세의 청년 윤봉길이 매우 선진적인 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체계화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928년 21세에 농촌부흥운동 본부로서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고, 그 건물 대들보에 붓글씨로 “조선 개국 사천이백육십일년 이월 십오일 오시”라는 단기를 적어 강력한 민족의식을 명시하였다. 이 시기 그는 격조 높은 한시를 지어 읊었는데, 『대나무를 노래함(詠竹)』이라는 칠언절구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기개를 대나무에 빗댔다. 대나무를 노래함(詠竹) 그대는 꼿꼿이 서 있어 굽힐 줄을 모르는데 此君挺立不許回 마음 소통은 그 누가 열어주었나 心契疏通誰爲開 절개가 사철을 관통해서 언제나 봄빛일세 節貫四時春色准 바람은 천 길이나 높은데 빗소리 다가오누나 風高千尺雨聲來 어찌타 광주리로 짜여서 임금께 드려졌나 敢承厥匪登朝闕 한갓되이 긴 장대 되어 낚시터에 드리워졌나 謾作長竿向釣臺 시험삼아 한 가지 꺾어 퉁소 만들어 불어보니 試把一枝堪有問 강남에서 불던 그 옛 가락 애달파서 차마 못 듣겠네. 江南古調使人哀 1929년 농민운동단체인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월진회의 목표는 농민 자신의 힘에 의한 자활의 쟁취에 있었다. 월진회의 활동은 1) 야학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 2) 애국 사상 및 정치의식의 고취, 3) 공동 경작 및 공동 식수를 통한 공동 정신의 함양, 4) 축산 등 농가 부업을 통한 농가의 경제생활의 향상, 5) 소비조합 운동, 6) 위생 보건 사업 및 청소년의 체력 단련 등이었다. 일제는 윤봉길의 농민운동을 불온시하여 자주 덕산주재소로 호출하였다. 그는 농민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독립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심사숙고 끝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하여 1930년(23세) 3월 6일 『장부출가생부환(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최종 목적지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였다. 그는 칭다오(靑島)에서 1931년 10월 18일 고향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우리 청년 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고 조국과 겨레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나섰음을 천명하였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의 분쟁을 부추겼고, 그 결과 중국인의 반한 ·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이를 만주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1931년 9 · 18 만주 침략을 감행하여, 1932년 3월 1일 괴뢰 만주국을 수립해서 일제의 직접적 지배하에 두었다. 이어서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침략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차이팅카이(蔡廷楷)가 지휘하는 제19로군, 장즈중(張治中)이 지휘하는 제4로군(제87사단과 88사단) 및 민병대 등 30만 명을 투입하여, 제19로군과 협동해서 상하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해군과 육군 병력 10만 명에 비행기 100여 대를 투입해서 1개월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상하이를 점령해버렸다. 1931년 11월 임시정부 국무회의 회의에서는 특무대를 조직하여 특공작전으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킬 것을 결의하고 전권을 김구에게 위임하였다. 김구는 즉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특공 작전 강화를 모색하던 때, 그를 찾아가서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이 필요할 때는 자기가 이를 담당하겠다고 자원함으로써, 상해 의거 준비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천장절(일본 천황 생일 경축일, 4월 29일) 을 일본군의 상하이점령 전승 경축식을 겸해서 일본조계인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었다. 경축식과 동시에 관병식이 열리는데 일본 거류민들은 입장권, 일장기와 함께 각자 도시락과 수통만 휴대하고 참석하라고 공고하였다. 전승 경축식에는 상하이 주둔 일본군 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들이 모두 모일 것이기 때문에 의거를 감행할 절호의 기회였다.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2년 4월 26일 혈서로 ‘선서문’을 써서 사명 수행을 맹세하였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4월 28일 저녁에는 자필 약력과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는 시 1편, 조국 청년들에게 남기는 유시 1편, 두 아들에게 남기는 다음의 유시 1편을 써서 남겨두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은 김구가 중국군 장교로서 중국군 제19로군 병기창 주임으로 복무하고 있던 왕웅(王雄, 본명 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중국인 기술자 왕백수(王伯修)의 지도 밑에서 특별히 제조한 도시락 폭탄과 어깨끈이 달린 수통형 고성능 폭탄의 사용방법을 익혔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일찍 7시 45분경 그는 입장권도 없이 중국인 수위 경비시간에 맞추어 홍구공원 정문 앞에 도착하였다. 중국인 수위가 입장권의 제시를 요구하자, 윤봉길은 “나는 일본인이다. 입장권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일축하고, 바로 장내로 들어갔다. 양복을 입고, 일본인처럼 수통을 어깨에 걸머메고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든 윤봉길의 행색은 영락없는 일본인이었기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 관병식 · 경축식장은 중앙 식단을 중심으로 전면의 좌우에 일본군 장교들이 도열하였고, 식단 후면에는 위병들과 반경 약 19m의 반원형으로 기마 헌병대를 2열로 배치하여 3중으로 경계하였다. 