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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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9 / 1962 훈격 대한민국장 /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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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9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장 공적>
3·1운동의 상징으로 전 국민에게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던 유관순 열사는 광복 이후에도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애국심 함양의 표상이 되어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공적으로 2019. 3. 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 하였음.

<독립장 공적>
1. 공주(公州)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에서 수학한 뒤 예수교 공주교회(公州敎會) 부인선교사(婦人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교비생(校費生)으로 편입되었는바 고등과(高等科) 1학년 때 삼일운동이 일어나서 경성(京城)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회와 학교로 순방하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고하고 각지의 교회와 유림계의 찬성을 얻어 3월 1일(三月一日)((陰)) 병천(並川)에서 수천명의 군중을 모아서 선창으로 만세시위를 지도(指導)하였는데 그의 부친 중권(重權)과 모친 이씨(李氏)는 당시 왜적의 총에 희생(犧牲)되었고 김구응(金球應), 최정철(崔貞徹)(채씨(蔡氏)), 김상헌(金常憲)등은 동일(同日) 살해되고 관순(寬順)은 주모자로 피체되어 유치장에서 오빠 관옥(寬玉)을 면접하였으나 아무 영문도 몰랐으며 적의 고문에는 자신의 처사였다는 것 뿐 일체 언급을 피하였음
2.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공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내면서 옥중에서도 만세를 불렀음
3. 1920년 9월에 악형으로 옥중에서 순사(殉死)하니 때에 나이 18세의 소녀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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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現 竝川面) 아우내(竝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에서 수학한 뒤 1916년 기독교 감리교(基督敎 監理敎) 충청도 교구(忠淸道敎區) 본부의 미국인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유관순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과 김구응(金球應)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되었는데, 그 하나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 등의 수신면(修新面)민과 이백하(李柏夏)·김상철(金相喆)로 대표하는 성남면(城南面)·갈전면민들이고, 하나는 동면(東面)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趙炳鎬)·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와 갈전면의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이다.

이 두 계열의 주동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며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31일 자정을 기하여 다음날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는 봉화를 요소마다 올렸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안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유관순은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과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유관순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유관순은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유관순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결국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경성(京城)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형사사건부(1919. 5. 9.)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6. 30.)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1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5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62·1163·1164·116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59·173·444·52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20·121·122·123·124·125면
  • 「유관순 열사의 탄생일과 순국일」(유관순열사추모학술대회 논문집, 천안대학교유관순연구소, 2001)
  • 「유관순 열사 1심 형량 관계 형사사건부」(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8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485면-506면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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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유관순 冠順(족보) 충남 천안 1919년 4월 1일 병천 만세 시위 주도
본문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속칭 지령지,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이고 이명은 관순(冠順)이었다. 1915년경 공주에 감리교 여선교사로 있던 앨리스 제이 햄몬드(Alice J. Hammond Sharp)의 추천으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이화학당 보통과 교비생(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였다. 앨리스는 1900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감리교 목사 로버트 아더 샤프(Robert Arthur Sharp)와 결혼하여 앨리스 햄몬드 샤프 부인이 되었으며, 한국이름으로 사애리시(史愛理施), 또는 ‘사부인’으로 불렸다. 샤프 여사는 여성교육에 열정이 많았기에 충남 지역 소녀들 여럿을 이화학당에 추천하여 공부하게 했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학생과 시민들은 시가행진을 시작하여 덕수궁 뒤 이화학당 교문 앞에 이르러 이화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이화 학생들은 교문으로 달려 나갔으나 프라이 교장과 교직원들이 학생들의 시위참여를 막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위참여를 포기하였지만,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뒷담을 넘어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 학생단 시위 때도 참여했다가 붙잡혔다.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어 있던 중 이화학당 당국이 교섭하여 다른 학생들과 같이 풀려났다. 이후 학교가 휴교하자 3월 13일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인 3월 14일 고향 동리에서 약 10㎞ 떨어진 목천공립보통학교에서 200여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곧 일본 헌병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고향 동리는 그때까지도 잠잠했다. 졸업반이었던 유예도는 선배들로부터 독립자금 모금 사명을 받았다. 가난한 시골 고향에는 돈이 없었다. 부형들은 차라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이웃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3월 1일, 음력)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에 호응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에는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다. 멀고 가까운 24군데 산봉우리에서 호응하는 횃불이 타올랐다.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 병천 아우내 장마당에는 약 3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병천면은 물론이고, 서쪽의 목천 북면 방면, 남쪽의 성남면 · 수신면 및 연기 방면, 동쪽의 이동면, 진천 등 각 방면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아우내 장마당에 갈 때 옷 속에 자신이 만든 태극기들을 감추고 갔다. 