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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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10909
성명
한자 許蔿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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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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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896년 3월 금산의진(金山義陣)에 참여하여 같은 해 4월 참모장(參謀長)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2. 1905년 일제의 침략상을 비판하는 격문을 배포했다가 같은 해 3월 체포되어 4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구속되었다.
3.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大韓帝國) 군대가 해산되자 같은 해 9월 경기 연천, 적성, 강원 철원 등지에서 의진(義陣)을 구성하여 일본군과 전투하고 부일(附日)인사들을 처단하였다. 11월 이인영(李麟榮) 등 전국 각지 의병장들과 함께 13도 연합의병부대(일명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구성하고 군사장(軍事將)에 임명되어 1908년 1월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이 부친상으로 대장직을 사퇴한 뒤에는 실질적으로 13도 연합의병부대를 이끌며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4. 1908년 6월 영평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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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진(義陣) : 의병의 군진. 의병 부대를 배치한 것.
  • 처단(處斷) :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이다.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유생으로서 제1차 의병전쟁에 참여하였고, 제2차 의병전쟁에는 관료출신자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의병장으로서는 드물게 해외 경륜도 있었으며, 따라서 서구문물의 우월성을 절감한 구본신참(旧本新參)의 개화의지를 지닌 선구적 인물이었다.

1896년 3월 이은찬(李殷贊), 진사 조동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와 더불어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양제안(梁濟安)을 선봉장으로 삼아 김천(金泉) 장날을 이용하여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하여 금산군(金山郡) 기고소(器庫所)의 병기(兵器)를 압수해서 금산과 성주(星州) 사이에 의병을 벌려 놓고, 원근에 격문을 발송해서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아직 세력을 굳히기도 전에 대구의 관병이 성주를 치고, 이어서 경성과 공주의 관병이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를 사로잡아 갔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진천(鎭川)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의병을 해산시키라 권고하므로 부득이 장졸들을 타일러 제고장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안타까웠던 마음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호남 삼월 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그 이후 세상을 등질 뜻을 갖고 방산옹(舫山翁)을 따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초야(草野)에 묻혀 두지를 않았다. 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왕에게 허위의 경륜하는 것과 포부는 세상에서 관중(管中)과 제갈량(諸葛亮)이라 일컫사오니 불러서 쓰시는 것이 바로 이 때가 아니겠습니까하고 아뢰어 1899년 3월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왕의 부름을 받은 허위는

벼슬하는 것은 나의 근본 뜻이 아니지만,

외적을 쓸어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하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관로에 들어선 그는 그 다음달에 성균관 박사가 되고 1904년에는 주차일본공사 수원(駐 箚日本公使 隨員),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수반 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거쳐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이 되었다.

이어서 그해 8월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되자, 국가의 폐단을 없애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주장하는 다음의 시무10조를 건의하였다.

첫째: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것.

둘째:군정(軍政)을 닦아서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

셋째: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여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넷째:연탄을 사용하여 산림을 보호 양성할 것.

다섯째:건답(乾畓)에는 수차(水車)를 써서 물을 대도록 할 것.

여섯째: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며, 또 육축(六畜)을 기르도록 힘 쓸 것.

일곱째:해항세와 시장세를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시켜 장사군에게도 공평한 이익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우리나라 지폐의 폐단이 심하니 은행을 설치하여 금·은·동전을 다시 통용시킬 것.

아홉째: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 것.

열째:관직(官職)으로 공사를 행하고 실직(實職) 이외에는 차함(借啣)하는 일을 일체 없앨 것.