일본 거류민의 관람석은 식단으로부터 20m 떨어져 있었다. 식단의 단상에는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좌측에는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과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村井), 그 우측에는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상하이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友野) 등 7명의 군정 수뇌들이 앉았다. 1만 명의 일본 거류민 및 1만 명의 일본 군인들과 각국 외교관 · 무관들이 초청되어 참석자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식은 2부로 나누어서 제1부의 관병식은 오전 9시부터 홍구공원 앞 대로에서 기갑 부대와 분열식을 전개하여 일본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11시에 종료하였다. 제2부의 축하식은 약 30분 간 휴식 후 11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관병식과 축하식을 관찰하면서, 3중의 엄중한 경계 속에서 2개의 폭탄을 연속 투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수통형 폭탄을 던져 판가름을 내기로 결심하였다. 개회사와 축사가 있는 후,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일본국가 합창이 시작되었다. 그는 일본국가 합창이 종료에 가까워오는 순간이 최적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가 도시락형 폭탄을 내려놓고, 수통형 폭탄을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뽑은 후 2, 3명을 어깨로 밀어젖히면서 식단 후방 약 1간 정도의 거리까지 앞으로 달려나가서 상하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기치 중장을 노려 수통형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가 투척한 폭탄은 정확하게 시라카와 대장과 우에다 중장의 바로 앞 단상 중앙에 떨어져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였다. 단상에 서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 우에다 겐기치 중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해군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일본거류민단 행정위원회 서기장 도모노 등 7명은 일시에 쓰러졌고 경축 식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이때가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50분이었다. 상하이 파견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은 중상을 입고 입원했으나 사망하였다. 우에다 중장은 중상을 입고 오른쪽 발가락을 절단하였다. 일본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중상을 입고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는 중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였다. 상하이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는 즉사하였다.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와 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는 중상을 입었다. 1932년 4월 29일 하오 1시경에 ‘상해 의거’는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세계를 경악케 하였다.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항일 반침략 투쟁이거나 일본인 혁명주의자 활동으로 알았다가, 이튿날부터 한국 청년 윤봉길의 항일 독립운동임이 밝혀지자 전세계는 더욱 놀라게 되었다.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다음의 몇 가지 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독립운동이었다. 첫째, ‘상하이 의거’는 일제의 만보산사건 조작으로 붕괴된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의 연대를 다시 강화하고, 중국 영토 안에서의 한국 민족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여건을 회복해 주었다. 중국인들은 30만 명 중국군을 투입하여 1개월여 치열한 항전을 벌이고서도 패배하여 상하이를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치욕과 울분에 떨다가, 한국 청년 윤봉길의 의거로 일본 침략군 총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 수뇌의 이동체가 궤멸하자 일제히 환호했으며, 윤봉길을 극구 칭송하고 한국인들에게 무한히 감사하였다. 만보산사건으로 말미암은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악감정과 적대감은 하루아침에 씻은 듯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국인에 대한 감사와 협조로 급반전되어, 만주와 중국 안에서 독립운동의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었다. 