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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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3014
성명
한자 申翼熙
이명 王邦平, 號:海公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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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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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학생시대부터 열렬히 애국운동에 힘써오다가 기미년(己未年)독립운동시에 국내동지들의 특파로서 상해(上海)에 건너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조직하고 내무차관(內務次官), 내무총장(內務總長) 국무원 비서장(國務院秘書長), 법무총장(法務總長), 외무(外務), 문교(文敎), 내무부장(內務部長)역임(歷任)하면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2. 귀국후(歸國後) 민주당(民主黨) 최고위원(最高委員) 역임(歷任), 3차 민의원(次民議員) 당선(當選), 국회의장(國會議長) 역임(歷任), 대통령(大統領) 후보(候補)서거(逝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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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이다. 1919년 김시학(金時學)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 등을 협의한 후 국내 동지들의 특파로서 대내외적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상해방면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 당시 상해는 지리적으로 동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있고, 또 일제(日帝)의 횡포 압제를 덜 받을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 온 동제사(同濟社)의 조직 및 신시대, 신정세에 발 맞추어 활동하는 신한청년당원들의 활동이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조동호(趙東祜)·신규식(申圭植)·선우 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4월 10일에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議員)으로 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官制),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을 초안 낭독하여 가결, 채택케 하였으며, 임시정부의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의정원 제6차 회의인 1919년 9월 6일 오후에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통과가 있은 다음, 다시 정부 개조안 토의가 있었다. 정부 개조안의 내용은 한성정부의 기구와 각원을 그대로 통합 정부의 기구와 각원으로 하되 수반인 집정관 총재의 칭호를 대통령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그 중에도 기구에 있어서나 대통령 칭호에 있어서는 이미 통과된 헌법 제3장과 제5장에 의하여 결정을 본 것이니 여기서는 다만 인원의 선임 절차가 남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국무원의 선임은 대통령의 직권에 속하는 것인 즉 임시의정원에서 할 일은 헌법 제21조 5항에 의하는 임시 대통령의 선거와 제15조 4항에 의하는 국무원 임명에 대한 동의뿐인 것이었다. 따라서 먼저 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이 아직 발포되지 않았으니 대통령의 선거 방법을 새 헌법 중 임시대통령 선거 규정에 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이었다. 만일 새 헌법에 의하여 임시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한다면 현정부는 이미 소멸된 것이며, 헌법의 발포권도 새로 선거된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라고까지 논의가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무차장인 신익희는 현정부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으며 초창기이니 만큼 통상적인 준례만 따를 것이 아니라 장차 발포되리라 믿는 그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거함이 부득이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투표케 되었고 이승만(李承晩)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1919년 8월 그는 다시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가, 1920년 9월에는 외무총장이 되었다. 1922년 초에 개최된 태평양회의는 국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는데 그 까닭은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의 실패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동태가 파탄적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운동이 고조되었으며, 같은 해 2월 8일부터 개막된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다. 3월 11일에 그를 비롯한 5명의 의원은 국민대표회의는 정부가 주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시국 수습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부결되었고 국무원은 총사퇴하여 정국은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갔다. 따라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의정원이나 국무원에서는 대통령에게 전보를 쳐서 속히 상해로 건너와 사태를 수습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대통령은 귀국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여 정국은 더욱 혼미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법정연구회(法政硏究會),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등이 조직되어 사태수습을 도모하였는데 이때 그는 시사책진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각처에서는 다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의 난립은 파쟁과 의견 충돌만을 야기할 뿐 효과적이고 조직적인 광복운동에는 기여함이 적었다. 이리하여 독립지사들은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승적(大乘的) 견지에서 통일된 단체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임정」 기치 하에 단결하였다. 그 첫 시도가 유일독립당(唯一獨立黨)의 조직이었다. 1932년 1월 일본이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 급변하는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을 절감하고 또다시 통합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들 대표는 처음에는 선전공작에 주력하다가 마침내는 단일당의 창립에 합의하여 1935년 7월 5일에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다시 분열되어 1937년에 그는 김인철(金仁喆) 등과 함께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조선민족투쟁동맹은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과 합하여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며 우익진영에서는 1937년 7월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그 후, 1940년 5월에 광복진선에서는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군을 창건하였으며, 민족전선 측은 동시에 따로 조선민족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독립운동 단체는 양대 진영으로 완전히 분립되었으나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양분된 광복운동에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절박한 현실은 사상적 대립에 앞서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시키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민족 의용대는 광복군의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고 민족전선의 간부들은 임시정부의 의정원에 들어와 독립이 될 때까지 항일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1942년 6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를 설치하기로 하고, 23일에 외교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여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장건상(張建相)·이현수(李顯洙)·이연호(李然浩)와 함께 연구 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박찬익(朴贊翊)·최동오(崔東旿)·김성숙(金星淑)·유 림(柳林)을 연구위원으로 임명하여 그 진용을 보강하니 여기서 중대시국에 임시정부의 외교활동도 비로소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때 그는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를 보게 되니 여기서 선전 업무는 좀더 강력히 집행할 수 있었다. 즉 이때 새로 설치된 선전부에는 총무·편집·발행의 3과와 함께 선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체의 선전 사업과 각종 선전 지도를 총할하여 행하게 되었는데, 초대 선전부장에 김규식(金奎植)이 선임되었으며, 그는 조소앙(趙素昻)·엄항섭(嚴恒燮)·유 림(柳林) 등과 함께 선전계획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즉 그는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9·176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4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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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5·96·333·339·343·344·354·361·363·366·372·376·45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6면
