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27
성명
한자 陳其美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8 훈격 대한민국장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핵심인사로, 1912년 신규식(申圭植)이 한중 양국의 우의 및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참여하여 한국독립운동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독립운동 및 양국 정부간 교섭을 적극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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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천치메이(陳其美)는 1912년 중국혁명동맹회 인사로서 신아동제사에 몸담았다. 신아동제사는 중국의 혁명인사들이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협조했던 1910년대 초 최대의 조직이었다. 아울러 이를 기반으로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 수립과 선포가 가능했다고 평가받는다.

천치메이의 조카인 천궈푸는 그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신아동제사 조직에 관하여 “숙부는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한국 혁명지사들과 상하이(上海)에서 비밀단체인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또한 “숙부는 약소민족에 대한 동정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1912년 말, 숙부가 해외 공·상업 시찰을 원하자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여비 명목으로 4만원을 상하이로 송금하였다. (중략) 대부분은 동지들을 위해 사용하였고 5분의 1, 즉 8천 원 정도는 한국·월남·인도의 혁명당원에 대한 지원과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학생들의 학비 등으로 지출되었다”고 하면서 천치메이가 한국독립운동과 재중 한국인들에 대해 쏟았던 애정을 술회하였다.

민필호(閔弼鎬) 역시 신아동제사가 한국과 중국 “두 나라 혁명지사들을 연계시키는 중추기관”이었다고 하면서 그 조직에 천치메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한국 측 주요 지사와 교류하며 항일 독립투쟁을 지지하던 천치메이는 1916년 5월 18일 상하이에서 괴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개벽(開闢)(1925. 8. 1) 제62호 3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별집 제2집 397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8) 제22권 107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9) 제35권 381면
  • 기려수필(騎驢隨筆)(국사편찬위원회, 1971) 255면
  • 한국혼(韓國魂)(신규식 저, 민필호 편, 1971) 128면
  • 독립신문(獨立新聞)(1919. 10. 14)
  • 동아일보(東亞日報)(1922. 9. 28)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천치메이(진기미) -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씽현(吳興縣) -
본문
1878년 1월 17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씽현(吳興縣)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잉스(英士), 호는 우웨이(無爲)이다. 신해혁명 전후 시기 상하이(上海) 지역의 대표적인 혁명파 지도자로 당시 상하이와 난징(南京)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韓人) 지사들과도 많은 친분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대표적인 친한파(親韓派) 인물이다. 어려서는 사숙(私塾)에서 유교경전을 공부하다 1903년 상하이로 나와 한때 제사회사(製絲會社)에 취업하기도 하였다. 1906년 뜻을 정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東京) 소재 경감학교(警監學校)에 입학하여 경찰, 법률 관련 공부를 한 다음 1907년에는 동빈학교(東斌學校)로 옮겨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 쉬시린(徐錫麟), 추진(秋瑾), 장징장(張靜江) 등 같은 저장 출신 반청혁명가들과 교유하였다. 이후 쑨원(孫文)이 만든 혁명단체인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1908년 쑨원의 명을 받고 귀국하여 상하이를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여름에는 혁명파 신군 중심으로 저장기의(浙江起義)를 일으키지만 중간에 정보가 새면서 실패하였다. 또 같은 해에 혁명파 신문인 『중국공보(中國公報)』, 『민성총보(民聲叢報)』를 창간하였고 혁명파 동지인 쑹자오런(宋敎仁)과 함께 『민립보(民立報)』를 만들어 혁명의 선전에 나섰다. 또한 혁명세력 결집의 방편으로 비밀결사인 청방(靑幇)에 가입하여 비밀결사 멤버들을 혁명 활동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맡았다. 근대 중국의 민족주의 체육운동의 시효가 된 정무무술학교(精武武術學校)를 만든 것도 이무렵이었다. 이러한 비밀결사 관련 활동과 체육활동 등을 통하여 위챠칭(虞洽卿)을 비롯한 많은 상하이 지역 자본가들, 비밀결사 지도자들이 반청혁명에 가담하는 계기를 만든 것도 그의 공로였다. 1911년 7월 동맹회 중부총회가 상하이에 만들어지자 서무부장에 추대되었으며 1911년 10월의 우창기의(武昌起義) 발발 직후인 11월 3일, 상하이기의를 일으키는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어서 상하이 신군(新軍)들을 기반으로 저장성 전역의 기의와 혁명정부 조직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신해혁명의 전체적 과정에서 우창기의와 함께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흔히 상하이기의와 그에 이은 상하이 독립을 들고 있는 만큼 신해혁명 전반에 미친 그의 역할과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군사예비학교인 진무학교(振武學校)에 유학한 다음 다카다(高田)에 있는 포병부대에서 견습생으로 있던 장제스(蔣介石)도 급거 귀국, 그의 휘하에서 저장 독립에 참여하였다. 