이상에서 미루어 보아 그는 다른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다른 개화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그가 처음에 관직에 발을 딛게 했던 바의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건의했으나, 이미 정부가 그의 시무안을 받아들일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소(疏)를 올려 사직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10월에 이정소 의정관(釐正所議正官)이 되고 다음해 3월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내한하자 나라의 형편은 더욱 위급해져 갔다. 마침 독일인 요관(要官) 중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무기를 빌려 받을 것을 약속하고, 민모(閔某)와 함께 의논 독일에 갈 것을 꾀하였으나, 민의 위약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그는 최익현(崔益鉉), 김학진(金鶴鎭)과 더불어 격문을 살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4개월 동안 일본사령부(日本司令部)에서 온갖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다시 소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였다. 서울을 떠나 지례(知禮)의 삼도봉(三道峰) 아래 두 대동(頭大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는 중에 5조약(五條約)이 맺어졌다.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1907년 4월 어느 사람이 와서 임금의 글을 전했다. 거기에는 다만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써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것이 곧 의대조(衣帶詔)이다. 이미 고종황제가 순종에게 양위한 융희 원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고, 7조약(七條約)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抱川)·연천(漣川)·적성(積城)·삭녕(朔寧)·철원(鐵原)·양주(楊州) 등지를 거쳐 강화(江華)를 향해 내려갔다.

이때 부하 김규식(金奎植), 연기우(延基羽)·권중설(權重卨) 등이 여러 번 적진을 깨뜨리니 경기의병의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이에 국내의 지사들에게 연락하여 양주(楊州)에서 모이니 군대가 도합 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총대장을 삼고, 허위는 군사장(軍師長) 즉 작전참모가 되었다.

그간의 전력을 통해 그의 병술(兵術)과 전략이 뛰어났음이 인정된 것이다.

이인영의 헌병조서에 보면 이때 양주에 집결한 13도 의병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全羅倡義大將 文泰洙(일명 文泰鉉) 嶠南倡義大將(경상) 申乭石

湖西倡義大將(충청) 李康秊 關西倡義大將(함경) 方仁寬

關東倡義大將(강원) 閔肯鎬 鎭東倡義大將(경기·황해) 許 蔿

즉 허위는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으로서 경기도와 황해도의 의병을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허위의 작전계획에 의하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해 각 의병대가 분산하여 서울로 향하되, 같은 날 동대문밖에 집결하기로 기약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허위는 몸소 결사대 삼백 명을 인솔하고 서울 성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고, 이어 다른 부대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사전에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대한매일신보」같은 신문은 이 일이 있기 이미 두 달 반 전에 이를 크게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대비책은 철저하여 그들은 양주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까지 했다.이같은 삼엄한 일본군 수비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일부병력은 세검정을 거쳐 자하문밖에 이르렀다. 그런데 허위의 선착부대는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마침 이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뒷일을 허위에게 부탁하고 귀향하니 의병의 주력부대는 흩어져 물러서고 말았다.

바로 1908년 2월 28일 음력 1월말의 일이었다. 13도 연합 의병 부대의 서울 공략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 주력부대는 속속 임진강 유역으로 집결하여 1907년이래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조인환, 권준(權俊), 왕회종(王會鍾), 김진묵(金溱) 의병부대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곳으로 이동 합류해 온 의병부대는 허위를 비롯하여 박종한(朴宗漢), 김수민(金秀敏〈民)>, 김응두(金應斗), 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였다.

이들은 허위를 총대장으로 삼아 의병 부대를 재정비함으로써 여기에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가 발족을 보게 되었다.

연합 의병의 총대장이 된 허위는 그후 계속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軍律)을 정하고, 군표(軍票)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軍器)를 제조하게 하였다.

한편 연안 지방민에게 납세를 명하고, 미곡 반출의 정지를 호소하여 군량 확보를 도모하였다.

1908년 4월에 또 13도의 의진(義陣)에 통문(通文)을 내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의 국내적 결속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해외로는 박사 경현수(慶賢秀)를 청국혁명당(淸國革命黨)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청하였다.

5월에 부하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으로 하여금 태황제의 복위·외교권 회수·통감부 철거 등의 30개조에 달하는 한국민의 기본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외교적·정치적 의병운동 선전뿐 아니라, 경기도를 돌면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왜적과 함께 살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즉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 목숨을 던져 항쟁을 계속한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연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완용(李完用)이 사람을 보내어 외부대신(外部大臣)을 주겠다고 유인하였다. 휘하의 군사들이 심부름 온 사람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보낸 사람이 죽일 사람이지,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 하며 되돌려 보냈다.