  • 고등경찰요사 15·87·88·11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3·53·56·57·69·70·94면
  • 벽옹김창숙일대기 109면
  • 박은식전서 상권 56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3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09·242·279·42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33·42·43·45·46·54·64·151·211·212·327·330·343·353·358·367·414·415·536·749·751·760·766·806·823·826·828·870·88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48·653·734·859·86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72·157·202·208·222·235·531·626·736·858·8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3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2·115·117·143·14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8·137·14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21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4·29·31·49·151·1444·144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293·294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3·4·6·8·9·18·21·22·23·24·25·32·67·70·72·89·91·94·135·164·167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4·25·26면
  • 기려수필 24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3·4·143·161·419·420·437·438·440·441·462·463·464·472·480·494·495·501·503·508·509·513·514·517·530·536·537·539·576·585·601·602·649·650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39·41·42·43·51·53·54·55·56·57·59·79·84·86·92·93·103·105·106·107·108·109·111·112·113·115·118·119·120·121·124·125·128·129·130·131·133·134·135·136·138·139·144·147·148·149·150·151·153·154·158·221·223·226·237·327·399·401·461·621·712·732·733·768·769·772·827·828·849·8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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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익희 - 경기 광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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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11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초월면(草月面) 서하리(西霞里)에서 평산(平山) 신씨 장례원경(掌禮院卿) 단(檀)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해공(海公), 중국, 망명 중에 사용한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 ・ 왕방오(王邦午)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부터 맏형 규희(揆熙)에게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글씨를 잘 써 9세 때에는 학부대신을 지낸 이도재(李道宰)로부터 지필묵(紙筆墨)을 상품으로 받기도 하는 등 명필가의 자질을 보였다. 1908년 상경하여 관립 한성(漢城) 외국어 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당초 두 갈래로 공부할 길을 생각하였고 한다. “하나는 법관양성소에 다녀 법률을 배워 무지한 민중이 법망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구제하여 보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영어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워 서구의 진보한 문화를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임을 깨달고 영어과를 선택하였다. 호조참판을 지낸 이위(李暐)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학비를 조달하면서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였다.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나날이 쇠락하여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해에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直視) 정시(正視)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적(仇敵)을 몰아내고 나라를 도로 찾는 데는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고 하는 극일의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결행하였다. 191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독립운동에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재일 유학생들은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가 해산된 후 사분오열의 상태에 있었다. 함경도 출신 유학생들은 철북구락부(鐵北俱樂部), 평안도 출신 유학생들은 패서친목회(浿西親睦會), 전라도 출신 유학생들은 호남다화회(湖南茶話會), 경기도 출신 유학생들은 삼한구락부(三漢俱樂部)로 나뉘어 있었다. 정세윤(鄭世胤), 송진우(宋鎭禹), 문일평(文一平), 안재홍(安在鴻) 등과 협의하여 유학생의 통일조직으로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 평의회 의장,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學之光)』의 주필, 총무 등을 맡아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하려 마음먹었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나는 미국 유학에 뜻을 두었다. 그것은 서구의 문화와 진보된 과학을 흡수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여 저지르는 모든 학대를 세계에 호소하고 독립운동을 하여 보려는 데 있었다”고 하는 말대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은 경비 문제로 성사되지 못했다. 귀국 후 최규동(崔奎東) 교장의 요청으로 중동(中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옮겨 비교헌법과 국제공법과 재정학등을 강의하였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이를 기회로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최린(崔麟), 임규(林圭),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정노식(鄭魯湜) 등과 국내 독립운동을 밀의하고, 11월 말 국외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상의 연락할 사명을 띠고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시작할지라도 결국에는 군사행동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우선 만주지방으로 가서 독립군 지도자 김좌진(金佐鎭) 등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1919년 1월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국내의 독립운동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소식이 없으므로 궁금한 나머지 2월 중순 상하이를 떠나 텐진(天津), 베이징(北京), 선양(瀋陽)을 거쳐 3 ・ 1운동 발발 직후인 3월 2일 귀국하였다. 국내로 들어와 평양을 지나면서 3 ・ 1운동을 목격한 뒤 곧 서울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제자인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학생 강기덕(康基德)과 연희전문학교의 학생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하여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년학생들이 중심이된 제2차 대규모 서울 만세시위가 남대문역 앞에서 전개된 것이다. 이 시위는 3월 3일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에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 3 ・ 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로써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자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용산역을 빠져나와 망명길에 올랐다. 3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독립운동자들은 우선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 11일 임시헌장을 제정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공포하였다. 이때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선임되어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 대리로 선임되었다. 