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22
성명
한자 蔣介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53 훈격 대한민국장
중국(中國)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교장(校長), 국민당(國民黨) 위원장(委員長)주석(主席)으로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적극 지원하여 공동으로 항일전(抗日戰)을 수행하였고 1940년 9월 17일 임정이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는데 절대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군사를 양성토록 하였고 여러차례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으며, 1943년 10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안(獨立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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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다방면에서 한중연대의 실익을 확인하고 제국주의 일본을 상대로 한 항일전선을 공고히 구축하고자 했다.

1939년 1월 장제스는 충칭에서 한국의 좌·우파 영수들을 만나 한국인들이 중국의 항일공작에 배합할 수 있는 원칙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복국운동의 힘을 배양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일환으로 기존에 있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외에 1940년 가을에 창설한 한국광복군을 승인하기도 했다.

1940년 4월 한국독립당·국민당·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은 치장(綦江)에서 연합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정식으로 중국 당국에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의 성립을 승인해 줄 것을 결의하고 요구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1940년 5월 한국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를 기회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9월 17일 충칭에서 광복군총사령부 성립대회를 거행하였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공동의 적 일본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한 미국·영국·중국 3개국은 협동 작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태평양 방면 중국 전구 총사령관에 장제스를 임명하고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 체제를 본격적으로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측 역시 한국광복군 운영 문제를 일단락하는 한편 광복군의 부서 개편을 단행했다.

특히 1942년 일본이 한반도에서 한국의 청년들을 대규모로 징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이에 장제스는 한국독립운동을 시의 적절하게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고 우티에청(吳鐵城)에게 지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하여금 한반도의 내에서 반일공작을 추진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정부는 1953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9집 113, 143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0집 79, 97, 109~110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1집 55~56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22집 255면
  • 백범김구전집(白凡金九全集)(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1999) 7, 445~446면
  • 외무성경찰사(外務省警察史)(적야부사부, 2005)
  • 신한민보(新韓民報)(1935. 1. 17)
  • 매일신보(每日申報)(1943. 12. 8)
  • 중국(中國)안의 한국독립운동(호춘혜, 1978)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장제스(장개석) - 중국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 -
본문
1887년 10월 31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 씨커우(溪口)에서 소금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의 사숙(私塾)에서 전통교육을 받았으며 16세 때인 1903년부터 고향의 학당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일본육군사관학교 예비학교인 진무(振武)학교에 들어갔다. 1910년 12월부터 니가타현(新潟縣) 다카다(高田)에 있는 일본 육군 포병부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였다. 어릴 때 받은 유교교육과 일본에서의 엄격한 군사훈련은 이후 정치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스스로 존경하는 인물로 왕양밍(王陽明)과 쩡궈판(曾國藩)을 들고 있다거나, 1930년대에 주도한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이 유교적 덕목을 목표로 하는 국민적 훈련을 내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예의염치(禮義廉恥)라고 하는 유교적 덕목과 규율, 청결 등을 국민생활의 기본수칙으로 강조했던 신생활운동은 유교적 훈도와 절도 있는 군대식 훈련을 국민에게 요구하는 전근대적 성격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런 점이 정치사상 내지는 정치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 유학시절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 통상 同盟會로 약칭)에 가입하면서 쑨원(孫文)을 추종하여 혁명운동에 발을 디뎠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근무중이던 다카다 포병부대를 임의로 이탈하여 곧바로 귀국한 다음 천치메이(陳其美)를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上海)와 저장지역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천치메이 사후 군사방면의 측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쑨원에게 접근하여 군사적 능력에 대한 신임을 얻음으로써 쑨원의 측근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특히 1922년경부터 본격화된 코민테른(Comintern)의 대중국 정책의 결과 이른바 연합전선의 상대로 쑨원 휘하의 국민당을 상정하게 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그에 이어 1924년 소련의 군사와 재정적 지원 아래 혁명군(당군)의 육성을 위한 군관학교로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만들어졌는데, 이 군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면서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를테면 황푸군관학교를 자신의 군사와 정치적 대두과정의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푸군관학교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국민당 군대, 곧 국민혁명군의 총사령에 취임함으로써 명실공히 군사적 · 정치적 기반을 확실하게 가지게 되었고, 국민혁명군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국민혁명을 통하여 1928년 전국을 통일한 뒤 난징(南京)국민정부를 수립하고 그 주석에 취임하였다. 