그 이튿날 밤 헌병 40명에 의해 포위 당하여 끝내 체포되니 1908년 5월 천둥치고 비가 크게 내리는 날이었다.

얼마 후 서대문 감옥에 이송되었는데 일본인 명석소장(明石少將)이 허위의 경력·이력 그리고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동양평화에 대한 탁월한 경륜, 한학과 역학에 대한 깊은 조예 등을 알고 모든 백성들의 사표라 해서 마음속으로 공경하고 복종했다.

이때 명석(明石)과의 문답 중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오.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앉아서 볼 수가 없어서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의병을 일으킨 뜻은 단순한 화이관(華夷觀)에서가 아닌 것임은 이로써 명백해졌다고 하겠다.

명석이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교수대에 올라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총대장 허위가 순국한 후에도 이곳 의병들은 더욱 고무되어 게릴라 항전을 보다 강력히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왕산허위전서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권 233·237~239·242·243·30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3권 379·572·602·667·668·726·730·8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186·510·69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허위 자 : 계형(季馨), 호 : 왕산(旺山) 경북 선산 1896년 3월 김산의진 참모, 1898년 고종의 환궁운동, 1907년 서울진공작전
본문
1855년 4월 2일(음력) 경북 선산군(善山郡) 구미면(龜尾面) 임은리(林隱里, 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와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진성이씨(眞城李氏) 사이에서 허훈(許薰), 허신(許藎), 허겸(許蒹)에 이어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형(季馨)이고 호는 왕산(旺山)이다 1861년 7세에 숙부 해초공(海樵公) 허희(許禧)에게 글을 배웠다. 이어서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한편으로는 근기학파(近畿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를 계승한 맏형 허훈에게 학문을 배웠다. 1869년 15세에 순천박씨 박수현(朴壽鉉)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22세에 부인 순천박씨와 사별하고, 24세에 평산신씨 신재영(申在英)의 딸과 재혼하였다. 1881년 아버지를 여읜 뒤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며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에서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가 강회(講會)를 개설하자 여기에 참석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고 1890년경 고향인 선산 임은을 떠나 진보의 신한(新漢)으로 이주하여 전장(田莊)을 관리하면서 실학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벽도(碧濤) 양제안(梁濟安) 등 각처의 우국지사들과 교유관계를 넓혔다. 1892년 양제안과 함께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관개를 시도 하였고, 1896년 김산의진에 참여한 계기는 양제안과의 친분이 영향을 미쳤다. 1894년 맏형인 허훈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피하여 청송군(靑松郡) 진보면(眞寶面)의 흥구리(興丘里)로 이거하여 피난생활을 했다. 1895년 명성왕후의 시해와 단발령이 공포된 뒤, 1896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맏형 허훈이 진보에서 창의하였고, 그는 김산에서 창의하였다. 김산 지역에서는 이 지역의 유생 여영소(呂永韶) · 여중룡(呂中龍) 등이 1896년 1월부터 창의를 도모하였다. 이때 그는 조동석(趙東奭) · 이기찬(李起燦) · 강무형(姜懋馨) 등 상주와 선산지역의 유생들을 규합하여 창의를 준비하였다. 마침 김산 지역의 통문을 보고, 3월 28일 상주와 선산의 유생들을 이끌고 김산으로 들어갔다. 3월 29일 금릉향교(金陵鄕校)에서 향회(鄕會)를 개최하고 김산의진을 결성한 뒤,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군례(軍禮)를 행하고, 「김산창의대장(金山倡義大將)」이라 쓴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그 진용을 정비하였다. 이 때 그는 참모로 참여하였는데, 그의 형 허겸을 비롯하여 양제안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4월 2일 김산의진은 조직 · 군비 · 전략 등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경상감영의 관군이 출동하자 흩어지고 말았다. 4월 7일 그는 상주 · 선산 등지로 통문을 돌리고 직지사(直指寺)에서 재기하였다. 그러나 4월 17일 경상감영 관군과의 전투에서 의병은 관군이 쏘는 몇 차례의 포격에 괴멸하고 말았다. 그 뒤 김산의진은 무주(茂朱) · 황간(黃澗) 등을 전전하면서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유인석(柳麟錫) · 정인석(鄭寅錫) 등과 합세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군과 무려 32회의 교전을 치렀고, 양제안은 총상을 입기도 하였다. 