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5년 일제의 침략상을 비판하는 격문을 배포했다가 같은 해 3월 체포되어 4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구속되었다.
3. 1907년 일제에 의해
4. 1908년 6월 영평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이다.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유생으로서 제1차 의병전쟁에 참여하였고, 제2차 의병전쟁에는 관료출신자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의병장으로서는 드물게 해외 경륜도 있었으며, 따라서 서구문물의 우월성을 절감한 구본신참(旧本新參)의 개화의지를 지닌 선구적 인물이었다.
1896년 3월 이은찬(李殷贊), 진사 조동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와 더불어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양제안(梁濟安)을 선봉장으로 삼아 김천(金泉) 장날을 이용하여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하여 금산군(金山郡) 기고소(器庫所)의 병기(兵器)를 압수해서 금산과 성주(星州) 사이에 의병을 벌려 놓고, 원근에 격문을 발송해서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아직 세력을 굳히기도 전에 대구의 관병이 성주를 치고, 이어서 경성과 공주의 관병이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를 사로잡아 갔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진천(鎭川)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의병을 해산시키라 권고하므로 부득이 장졸들을 타일러 제고장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안타까웠던 마음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호남 삼월 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그 이후 세상을 등질 뜻을 갖고 방산옹(舫山翁)을 따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초야(草野)에 묻혀 두지를 않았다. 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왕에게 허위의 경륜하는 것과 포부는 세상에서 관중(管中)과 제갈량(諸葛亮)이라 일컫사오니 불러서 쓰시는 것이 바로 이 때가 아니겠습니까하고 아뢰어 1899년 3월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왕의 부름을 받은 허위는
벼슬하는 것은 나의 근본 뜻이 아니지만,
외적을 쓸어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하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관로에 들어선 그는 그 다음달에 성균관 박사가 되고 1904년에는 주차일본공사 수원(駐 箚日本公使 隨員),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수반 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거쳐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이 되었다.
이어서 그해 8월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되자, 국가의 폐단을 없애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주장하는 다음의 시무10조를 건의하였다.
첫째: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것.
둘째:군정(軍政)을 닦아서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
셋째: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여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넷째:연탄을 사용하여 산림을 보호 양성할 것.
다섯째:건답(乾畓)에는 수차(水車)를 써서 물을 대도록 할 것.
여섯째: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며, 또 육축(六畜)을 기르도록 힘 쓸 것.
일곱째:해항세와 시장세를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시켜 장사군에게도 공평한 이익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우리나라 지폐의 폐단이 심하니 은행을 설치하여 금·은·동전을 다시 통용시킬 것.
아홉째: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 것.
열째:관직(官職)으로 공사를 행하고 실직(實職) 이외에는 차함(借啣)하는 일을 일체 없앨 것.
이상에서 미루어 보아 그는 다른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다른 개화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그가 처음에 관직에 발을 딛게 했던 바의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건의했으나, 이미 정부가 그의 시무안을 받아들일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소(疏)를 올려 사직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10월에 이정소 의정관(釐正所議正官)이 되고 다음해 3월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내한하자 나라의 형편은 더욱 위급해져 갔다. 마침 독일인 요관(要官) 중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무기를 빌려 받을 것을 약속하고, 민모(閔某)와 함께 의논 독일에 갈 것을 꾀하였으나, 민의 위약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그는 최익현(崔益鉉), 김학진(金鶴鎭)과 더불어 격문을 살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4개월 동안 일본사령부(日本司令部)에서 온갖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다시 소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였다. 서울을 떠나 지례(知禮)의 삼도봉(三道峰) 아래 두 대동(頭大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는 중에 5조약(五條約)이 맺어졌다.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1907년 4월 어느 사람이 와서 임금의 글을 전했다. 거기에는 다만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써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것이 곧 의대조(衣帶詔)이다. 이미 고종황제가 순종에게 양위한 융희 원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고, 7조약(七條約)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抱川)·연천(漣川)·적성(積城)·삭녕(朔寧)·철원(鐵原)·양주(楊州) 등지를 거쳐 강화(江華)를 향해 내려갔다.