신해혁명에서 국민혁명 시기에 해당하는 1910~20년대는 그가 군사적 · 정치적으로 대두하는 결정적 시기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받은 근대적 군사훈련과 군사지도자로서의 자질은 그의 대두에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아울러 1927년 말 상하이 명문가의 딸 쑹메이링(宋美齡)과의 결혼과 기독교로의 개종은 권력 장악에 일정한 기반을 제공하였다고 하겠으나 정략결혼이라는 일부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쑹메이링과의 결혼과 함께 언급해야할 것은, 일생에 비추어 볼 때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할 기독교로의 개종 문제이다. 사실 기독교 입교는 쑹메이링과의 결혼 조건으로 쑹메이링의 어머니로부터 요구받은 것에서 출발한 것이므로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여러 지역 군벌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전국적 규모의 반장전쟁(反蔣戰爭)에서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종교적 체험을 가지게 된 다음부터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일생동안 기독교도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한 때 자신이 번역하고 감수한 성경을 출판할 만큼 성경에 대한 지식도 해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부터 시작된 제1차 국공합작 초기부터 군사 ·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싸고 소련고문 및 중국공산당 측과 마찰을 빚었는데, 1926년 3월 발생한 중산함사건(中山艦事件)을 통하여 자신의 반공적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반공적 입장은 황푸군관학교 창립시기부터 나타났다. 초기에는 군사 · 재정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소련고문들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중도파로서의 입장을 표하고 있었던 것인데, 1926년 7월 북벌(北伐) 개시 이후 단계에 가서는 이러한 입장이 점차 변하여갔다. 북벌을 개시한지 1년도 되지 않아 1927년 3월 양자강 유역의 중심지이며 중국 최대의 경제발전 지역인 난징(南京)과 상하이 지역을 점령하게 된 국민혁명군은 상하이에서 노동운동 조직을 통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하고 있던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 세력을 몰아내고 그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 처형하는 일련의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흔히 4·12정변으로 불리는 이 군사정변은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합작이 파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말하자면 4·12정변은 그의 군사적 · 정치적 권력이 독립적인 기반을 갖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4·12정변 이후 몇 달간 우한(武漢)에서 독자적인 국민당정권을 유지하던 좌파세력도 1927년 8월 결국에는 소련고문, 공산당과의 분열을 공식화함으로써 제1차 국공합작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어 벌어진 이른바 영한합작(寧漢合作)으로 불리는 난징측과 우한측의 통합으로 통일된 국민당정권으로서의 난징국민정부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이후 제2차 북벌을 통하여 1928년 6월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고, 동북을 장악하고 있던 장쉐량(張學良)이 국민당에의 복속을 선언하는 ‘동북역치(東北易幟)’를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1928년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성과를 올렸다. 1928년 난징국민정부 수립 이후부터 전개된 대대적인 군사토벌작전은 공산당 세력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내전중지와 일치항일을 요구하는 공산당의 정치적 선전과 그에 자극받은 장쉐량의 저항에 직면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받아들이면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제2차 국공합작 또한 제1차 국공합작과 마찬가지로 내부적으로 많은 대립과 모순을 안고 있었으니 8년간의 전면항전 기간 동안에도 국공 간의 충돌은 빈번히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국공합작은 8년 항전을 가능하게 하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으니 광범한 농촌과 산악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공산당 주도의 유격전은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물론 1937년 이후 8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전면전에서의 승리는 장제스와 국민당군대의 공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8년항전 가운데 결정적인 분기점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이루어진 미국의 참전이었다. 당시 ‘이제 승리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일기에 적고 있었으니, 미국의 참전이 중국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8년간의 항일전 승리는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다만 항일전 초기에 있었던 난징국민정부와 일본 측의 일련의 강화협상 시도는 비록 왕징웨이(汪精衛)처럼 친일정권 성립에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친일 강화(講和)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당시 국민당 정권의 제2인자이던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전쟁이 전혀 승산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강화조약을 맺고 실제적인 정치적 자치권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충칭(重慶)을 탈출, 일본군 점령 하의 난징으로 가서 전국적 규모의 친일 정권인 왕징웨이 괴뢰정권을 만들었으며 그 때문에 민족배반자 곧 한간(漢奸)의 괴수로 손가락질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장제스도 일본 정보기관과의 접촉이 매우 긴밀했지만 결국 왕징웨이처럼 직접 친일정권 구성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왕징웨이를 한간으로 비난하는 반면, 장제스를 ‘민족적 영웅’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지 않은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항일전쟁 종전 후 1946년부터 본격화 된 국공 간의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정권은 1949년 타이완(臺灣)으로 옮겨갔다. 