결국 김산의진의 잔여세력은 충북 진천(鎭川)에서 ‘의병을 급속히 해산하라’는 국왕의 봉서(封書)를 받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 뒤 허훈이 은거하고 있던 흥구리로 돌아가 허훈과 함께 학문에 열중하며 약 3년을 은거하였다. 이때 박상진(朴尙鎭)이 그의 문하로 들어왔다. 1898년 초 상경하여 광무정권의 개혁정치와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국권침탈에 반대하는 건의소청(建議疏廳)에 참여하였다. 그는 상소운동을 벌이는 한편, 황국협회(皇國協會)에 참여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899년 2월 1일 45세의 나이로 관직에 나아갔다. 상소운동과 황국협회의 정치운동에 참여할 때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2월 1일 원구단 참봉(圜丘壇參奉), 2월 6일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 2월 22일 소경원 봉사(照慶園奉事), 4월 4일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그리고 1903년 10월 승훈랑(承訓郞) 등을 거쳐, 1904년 4월 3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면서 관료 생활을 이어나갔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4월 1일 주차일본공사관수원(駐箚日本公使館隨員), 4월 3일 통훈대부 중추원 의관, 5월 11일 정3품 통정대부, 5월 28일 평리원 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8월 3일 평리원 재판장(裁判長), 8월 10일 의정부 참찬(參贊) 등 고위관직에 연이어 올랐다. 10월 27일에는 관제이정소(官制釐正所)의 의정관(議定官)을 겸하였다. 1905년 1월 8일 의정부 참찬을 사직하고 일본을 배격하는 격문을 발하는 등 배일언론투쟁(排日言論鬪爭)을 시작하였다. 3월 1일 비서원승(秘書院承)을 역임하는 등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정치적 경륜을 넓힌 그는 배일운동 단체와 연계하여 일본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배일언론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한편 그는 공제소(共濟所) · 보안회(輔安會) ·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 공진회(共進會) · 정우회(政友會) · 충의사(忠義社) 등 구국운동 계열 단체에 참여하였다. 1903년 4월경 윤이병(尹履炳) · 송수만(宋秀萬) · 이상천(李相天) · 정훈모(鄭薰謨) · 박정빈(朴正斌) · 김연식(金璉植) 등과 연명하여 상소 「논시사소(論時事疏)」를 올려 자강개혁론(自强改革論)을 주장했다. 이 상소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구도 속에서 중립적 외교 노선을 선택하는 것이 자주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며, 자주국을 지키려면 내정과 외교를 개혁해야 하고, 그 개혁을 추진하려면 먼저 친러파와 친일파의 우두머리 이용익(李容翊)과 이근택(李根澤)을 주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3년 10월 승훈랑(承訓郞)에 오른 다음 올린 「재소(再疏)」에서도 이용익과 이근택의 죄상을 들어 그들을 처단할 것과 내정개혁을 통해 국민의 원성을 풀어줄 것을 주청하였다. 그 외에도 1904년 4월 또다시 이용익과 김영준(金永準)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3년 6월에 조직된 공제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본 제일은행권 유통반대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공제소는 소장 윤이병, 총무 심상희(沈相禧), 주무 고석주(高石柱) 등이 주도한 보부상 단체이다. 이때 그는 송수만 · 심상희 · 김홍제(金弘濟) · 이문화(李文和) 등과 함께 전국적으로 보낸 「통문(通文)」과 공제소의 「광고문(廣告文)」을 통해 일본 화폐의 침투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1904년 6월에는 한일의정서와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과 외교를 장악한 일본은 6월 6일 대장성(大藏省) 관방장(官房長)을 역임한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郞)를 파견하여 하야시 곤스케(林勸助)와 함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였다. 6월 28일 평리원 판사로 있던 그는 이상천 · 박규병(朴圭秉) · 김연식 · 정훈모 등과 함께 연서한 「배일의거통유문(排日義擧通諭文)」을 전국적으로 발송하였다. 이 통유문은 한일의정서의 침략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규탄하고, 전국적으로 일본에 맞서 일어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곧이어 윤병(尹秉) · 홍필주(洪弼周) · 이기(李沂) · 노일수(盧日壽) 등과 함께 진신장보소청(縉紳章甫疏廳)을 결성하고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통유문을 올리기도 했다. 1904년 8월 10일 의정부 참찬에 임명된 뒤, 봉건적 구습을 청산하고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개혁안으로 10가지 헌의(獻議)를 제출하였다. 이 개혁안이 채택되지 않자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4년 9월 대한협동회에 참여하여 재무부장에 임명되었다. 