그 후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부임한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1919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행정조직으로 연통제(聯通制)를 창안 실시하는데 일조하고, 9월 11일 출범한 통합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을 기초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리, 외무총장 대리, 국무원 비서장 등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1년에는 법무총장, 외교부장 및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분열을 방지하는데 심혈을 쏟아 부었다. 특히 1921년 4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하여 한중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의 개편을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첨예화되던 시기 평소의 주장이던 대일 군사항전을 한중합작으로 실현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군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산시성(陝西省) 독군(督軍) 후징이(胡景翼) 막하의 고문으로 들어가 국민당 제2군의 중장(中將)이 되었다. 이 시기 중국 학생과 한국 청년 5백 명을 모집하여 유격대의 일종인 분용대(奮勇隊)를 편성하고, 이들을 훈련시킨 뒤 만주로가서 한중 국경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켜 국내로 진격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신흥무관학교 속성과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성주식(成周寔)을 북만주에서 초빙하여 국민당 제2군 육군 중위에 임명하였다. 그런뒤 분용대 연성대장의 책임을 맡겨 국내 진공작전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켜 갔다. 하지만 1924년 가을 후원자인 후징이가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분용대에 의한 국내 진공작전계획은 좌절될 위기에 처하게되었다. 이에 1926년 북벌 중인 장제스(蔣介石), 바이충시(白崇禧)와 난창(南昌)에서 만나 분용대의 병력과 훈련 상황을 소개하고 한중합작으로 한만 국경의 일본군 토벌을 건의하였다. 이들은 당시 자국의 혁명에 주력하였기에 한중합작에 의한 국내 진공작전 계획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1927년부터 난징(南京) 국민당정부의 심계원장(審計院長) 위유런(于右任)의 배려로 심계원에 근무하였다. 이즈음 독립운동계에는 중국 국민당과 같은 민족대당을 결성하여 ‘이당치국(以黨治國)’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었다.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하여 임시정부도 ‘이당치국’의 형태를 도입한 개정 헌법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에 독립운동자들은 각각의 운동방략과 이념, 친소관계 등에 따라 독립운동을 제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독립 후의 신국가건설이나 민족사회의 개혁 방안을 정강으로 제시하면서 독립운동정당을 창당하여 갔다. 1931년 1월 윤기섭(尹琦燮), 성주식, 김홍일(金弘壹) 등과 난징에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산하 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는 한편, 『우리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일제는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2년 1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단체와 정당들은 대일항전에 힘을 모으고자 민족협동전선의 형성에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국혁명당 대표로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 의열단 ・ 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등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탄생시켰다. 이 동맹에서 최동오(崔東旿), 김두봉(金枓奉), 김규식(金奎植), 박건웅(朴建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통일동맹은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 연합적 성격을 띠었기에 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단일대당(單一大黨)의 결성이 요청되었다. 1933년 말 단일대당 형성의 일환으로 우선 자신이 속한 한국혁명당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관내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였다. 이를 매개로 기존의 독립운동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단일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전선 형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난징 진링金陵대학에서 신한독립당(윤기섭), 의열단(김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독립당(조소앙), 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창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조소앙 등 한국독립당 재건파가 탈당하고, 1937년 민족혁명당 제2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지청천 등 일부 인사가 이탈함으로써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1937년 7월 7일 일제는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계는 중일전쟁에 대응하여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지청천) 등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 결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등의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 결성이었다. 이 때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그 뒤 중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하였다. 그러던 중 1938년 9월 민족전선 내의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로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새롭게 조직된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의 지도위원이 되었다. 독립운동계의 분립은 대일항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에 두 계열의 핵심 인물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에서 통합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곧 이어 8월 27일부터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통합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광복진선측 3당 대표로는 한국국민당의 조완구(趙琓九) ・ 엄항섭(嚴恒燮), 한국독립당의 홍진 ・ 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지청천 ・ 최동오 등이 참석하였다. 민족전선측 4당 대표로는 민족혁명당의 성주식 ・ 윤세주(尹世冑),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이었고, 여기에 조선청년전위동맹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7당통일회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위동맹의 최창익(崔昌益) 등 18명이 통합회의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옌안(延安)으로 가버렸다. 이렇게 되자 모든 단체를 해체하고 개인본위로 새로운 통합단체를 결성한다는 7당통일회의 원칙을 실천할 수 없기에 단체본위 통합을 주장하던 김성숙과 함께 퇴장하였고, 이로 인해 7당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7당통일회의 뒤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1941년 충칭(重慶)에서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본부세력이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이다. 1942년 6월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회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3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 엄항섭, 유림(柳林)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4년 5월 임시정부의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12월 1일 홍진 ・ 조소앙 등과 함께 임정요인의 제2차 환국 때 귀국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임시정부 내무부장으로 김구 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다. 이 와중에도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자유신문(自由新聞)』을 발행하였다. 1948년 5월 제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李承晩)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1956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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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묘역 서울 수유 국가관리묘역 서울특별시 강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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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가 해공 신익희선생 생가 경기도 광주시
2 동상 해공 신익희선생 동상 서울특별시 강동구
3 동상 해공 신익희선생 동상 경기도 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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