이때 부하 김규식(金奎植), 연기우(延基羽)·권중설(權重卨) 등이 여러 번 적진을 깨뜨리니 경기의병의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이에 국내의 지사들에게 연락하여 양주(楊州)에서 모이니 군대가 도합 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총대장을 삼고, 허위는 군사장(軍師長) 즉 작전참모가 되었다.
그간의 전력을 통해 그의 병술(兵術)과 전략이 뛰어났음이 인정된 것이다.
이인영의 헌병조서에 보면 이때 양주에 집결한 13도 의병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全羅倡義大將 文泰洙(일명 文泰鉉) 嶠南倡義大將(경상) 申乭石
湖西倡義大將(충청) 李康秊 關西倡義大將(함경) 方仁寬
關東倡義大將(강원) 閔肯鎬 鎭東倡義大將(경기·황해) 許 蔿
즉 허위는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으로서 경기도와 황해도의 의병을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허위의 작전계획에 의하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해 각 의병대가 분산하여 서울로 향하되, 같은 날 동대문밖에 집결하기로 기약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허위는 몸소 결사대 삼백 명을 인솔하고 서울 성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고, 이어 다른 부대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사전에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대한매일신보」같은 신문은 이 일이 있기 이미 두 달 반 전에 이를 크게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대비책은 철저하여 그들은 양주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까지 했다.이같은 삼엄한 일본군 수비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일부병력은 세검정을 거쳐 자하문밖에 이르렀다. 그런데 허위의 선착부대는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마침 이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뒷일을 허위에게 부탁하고 귀향하니 의병의 주력부대는 흩어져 물러서고 말았다.
바로 1908년 2월 28일 음력 1월말의 일이었다. 13도 연합 의병 부대의 서울 공략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 주력부대는 속속 임진강 유역으로 집결하여 1907년이래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조인환, 권준(權俊), 왕회종(王會鍾), 김진묵(金溱) 의병부대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곳으로 이동 합류해 온 의병부대는 허위를 비롯하여 박종한(朴宗漢), 김수민(金秀敏〈民)>, 김응두(金應斗), 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였다.
이들은 허위를 총대장으로 삼아 의병 부대를 재정비함으로써 여기에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가 발족을 보게 되었다.
연합 의병의 총대장이 된 허위는 그후 계속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軍律)을 정하고, 군표(軍票)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軍器)를 제조하게 하였다.
한편 연안 지방민에게 납세를 명하고, 미곡 반출의 정지를 호소하여 군량 확보를 도모하였다.
1908년 4월에 또 13도의 의진(義陣)에 통문(通文)을 내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의 국내적 결속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해외로는 박사 경현수(慶賢秀)를 청국혁명당(淸國革命黨)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청하였다.
5월에 부하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으로 하여금 태황제의 복위·외교권 회수·통감부 철거 등의 30개조에 달하는 한국민의 기본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외교적·정치적 의병운동 선전뿐 아니라, 경기도를 돌면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왜적과 함께 살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즉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 목숨을 던져 항쟁을 계속한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연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완용(李完用)이 사람을 보내어 외부대신(外部大臣)을 주겠다고 유인하였다. 휘하의 군사들이 심부름 온 사람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보낸 사람이 죽일 사람이지,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 하며 되돌려 보냈다.
그 이튿날 밤 헌병 40명에 의해 포위 당하여 끝내 체포되니 1908년 5월 천둥치고 비가 크게 내리는 날이었다.
얼마 후 서대문 감옥에 이송되었는데 일본인 명석소장(明石少將)이 허위의 경력·이력 그리고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동양평화에 대한 탁월한 경륜, 한학과 역학에 대한 깊은 조예 등을 알고 모든 백성들의 사표라 해서 마음속으로 공경하고 복종했다.
이때 명석(明石)과의 문답 중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오.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앉아서 볼 수가 없어서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의병을 일으킨 뜻은 단순한 화이관(華夷觀)에서가 아닌 것임은 이로써 명백해졌다고 하겠다.
명석이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교수대에 올라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총대장 허위가 순국한 후에도 이곳 의병들은 더욱 고무되어 게릴라 항전을 보다 강력히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왕산허위전서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권 233·237~239·242·243·30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3권 379·572·602·667·668·726·730·8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186·510·69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