대한협동회는 1904년 7월 조직되어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해 반대운동을 벌이던 보안회를 동년 9월 개칭한 단체인데, 회장 이상재(李商在), 부회장 이준(李儁), 총무 정운복(鄭雲復), 평의장 이상재(李商在), 서무부장 이동휘(李東輝), 편집부장 이승만(李承晩), 지방부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대한협동회 재무부장으로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협조하였던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탄핵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0월 17일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재정화폐정리에 착수하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으며, 10월 27일 설치된 관제이정소(官制釐正所)의 의정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그 활동을 거부하다가 12월 13일 해임되었다. 1904년 11월경부터 일진회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참정(參政) 신기선 · 내부대신 이용태(李容泰) 등과 함께 12월 12일 창설된 공진회에 참여하였다. 공진회는 회장 이준, 부회장 윤효정(尹孝定), 평의원 윤효정 · 윤하영(尹夏榮), 총무 나유석(羅裕錫) 등이 조직한 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했던 단체였다. 한편, 12월 24일 정우회(政友會)를 조직하고 반일 · 반일진회(反日反一進會)를 목표로 한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성토일진회서(聲討一進會書)」를 발표하여 일진회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였으며, 형 허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진회를 타파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04년 8월경 충의사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4년 8월경 조직된 충의사는 전 · 현직 관인 및 유생들이 충군애국을 표방한 단체인데, 그는 현직 관료로서, 과거 의병투쟁에 함께 참여했던 여중룡(呂中龍) · 이건석(李建奭) · 우용택(禹龍澤) · 강원형(姜遠馨) · 김진수(金進洙) · 김호규(金濩圭) · 이병구(李炳九) 등의 영남유생들과 함께 배일언론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1월 8일 의정부 참찬을 사직한 뒤, 자신을 따르는 수십 인의 유생들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동포들의 분기(奮起)를 호소하는 「배일격문(排日檄文)」을 전국적으로 배포하였다. 이 격문을 통해 일본의 한국침략을 비판하고, 전 국민에게 반일의병의 봉기를 촉구하였으며, 나아가 철도의 작폐와 국권의 침탈, 그리고 북진하는 일본군의 작폐를 지적하였다. 이즈음 고종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입궐한 최익현(崔益鉉)이 올린 상소가 큰 반향을 일으키자 통감부는 그가 올린 격문과 최익현의 상소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3월 1일 비서원승에 임명되었다. 3월 9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3월 6일과 7일 『황성신문』에 게재된 최익현의 상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1월 초 그가 올렸던 「배일격문」의 실체를 파악하였다. 통감부는 배일언론활동을 벌이고 있는 재야유생들의 배후이자 배일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최익현과 그를 함께 지목하였다. 이 날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와 협의한 후 최익현과 그가 한일의정서를 비난하여 경성의 안녕질서를 파괴하였다는 이유로 일본군 헌병대에 구금하여 조사한 뒤 돌려 보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외부대신에게 통고하였다. 또 3월 10일 저녁에는 일본공사관 통역관 시오가와(鹽川)는 그를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그의 배일운동이 양국의 국교를 방해하는 것이니 급히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가라고 협박하였다. 3월 11일 아침 일본헌병대장이 다시 그를 비롯하여 최익현 · 김학진(金鶴鎭)을 잡아 가둔 후 일본을 비난하고 배척한 이유를 물었다. 이에 최익현은 “임금을 위하여 바른 말로 간(諫)하는 것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인데 왜 협박(脅迫)하느냐”고 꾸짖었다. 이들은 남대문 창동(倉洞) 일본군병참사령부로 이송되었다. 외부대신 이하영은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그와 최익현 · 김학진을 즉시 석방하여 귀가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또 영남유생 강원형 · 여중용 · 우용택 · 이병구 · 지우석(池禹錫) 등도 일본군사령부에 투서하여 그와 최익현 · 김학진 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3월 26일 김학진은 석방되었고, 이튿날 최익현도 석방되어 강제로 귀향하였다. 그러나 그는 4개월여 만인 7월 13일 석방되어 귀가하였다가, 7월 19일 오전 9시 경부철도 제2열차에 강제로 탑승된 채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그 후 김천 지례(知禮)의 삼도봉(三道峰) 아래 두대동(頭岱洞)에 은거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은거하던 두대동을 떠났다. 