중국 현대사의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의 하나인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가 패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점령지에 대한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한 공산당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와 국민당 군대 및 관료들의 심각한 부패,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에서의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국민당정부 경제정책의 파탄 등을 중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1949년 이후 진행된 타이완 통치는 군사적 억압통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어서 1947년 2·28사건과 같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대만통치기간 많은 정치인들이 구속되고 군사계엄이 대륙 중국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명목 아래 계속하여 유지되었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가 전면적으로 통제되었으며 이에 대한 저항은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강력한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독재에 의한 타이완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부분적으로 긍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75년 사망 이후 정권을 이어받은 큰아들 장징궈(蔣經國)는 계엄해제 등 민주화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아버지의 독재정치를 부분적으로 청산하는 등 국민적 환영을 받았다. 2000년 야당인 민진당(民進黨)이 타이완의 정권을 장악한 다음 타이베이(臺北) 시내 한복판에 있는 기념관이 자유광장(自由廣場)으로 개칭되었고 전국에 있던 동상이 철거되는 등 격하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8년 마잉주(馬英九)가 총통에 당선되어 국민당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역사적 평가가 일부 회복되는 등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평가가 요동치고 있다. 그런 사이 2003년 『장제스일기(蔣介石日記)』가 유족들에 의해 미국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에 기증되었고 일련의 보존 작업을 거쳐 전면 개방되었다. 『일기』의 개방은 그의 일생사적에 대한 연구와 현대 중국정치 연구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소련과 코민테른의 군사적 · 재정적 지원에 의하여 1924년 6월 광저우(廣州) 근교의 황푸섬에서 정식 개교식을 가진 황푸군관학교는 이후 중국국민당 당군(黨軍)인 국민혁명군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쑨원의 신임을 바탕으로 황푸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고 이어서 국민혁명군의 총사령을 맡으면서 군사적 · 정치적 입지를 굳히게 되었으니, 황푸군관학교는 정치 · 군사적 대두의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초창기 황푸군관학교는 6개월짜리 속성과정으로 단기간에 다수의 군관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1925년 여름에 입학한 3기생을 시작으로 이후 많은 수의 한인(韓人) 청년들이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당시 상당수 한인들이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4기생의 경우에는 24명의 한인 명단이 확인될 만큼 상당수의 한인들이 입교하였다. 또 1927년 2월에 문을 연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의 경우, 1927년 말 광저우봉기로 문을 닫을 때까지 200여 명의 한인들이 재학하고 있었을 정도로 그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들 한인 학생 가운데에는 김약산(金若山)을 비롯한 상당수의 의열단(義烈團) 단원이 포함되어 있었고,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朴殷植)의 장자 박시창(朴始昌)처럼 재중한인독립운동가들의 자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의 한인 청년장교들은 이후 국민혁명군에 편성되어 북벌 등 중국혁명에 참가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가서는 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여 많은 공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7년 4·12정변 이후 본격화된 국공대립과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고, 1945년 해방 이후에 가서는 상당수가 북한으로 귀환하여 정치적 숙청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한인들의 황푸군관학교 입교와 중국혁명 참가는 기본적으로 당시 코민테른이 추진하던 ‘연합전선’과 식민지 약소민족 간의 협력체제 구축 시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측의 주변 약소민족에 대한 태도나 ‘지원’ 정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삼민주의(三民主義), 특히 ‘민족주의’ 내지 ‘대아시아주의’로 대표되는 국민당의 약소민족 정책 속에는 ‘지원을 통한 영향력 확보’라고 하는 전통적 중화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1919년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1·28 상하이전쟁 발발 후인 4월 말에 일어난 윤봉길(尹奉吉)의 일본군 지휘관들에 대한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근거지였던 상하이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항저우(杭州)와 전장(鎭江)으로 옮겼다가 다시 7·7사변 이후에 가서는 창사(長沙), 광저우, 류저우(柳州)로 옮기고 1940년 최종적으로 국민정부가 있던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8년여 동안 유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정부의 인식을 크게 변화시키고 지원을 확대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과 보호에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으며, 임시정부가 여러 지역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칭 이전(移轉) 이후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었다. 