둘째, ‘상하이 의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침체에서 부활시키고 활성화시키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윤봉길 특공작전의 커다란 성과에 고무된 다수의 국내외 동포들이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을 재인식하여 재정적 정신적 지원을 재개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국민당을 비롯한 중국 각 단체와 관민의 재정 지원과 편의 제공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임시정부는 새로운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 한국 청년이 해냈다”고 윤봉길 특공작전 의거를 높이 평가하고, 중국군의 사관학교 안에 한인 장교 훈련반을 설치케 하여 여기서 양성된 한국 청년들이 후일 임시정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셋째, ‘상하이 의거’는 중국 상하이를 침략 점령한 일본 침략군 총사령부의 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를 섬멸함으로써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중국군 30만 명의 치열한 저항도 물리치고 상하이를 무력 점령한 막강한 일본군의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 7명을 일본‘천황’의 ‘천장절’ 경축식장에서, 일본군의 막강함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자리에서, 한국 청년 한 사람이 특공 작전으로 궤멸시켰으니 일본 침략군이 받은 실제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일본군이 전쟁을 확전하는 경우 중국 청년들이나 한국 청년들 가운데 제2, 제3의 윤봉길이 계속 나와서 특공 작전을 감행할 경우를 일제측은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이 중국 관내지역으로의 확전을 단념하고 1932년 5월 5일 중국측과 긴급히 정전협정을 체결한 것은 국제적 압력의 영향뿐만 아니라 윤봉길의 일본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이하 총사령부 이동체 섬멸이 가한 심대한 타격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상하이 의거’의 성공은 일제의 잔혹무비한 식민지 통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한국 민족의 독립정신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독립사상을 크게 고취했으며, 전반적으로 국내외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다섯째, 상하이 의거는 국제도시 상하이를 무력 침략하여 점령한 일본군의 동태를 전세계가 주시하는 속에 상하이의 외국인 공동조계 안의 홍구공원에서 외국인들의 참관과 주시 속에서 일본 침략군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들을 섬멸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세계를 더욱 크게 놀라게 해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이 매우 완강하고 용감하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전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하였다. ‘상하이 의거’ 뒤 윤봉길 의사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훙커우공원 옆의 헌병분견소로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다. 일제 헌병대의 심문에 대답하면서, 현재 한국민족은 실력이 없어 자기의 의거로 당장 독립이 실행되는 것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한국인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여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고 한국을 잊어버린 전세계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뇌리에 깊이 새겨 넣도록 함은 장차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하여 의거를 일으켰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강국인 일본제국주의 등 제국주의 열강도 다음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피폐하게 될 것이고, 세계대전 후에 한국은 반드시 독립될 것이며, 우리 독립운동가의 역할은 이 독립의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응수하였다. 1932년 5월 1일 그는 상하이파견군 군법회의 검찰에 송치되었고, 5월 25일 일본 상하이 파견군 군법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 일본으로 호송되어 오사카 육군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육군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이튿날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3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三小牛)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25세의 짧으나 몸과 마음을 조국과 겨레에 다 바쳐 독립운동의 대승리를 쟁취한 애국 영웅의 삶을 마감하고 순국하였다. 그의 시문 · 저작 · 관련자료들은 매헌윤봉길전집편찬위원회 편, 『매헌윤봉길전집(전8권 및 별책,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간행, 2012) 』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어떠한 단위 부대도 해내지 못하고 중국군 30만 명의 혈전도 해내지 못한 과업을 특공작전으로 수행해 냄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독립운동사에 영원불멸의 업적을 낸 위대한 애국 영웅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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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열사 충혼탑 전라북도 고창군
2 사당 충렬사 전라북도 익산시
3 사당 충렬사(대전시) 대전광역시 유성구
4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5 사당 대한이산 묘 전라북도 진안군
6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7 기념관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서울특별시 서초구
8 동상 윤봉길 의사 상 대전광역시 중구
9 사당 의열사 서울특별시 용산구
10 기념관 충의사 충청남도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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