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26
성명
한자 陳果夫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6 훈격 대한민국장
1912년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이 결성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참여하여 활동함.
1919년 이후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지도급 인사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자금을 지원하고, 임정 요인들의 신변 보호에 힘쓰는 등 한국독립운동에 협조함.
1932년 윤봉길의사 거사 후, 1932년 장개석과 김구의 면담을 주선하여, 한국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남경중앙군관학교 한인반을 특설하여 이후 한인을 입학시키는 데 협조함.
1940년 중경(重慶) 임시정부(臨時政府)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할 수 있도록 주선함. 1942년 중경(重慶)에서 열린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 창립대회에서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명예이사로 추대됨. 이후 1945년 해방시까지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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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천궈푸(陳果夫)는 1912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이 결성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신아동제사는 1912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한국과 중국 지사들의 친선단체였다.

1919년 이후 중국국민당의 지도급 인사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고, 요인들의 신변 보호에 힘쓰는 등 한국독립운동에 협조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사 의거 후 장제스와 김구의 면담을 주선했다. 한국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난징(南京)중앙군관학교 한인반을 특설하여 이후 한국인을 입학시키는 데 힘쓰기도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주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비밀리에 보호하였다.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김구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천궈푸를 비롯한 국민당 정부 요인 천리푸(陳立夫)·우티에청(吳鐵城)·주칭란(朱慶瀾) 등은 김구의 피신을 직접 도와주었다. 한편 국민당 정부는 장제스와 김구의 회담 후부터 김구에게 매월 5천원을 지원해주었다.

1940년 충칭(重慶)에 소재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42년 충칭에서 열린 한중문화협회 창립대회에서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명예이사로 추대되었다. 이후 1945년 해방시까지 지속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196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만주(在滿洲)의 부(部)(34)
  • 일본외무성특수조사문서(日本外務省特殊調査文書) 26권 562면, 27권 619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제4권 613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7권 759면
  • 매일신보(每日申報)(1933. 10. 10)
  • 일제시대 상해 거주 한인의 법적 지위와 한인사회의 사법문제(손과지, 국사관논총 90집, 2000) 215면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천궈푸(진과부) -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씽현(吳興縣) -
본문
20세기 전반기 중국 국민정부 시기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등 요직을 맡았던 중요 정치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국민당 조직부 산하의 비밀정보기구의 중심 인물로서 장제스(蔣介石) 중심의 국민정부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비밀정보기구의 주요 인사였기 때문에 부정적 평가도 존재하는 인물이다. 1892년 10월 27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씽현(吳興縣)에서 태어난 그는 신해혁명 시기 상하이(上海)와 저장지역 혁명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천치메이(陳其美)의 조카로서 이른바 혁명 가문의 일원이다. 특히 친동생 천리푸(陳立夫)와 함께 국민당 정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흔히 CC계로 일컬어지는 계파를 형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1920년대에서 1940년대에 걸친 국민당정권 시기에 장제스, 쑹즈원(宋子文), 쿵샹시(孔詳熙) 집안과 함께 사대가족(四大家族)으로 칭해지며 권력과 특권을 독점하였다는 비난의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일찍이 창사(長沙)의 명덕학교(明德學校)를 다니다가 1907년 이후 항저우(杭州)에 있는 육군소학당(陸軍小學堂)으로 옮겼고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1911년에는 난징(南京)의 제4육군중학당(第四陸軍中學堂)에 들어갔으며, 이 해에 혁명파 단체인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이어 삼촌인 천치메이를 따라 상하이와 저장 지역 신해혁명에 참여하였다. 토원전쟁(討袁戰爭), 곧 제2차혁명 시에는 상하이에서 활동하였으며 1915년에는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 비밀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상하이에서 전통 은행인 전장錢莊이나 증권거래소 등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동안 후일 국민당 정권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장제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년 1월에 열린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일은 장제스와의 관계가 큰 작용을 하였는데, 이후부터 그는 장제스의 최측근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같은 해 6월부터 국민당 중앙조직부 비서에 취임하였고 곧 이어 중앙조직부 부장이 되었으며, 7월에는 최고 핵심기구인 중앙정치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장제스의 반공(反共) 군사정변인 1927년 4·12정변 이후 장제스 정치권력의 기반이 되는 상하이의 임시정치분회 위원이 되었고, 9월에는 난징국민정부 정부위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감찰원(監察院) 부원장, 1929년 3월 이후에는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같은 해 4월 이후에는 다시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臺灣)으로 옮겨 갈 때까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중앙조직부장, 국민정부위원 등 요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특히 국민당 조직부를 통한 정보공작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막강한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장제스의 측근 군인장교들로 구성된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흔히 남의사(藍衣社)로 알려져 있음) 의 정보활동과 함께 국민당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국민당을 통한 독재적 정보 통치를 이르는 당통(黨統)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로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으로 공식적으로 철수하기 전인 1948년 12월, 고질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타이완의 타이중(臺中)으로 거처를 옮겨 치료에 전념하였다. 이후 1950년 국민당 중앙평의원에 선임되었고 1951년 타이베이(臺北)로 갔다가 같은 해 8월 25일, 59세를 일기로 타이베이에서 병사하였다. 그와 한국독립운동의 관계는 숙부 천치메이를 도와 신해혁명에 참여하던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신해혁명 이전 시기 이미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흥(金奎興)을 비롯한 초기 한인 독립지사들과 천치메이가 밀접한 교류를 맺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천치메이의 조카로서 천치메이를 돕고 있던 그와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1908년 이후 광둥(廣東) 지역에서 혁명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김규흥이 쩌우루(鄒魯) 등 광동지역 혁명파 지도자들에게 천치메이를 소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1908년 이전 시기에 김규흥과 천치메이의 관계가 돈독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기 중국 망명 한인 지사들과 천치메이 사이의 밀접한 교류가 그 뒤에 조카인 그의 한인 지사들에 대한 지원에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일어난 윤봉길의거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국민정부와 국민당의 김원봉(金元鳳), 김구(金九) 지원 과정에 당시 국민당 조직부장이던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김원봉에 대한 지원은 장제스의 측근 장교 그룹이 조직한 삼민주의역행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반면에 김구에 대한 지원은 국민당 조직부장인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구체적으로는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안에 한인특별반을 만들 수 있도록 김구를 지원한 것이었다.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 내의 한인특별반은 일제의 항의와 간섭으로 비록 1년여 만에 폐쇄되기는 하였으나, 이후에도 한인 청년들을 각지의 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이어간 것으로 확인된다.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의 한인특별반 운영의 이면에는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의 상하이침공으로 발생한 상하이사변 이후 장제스와 난징국민정부 측의 대일(對日) 전략으로 확정되는 이른바 ‘장기항전(長期抗戰)’의 한 가지 실천방안으로서 만주(滿洲) 지역의 항일의용군(抗日義勇軍)을 지원하는데에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동원하려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이런 측면으로만 보자면 그를 통한 김구 지원은 중국의 대일전략 추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이라는 ‘한중연대’ 혹은 ‘한중호조(韓中互助)’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김구를 포함한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 또한 중국의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일을 단지 중국을 위한 희생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통하여 중국의 지원을 얻어 한국의 독립운동에 이용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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