사실상 독자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채 중국 내의 망명정부로 존재해야 했던 임시정부로서는 거의 유일한 존립기반이 그와 국민정부의 지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 안에는 ‘중한호조(中韓互助)’로 표현되는 긍정적 의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충칭한국임시정부의 가장 중점적인 활동목표는, 한국의 자주적 독립을 추진하는 데에 부분적으로나마 기여할 수 있는 군사조직을 만드는 것과 외교적 활동을 통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는 것 두 가지였다. 우선 한국광복군 창설을 둘러싼 한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 사이에 벌어진 논의는 1940년 한국임시정부의 충칭 정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임시정부의 독자적 운영권 확보 노력과 중국 측의 이에 대한 견제 및 통제정책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측에서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제정을 통하여 광복군을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그 실제적 운영도 군사위원회에서 파견한 중국 장교들이 장악하도록 하였다. 중국 측의 이러한 정책은,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외국군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일면 타당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조치는, 항일을 위한 연대라는 중한호조의 측면이나 한국 망명정부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측면보다는 주변 약소민족에 대한 통제와 예속이라는 측면을 더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1940년 이후, 특히 1941년 말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한중간에 중요 현안으로 떠오른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문제에 있어서도 국민정부 측에서는 적극적인 승인 의지보다는 소극적이고 관망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국민정부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의 이면에는 한국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분쟁이 워낙 심하여 임시정부가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충분하게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과 다른 열강들, 특히 미국과 소련의 입장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중국 측의 입장이 들어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통하여 전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와 통제,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의 관계를 고려해야만 하는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까닭에 한국임시정부승인 문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을 통하여, 미국의 외교 전략에 따라 강대국의 지위를 갖게 된 중국으로서는 국제공동관리(신탁통치)에 의한 전후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미국 주도의 방안에 동조하는 것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카이로회담 이후 단계에 가게 되면 중국의 독자적인 임시정부승인이란 불가능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측에서는 종전을 앞두고 동맹군의 한국 진공 시에 중국군도 참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었고, 재정적 원조와 민간투자의 확대 등을 포함한 한국에 대한 지원 확대를 검토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국민정부 측에서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전에 거치도록 규정한 ‘적당시기(in due course)’에 대한 방안으로 외교와 국방을 중국인 고문이 담당하는 고문정치를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중국 측의 이러한 적극적인 한반도 개입 정책은 일본 패망 이후 미국군과 소련군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 점령이 이루어진 이후 단계까지 계속되었음도 확인된다. 요컨대 중일전쟁 시기 그가 이끄는 국민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은 그간에 중국(혹은 타이완) 학계나 한국 학계에서 강조해왔던 것과는 달리 중화민국 정부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동병상련(同病相憐)에서 나온 순수한 지원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부정적인 측면들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전후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할 중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국제질서의 일부로서 중국의 주변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한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약소민족에 대한 호혜적 지원’이나 한국과 중국 간의 호혜적 연대, 곧 ‘한중호조’로 보기만은 어려운 것이었다. 또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종종 ‘지원을 통한 통제’라고 하는 ‘중화주의적’ 입장을 강하게 보이고 있어서 조심스러운 접근과 평가가 요구되고 있다. 『장제스일기』에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게 보인다. 한국 문제에 관한 일기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그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한국 인식은 쑨원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중국 중심적 인식, 곧 중화주의적 인식을 기반으로 삼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이는 개인에 대한 수훈이라기보다 그로 대표되는 중화민국 정부의 공로를 인정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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