장제스는 1907년 도쿄에 유학하였는데 두 사람은 같은 저장성 출신으로 교유하기 시작하였고, 함께 쑨원 중심의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 활동하기도 했던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훗날 장제스의 정치적 대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쑨원에게 장제스를 추천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이를테면 장제스의 정치적 출발점은 바로 그와의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와 장제스의 관계를 말할 때 항상 논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상하이 지역 혁명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타오청장(陶成章) 암살문제가 있다. 일본에서의 동맹회 활동에서부터 그의 비밀결사 우두머리로서의 태도, 특히 도박과 매춘 등에 대하여 비판을 제기했던 타오청장은 신해혁명 이후에도 그가 도독(都督)에 취임하는 것을 반대하는 등 갈등을 이어갔다. 이에 그는 장제스를 통하여 타오청장에 대한 암살을 지시하였고 1912년 1월 14일 타오청장은 상하이의 한 병원에서 암살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혁명운동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12년 2월 쑨원과 위안스카이(袁世凱) 사이의 협상 끝에 쑨원이 임시대총통직을 사임하였고 이어 위안스카이가 주도하는 베이징정부(北京政府)가 성립되었다. 상하이 혁명세력의 최고지도자인 도독의 지위를 사퇴한 그는 신해혁명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황싱(黃興)과 함께 쑨원을 따라 베이징으로 가서 위안스카이와 회견하고 개혁과 국부(國富) 증진의 방안 등을 개진하였다. 그 결과 쑨원은 전국철로독판(全國鐵路督辦)에 황싱은 광무총판(鑛務總辦)에 임명되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해외 정치제도의 감찰이라는 명분으로 해외유학을 권하였다. 이어 위안스카이는 그를 베이징정부의 공상부장(工商部長)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당시 정치적 상황은 위안스카이가 난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한다는 쑨원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하면서 혁명에 대한 ‘배반’의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3년 혁명파의 지도자 쑹자오런에 대한 암살을 사주하는 등 혁명에 대한 ‘배반’으로 나아갔다. 1913년 위안스카이 토벌전쟁 곧 토원운동(討袁運動)에 토원군 상하이 지역 총사령으로 참여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토원운동 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가 쑨원과 함께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다. 혁명의 실패 후 실패의 원인을 둘러싸고 지도자들 간에 얼마간의 이견이 노출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혁명세력 내부에서의 의견불일치가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서 쑨원은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 강조되는 형태의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중화혁명당 조직이 이러한 엄격한 개인적 복종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비밀결사 활동에서의 경험이 들어 있었으니 이런 점 때문에 황싱을 비롯한 적지 않은 혁명지도자들이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1915년 귀국하여 위안스카이 타도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중 1916년 5월 위안스카이의 사주를 받은 자객(사실은 위안스카이의 지령으로 봉천파 군벌의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인 장종창(張宗昌)에게 매수된 자객) 에 의해 살해되었다. 묘는 고향인 우씽현에 있다. 한국 독립지사들과의 교유는 신해혁명 발발 수년 전인 1908년 상하이로 망명해 간 김규흥(金奎興)의 경우에서 처음 확인된다. 고종의 비밀자금 처리와 이 자금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망명길에 오른 김규흥은 망명 초기 상하이와 난징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던 것 같다. 김규흥의 상하이와 난징에서의 활동상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김규흥의 상하이행이 고종의 밀명에 따라 비자금을 찾아서 군관을 양성하는 것이었다면, 이 일을 위한 중국 측 인사들과의 교섭이나 준비가 그의 활동범위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김규흥의 활동은 그의 망명 동기에서 이미 밝힌 대로 어디까지나 조선왕조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해야만 할 것이다. 