그는 경상 · 전라 · 강원 · 경기도를 돌면서 많은 동지 및 유생들과 접촉하며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때 그는 남으로는 곽종석(郭鍾錫), 북으로는 현상건(玄尙健) · 이학균(李學均), 서로는 유인석(柳麟錫) 등 각처의 저명한 의병장들과 접촉하여 다시 창의하도록 독려하였다. 1906년 5월 5일(음력), 당시 서울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강년(李康年) · 여중룡 · 이병구 · 우용택 등과 혜화동(惠化洞)에 모여 창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는 안동을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 이강년은 상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 여중룡은 김산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를 거쳐 의병장 최익현과 합세하여 서울에 모여 통감부를 격파하기로 맹서하고 창의를 준비하였다. 그 후 여중룡은 김산에서 창의를 계획하였으나 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강년은 문경에서 창의하였다. 이때 그는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 · 정용기(鄭鏞基) 부자를 독려하여 영천지방에서 창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토록 하였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의 퇴위, 7월 24일 정미7조약, 그리고 7월 31일 군대해산 등 일련의 망국 사태가 이어지자 대규모의 의병부대가 전국 각처에서 결성되었다. 그는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漣川) · 적성(積城) 일원에서 창의하였다. 이미 1907년 1월 허겸과 함께 기의(起義)하기로 약속하고 있던 그는 맏형 허훈이 토지 삼천여 두락을 매각하여 준 군자금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7년 7월 고종으로부터 비밀리에 ‘기의(起義)’하라는 의대조(衣帶詔)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연천에서 창의하여 경기도 동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를 규합했다. 우선 고양을 근거지로 삼아 연천 · 삭령 일원으로 근거지를 넓혔고, 연기우부대(延基羽部隊)와 합진하여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이어서 철원 보개산(寶蓋山) 부근으로 가서 김진묵(金溱默) · 왕회종(王會鍾) · 김원묵(金元默)의 부대와 연합하였다. 이리하여 의병 300명을 거느리는 총대장(總大將)이 되어 연기우와 김진묵을 부장(副將), 왕회종을 재무관(財務官)으로 하는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한편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해산 군인 김규식(金圭植)이 거느린 의병부대를 포섭하여 세력을 떨쳤다. 1907년 11월 전국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의 연합을 위해 휘하의 김훈(金壎)을 관동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의 참모장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마전 · 적성 일원에서 활동하며 지평 · 가평 일원에서 활동하던 이인영과 함께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1907년 11월 전국 각처에서 모인 48개 의병부대, 1만 명에 이르는 의병이 양주에 집결하여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였다.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총대장이 되고, 그는 군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관동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 교남의병대장 박정빈(朴正斌), 황해진동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의병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의병대장 정봉준(鄭鳳俊), 호서의병대장 이강년, 호남의병대장 문태수(文泰洙) 등이 참여하였다. 1908년 1월 초 총대장 이인영과 함께 그는 연합의병부대를 지휘하여 서울을 향해 진군령(進軍令)을 내렸다. 그는 군사장으로서 심복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순방하여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면서, 의병은 애국혈통(愛國血統)이니 열강도 의병을 국제공법상(國際公法上)의 교전단체(交戰團體)로 인정하여 한국 의병들의 활동을 성원(聲援)해 줄 것을 요청하는 통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은 약 300명의 선봉대를 인솔하여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현재 망우리공원)까지 진격하였다. 1908년 1월 15일 그가 거느린 선봉대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 김규식과 연기우가 일본군이 쏜 총탄에 맞고 부상을 당했다. 1908년 1월 28일 총대장 이인영이 거느린 본대의 일부인 약 2,000명이 도착하였다. 총대장 이인영이 지휘하는 13도창의대진소는 서울진공을 위한 준비를 완료하고, 음력 정월을 기해서 통감부를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이 별세했다는 흉보를 받고 귀향하고 말았다. 