지령리가 총본부격으로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지령리 감리교회 교사인 숙부 유중무와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과 앞장섰다. 성남면과 수신면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하다 지령리 본부와 연락이 되어 연합시위를 벌이기 위해 이날 아우내장터로 모여 들었다. 아우내장터로 들어오는 세 방향의 길목에서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장터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태극기는 유관순과 지령리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오후 1시 장마당 한가운데에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세우고, 지령리 교회 속장 조인원이 싸전 앞에 쌓아 놓은 쌀가마니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온 군중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는 산천을 뒤흔들며 메아리쳤다. 이렇게 하여 민족대표 선언서에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밝고 정당하게 하라”고 한 높은 수준의 비폭력 운동에 부응하려고 했다. 시위행진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유중무 숙부, 조인원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 앞에 섰다. 장터에서 약 30미터 거리에 헌병 주재소가 있었다. 주재소장 고야마(小山)는 진상부(溱相部) 헌병 상등병과 보조원 1명을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하면서 보조원 정수영, 맹성호에게 발포준비를 시켰다. 이에 군중들이 다시 돌아서 우렁찬 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일제히 외쳤다. 그러자 일제 헌병이 조인원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조인원의 심장 옆 반치 거리를 꿰뚫고 들어갔고, 다시 총검에 왼팔을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오후 4시경 천안철도엄호대의 키네(甲)대위 이하 6명이 자동차를 타고 병천으로 급히 달려왔다. 지원병의 무차별 발포로 다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매우 비참하게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다. 김구응과 그의 어머니 최정철(崔貞徹)이 그 예로 일본군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 후 총검으로 마구 찔려 모자가 한 자리에서 참혹하게 숨졌다. 일본군의 총격과 총검에 유관순의 아버지 · 어머니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아버지, 어머니 시신 앞에서 피신하라는 이웃의 강력한 권고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하게 되었다. 이후 정확히 언제 체포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피신하여 다른 지역에서 시위운동을 계속하다 동생들이 걱정되어 집에 왔다 붙잡혔다는 기사가 있다. 공주재판소의 1심 재판에서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며 논리정연하고 당당하게 대항하였다. 일본 재판관은 격분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중무, 조인원 등 지도자급 인물들과 함께 각각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당시 조인원은 56세, 숙부 유중무는 4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17세의 나이로 항소심 판결문 제1피고로 언급된 것은 가장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총독부 판사들이 3 · 1운동 시위자들의 항소를 거의 대부분 기각했던 것에 반하여,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쓰카하라 도모타로(塚原友太郞)가 1919년 6월 30일 내린 판결은 공주법원이 내렸던 1심 판결이 지나치게 과중한 징벌이라며 공소 이유를 인정하고 징역 5년의 1심 형량을 3년으로 낮추어 언도하였다. 공주 1심 재판이 매우 감정적인 보복성 판결이었음을 말해 준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최종심인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상고를 포기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이후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고문을 당했다. 감옥 안에서 함께 옥살이를 했던 어윤희는 유관순이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1920년 3월 1일 3 · 1운동 1주년을 맞자 또다시 감옥 안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하였다. 이때 다시 많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왕실인 이방자와의 결혼식이 있자 일본정부는 한국 정치범 5천 명에 대해 사면령을 발표하여 형기의 1/2인 1년 6개월로 감형을 받게 되었다. 미결기간을 감안하여 빠르면 1920년 10월, 아니면 1921년 1월초에는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감옥 당국은 중죄인이라고 하여 허리에 찔린 상처, 고문으로 터진(파열된) 방광도 치료해 주지 않고 방치하여 건강히 악화되었다. 마지막 이화학당 교사들과 오빠가 면회했을 때는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가족 외에 같은 반 학생 몇 명만 참석이 허락된 가운데 쓸쓸히 진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무덤은 얼마 후 일제 군용기지 확장으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무연고묘로 파헤쳐진 후 유골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광복이 되자 1946년 3월 유관순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었으며, 1947년 9월 유관순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1967년 지령리에 유관순 기념교회가 건립되었으며, 1969년 4월에는 탑원리에 유관순 사우 부지를 매입하고 1972년 10월에 추모각을 완공하였다. 2002년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사우 내에 유관순열사기념관을 착공하여 이듬해 개관했다. 서대문 감옥의 제8호 감방에서 같이 수감생활을 했던 어윤희는 유관순에 대해 “그 안에서 일하는 데 관순이가 모든 사람들한테 순진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일했습니다. 모자 같은 것을 뜨고 셔츠 같은 것을 뜨고 너무 충직스럽게... 하나를 뜨더라도 성의껏 일을 해서 모든 사람들한테 신임을 받았습니다. 어린애가 무슨 일이든지 충직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고 말하였다. 유관순의 항일독립정신은 일제의 식민지배 속에서 식민지 교육을 받고 자란 첫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가진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항일과 일본을 통한 근대화 사이에서 친일행보를 보였던 이전세대들과 비교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였고, 이들 세대가 1920년대 이후 항일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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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원판결 중 피고관련 부분 취소, 징역 3년 경성복심법원 1919-06-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 상고 기각 - 1919-09-11 국가기록원
3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소요 징역3년 경성복심법원 1919-07-04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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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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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동상 유관순 열사 상(像) 서울특별시 동작구
2 동상 유관순 상 전라북도 진안군
3 생가 유관순열사 생가 충청남도 천안시
4 장소 유관순 유적(아우내 3·1운동 사적지) 충청남도 천안시
5 유관순열사 봉화지 충청남도 천안시
6 기념관 유관순열사 기념관 충청남도 천안시
7 비석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충청남도 천안시
8 동상 유관순 동상 서울특별시 중구
9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10 동상 유관순열사 상 서울특별시 광진구
11 기념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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