왕실비자금의 처리를 통한 군관양성이라는 그의 망명 목적은 처음부터 고종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 시기 그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근왕적(勤王的)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규흥은 망명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김복金復으로 고치고 이후 중국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김복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김규흥이 망해버린 조선의 국권회복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 망명 직후부터 김규흥은 공화혁명을 주장하는 혁명파와 급속하게 가까워지면서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고 공화제를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얼마 뒤 광둥(廣東)에 가서 활동하던 시절 김규흥이 상하이 지역 혁명파의 중심적인 지도자인 천치메이와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광동지역 혁명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쩌우루(鄒魯)에게 천치메이를 소개해주는 역할까지 했다고 하는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신해혁명 이전 시기 상하이로 망명해간 김규흥은 천치메이와의 교류를 통하여 공화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어서 공화혁명의 중심지인 광둥으로 옮겨가 중국 공화혁명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천치메이는 신해혁명 직후 중국혁명에서 조국 광복의 가능성을 찾고자 상하이와 난징 지역으로 망명해온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등 한인지사들과도 매우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군사와 재정적 측면에서 한인 지사들의 중국 내 활동을 적극 도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규식이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상하이로 와서 활동하기 시작하던 1912년 2월 초 무렵부터였는데, 그는 특히 한국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인도 등 식민지가 된 아시아의 약소민족들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나타내고 있어서 이들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실제적인 원조에 앞장 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카인 천궈푸(陳果夫)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1912년 말 위안스카이가 회유자금으로 제공한 4만 원 가운데 8천 원 가량을 한국, 베트남, 인도의 혁명당인들을 도와주고 중국에 와 있던 한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보조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신규식에게 한국독립을 선전할만한 역사책이나 전기물, 잡지를 발간하도록 인쇄기계들을 대여해 주겠다는 제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신규식이 지은 그에 대한 추모시에 나오고 있는데, 뒤에 신규식의 사위가 된 민필호(閔弼鎬)의 주장에 따르면 신규식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가 금전적인 도움을 준 적도 있다고 한다. 1916년 그가 암살당한 다음 일년이 지난 1917년 5월 18일, 신규식은 그의 묘소가 있는 우씽 삐랑호반(碧浪湖畔)을 직접 찾아가 추모의 마음을 전했으며 추모의 시를 지어 헌정하기도하 였다. 다음으로 신해혁명시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측의 지원을 거론할 때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지적되어온 것으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조직을 통해서도 그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이 확인된다. 민필호가 쓴 신규식의 전기에는, 신규식이 중국 망명 후 점증하고 있던 한인들을 규합하여 동제사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그 회원이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심인물로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申采浩), 문일평(文一平), 박찬익(朴贊翊), 신건식(申健植) 등 15명을 들고 있다. 또 이와는 별개로 한국과 중국 양측의 혁명지사들을 연결하고 우의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신아동제사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여기에는 당시 국민당(혁명파)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참여하고 있었으니, 천치메이, 쑹자오런, 후한민(胡漢民), 따이지타오(戴季陶), 랴오중카이(廖仲愷), 쩌우루(鄒魯), 쉬치엔(徐謙), 쟝지(張繼)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여 동제사와 신아동제사가 이 시기 한인 독립운동의 핵심조직이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 신아동제사의 핵심 멤버로서 그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민필호의 이러한 언급을 근거로 하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자들 가운데 동제사와 신아동제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그 결과로 이 시기 상하이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이 동제사와 신아동제사의 두 단체였으며, 이 두 단체 중심의 독립운동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결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는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기초를 마련하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아동제사의 성립과 운영을 비롯한 중국 혁명파 인사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이 1919년 이후 한국독립운동의 전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그 속에 천치메이의 중요한 역할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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