이에 모든 지휘권은 군사장인 그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나 서울진공을 일단 중지하라는 이인영의 통문이 각 의병진에 배포되면서 각 의병부대들은 본래의 유진소(留陣所)로 돌아갔다. 각 의병부대들은 각기 본거지를 근거로 유격전(遊擊戰)을 펼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1908년 2월 양주를 거쳐 다시 북상하여 임진강 유역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인환 · 권준 · 왕회종 · 김진묵 · 박종환 · 김수민 · 김규식 · 연기우 · 이은찬 · 김응두 등을 규합하여 관동창의원수부(關東倡義元帥府)를 결성하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군율을 정하여 민폐를 방지하였으며,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군비를 조달하였다. 나아가 통고문을 발하여 납세와 미곡의 반출을 금지하고 의병의 군량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침략의 협력자인 한인 순사 · 헌병보조원에게 협박장을 보내고, 통신선을 절단하여 그들의 연락 체계를 마비시켰으며, 일제 침략의 하부기관인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각 의병부대들의 전열이 어느 정도 정비되자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준비하였다. 1908년 4월 21일 이강년 등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을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수하의 박노천(朴魯天) 등을 서울에 파견, 통감부파원(統監府派員)과 교섭하여 고종의 복위, 통감부 철거, 관청의 일인 관리 퇴송, 외교권 환귀 등 32개 조에 달하는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였다. 1908년 6월 11일 영평군 서면(西面) 유동(杻洞) 박정연(朴政淵)의 집에 잠복하고 있던 중 유산헌병분견소와 철원헌병분견소의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6월 17일 서울 헌병대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동양평화(東洋平和)를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는 포부를 피력하였다. 또 두 차례에 걸친 주차군헌병사령관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에게 직접 심문을 받으면서 일본의 침략을 성토하였고, 나아가 의병을 일으킨 목적과 국권회복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 심문과정에서 아카시 겐지로는 그의 인품과 식견에 탄복하여 대단한 선비라고 칭하였다는 일설도 전한다. 1908년 7월 7일 평리원으로 넘겨졌다. 평리원에서 진행된 1차 심문에서 한국인 판사와 검사가 교대로 의병을 일으킨 연유를 물었다 이에 “나는 일인에게 피착(被捉)되었으니 본국 관인은 묻지 마라.”고 하며 이들을 질책하였다. 다시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으로 넘어 갔으나 심문받기를 거부하였다. 9월 18일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사형이 집행될 때 일본 승려가 불경을 외우려 하자, “혹 지옥으로 떨어진대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으랴.”면서 거절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국가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 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라는 유시(遺詩)를 남겼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뒤, 그 시신을 제자 박상진이 반장(返葬)하여 지천(芝川) 방암산(肪巖山)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당시 수많은 유생들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추앙하였다. 그 중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고관 중의 충신(忠臣)’으로 그를 평하였다. 저술로는 『왕산선생문집(旺山先生文集)』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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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교(絞) 경성공소원 1908-09-18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상고 기각 대심원형사부 1908-10-0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구미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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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경상북도 구미시
2 항일의병 13도창의군 탑 서울특별시 중랑구
3 장소 김산의진 창의지 경상북도 김천시
4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5 비석 선산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경상북도 구미시
6 연천군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경기도 연천군
7 비석 왕산 허위선생 순국 기념비 대구광역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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