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13
성명
한자 孫文
이명 孫逸仙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8 훈격 대한민국장
1914년 중국 상해에서 신해혁명에 참여했던 신규식(申圭植) 등 3백여 명이 모여 조국 광복(祖國光復)을 목적으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자 이를 지원하였고,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물심양면으로 후원함.

1921년 광동(廣東) 호법정부(護法政府)대총통(大總統)으로서 최초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학생을 중국군관학교에 받아들여 사관(士官)을 양성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22년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대한 외교협조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상을 높이도록 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에 공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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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쑨원(孫文)은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해 신해혁명을 일으키고 공화제 정부인 중화민국을 수립하였다. 민족·민권·민생 등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주창하고, 이를 중화민국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1920년대 초반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그는 “약한 자를 붙들어 주고, 기울어지는 나라를 구제해 주는 것을 천직으로 삼는다”라고 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드러냈다.

1921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무총장 신규식을 중국 광저우(廣州)에 파견하여 호법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해 승인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신규식은 쑨원에게 아래의 5가지 사항을 전달했다.

1.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호법정부는 상호 외교적 승인을 교환한다.

2. 중국 군사학교에 한국 학생의 입학을 허용한다.

3. 중국은 범태평양회의에 출석한 중국대표에게 한국이 회의 개최지에 파견한 대표와 긴밀한 연계를 취하면서 한국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에 협조하도록 훈령한다.

4. 중국은 한국 군대가 훈련할 수 있도록 일정한 지역을 한국에 조차하는 동시에 5백만원의 차관을 제공한다.

5.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저우에 상주 대표를 파견하며, 그 비용은 중국 호법정부가 부담한다.

쑨원은 이 중 네 번째 항목을 제외한 4 가지 사항에서 동의를 표명하였다.

1921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인 신규식은 오스트리아와 중화민국 정부에 파견되어 정부 승인 문제를 협의했다. 이때 쑨원은 승인을 적극 찬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국민족을 통치하는 정통적인 민주공화 정부임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1925년 쑨원이 갑자기 서거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쑨원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신뢰와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지지와 후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초기 조직을 안정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제8집 3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별집2집 238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8) 제22권 12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8) 제25권 226면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쑨원(손문) - 중국 광둥성(廣東省) 샹산현(香山縣, 현 중산시[中山市]) 중국국민당
본문
1866년 11월 12일 중국 남방의 광둥성(廣東省) 샹산현(香山縣) 췌이헝촌(翠亨村)에서 태어났다. 샹산현은 현재의 중산시(中山市)에 속하며, 주강(珠江)의 하구인 홍콩(香港)에서 약 80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주강삼각주 농촌마을이었다. 중국이 유럽 열강의 침략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던 아편전쟁이 일어났던 곳 부근이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운동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지도자 홍슈취안(洪秀全)의 고향 화현(花縣)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스스로 어린시절을 회고하며 농민혁명 지도자 홍슈취안의 영웅적 활동을 들으면서 자랐고 외세의 침략을 직접 목도하면서 혁명에의 열정을 품게 되었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근현대 중국의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광둥 지역에서 났던것과 무관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중농 출신의 부모 아래에서 전통적 사숙 교육을 받던 중 1879년 하와이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은 성공한 화교로서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던 큰형 쑨메이(孫眉)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훗날 혁명사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쑨메이의 도움으로 하와이에서 교육을 받은 뒤 1884년부터 2년간, 또 1887년부터 5년 간 홍콩으로 옮겨가 영국계 의과대학을 다녔다. 이후 마카오에서 개업의로 활동하여 상당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장, 교육 경력은 동서 문명을 동시에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데에 충분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국어 수준으로 배우게 된 영어는 후일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는 데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하였다. 타고난 다독가(多讀家)로서 여러 분야의 서적을 탐독하기를 좋아하였기에 동서사상을 융합하는 형태로 독자적인 사상체계인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창안하고 그것을 정치적 주장으로 내세우게 된 것은 그런 까닭에 하나의 시대적 산물이었다고 할 것이다.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하던 1894년 11월 하와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흥중회(興中會)는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대한 반대라는 종족주의적 한계를 가진 것이기는 하지만 만주족 왕조, 곧 청조의 타도와 민국(民國), 곧 공화국의 건설을 처음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른바 공화혁명 운동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타이완(臺灣)을 비롯한 일부 영토를 할양해야 하는 치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맺던 1895년, 비밀결사 조직을 기반으로 첫 번째 반청(反淸) 무장기의를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후 1911년 10월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에서 일어난 반청기의가 성공하면서 최초의 혁명정부가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기간을 유럽, 일본,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그의 혁명활동은 해외의 화교들을 중심으로 반청혁명을 선전하고 혁명자금을 모금하여 국내에서 반청기의를 일으키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외 화교들을 혁명의 지지자로 끌어들이는 일은 결코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변법운동의 지도자로 역시 해외에 망명했던 캉유웨이(康有爲) 중심의 개혁운동(입헌운동) 세력과의 경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반복되는 무장기의의 실패로 인하여 혁명의 방법을 둘러싸고 일어난 혁명파 내의 내분 또한 심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창에서의 기의 또한 그 과정을 살펴보자면 처음부터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혁명의 성공이 ‘우연’의 결과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창에서의 기의가 성공한 이후 전개된 전국적인 혁명단체들의 반청 독립선언과 그에 이은 각 성 단위 혁명정부의 성립은 혁명의 성공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우창기의가 일어나던 시기 미국에서 화교들을 상대로 혁명을 선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가 우창기의 발발 이후 두 달 반이 지난 1911년 12월말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런 까닭에 우창기의, 곧 신해혁명의 실질적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귀국 직후 각 성 혁명정부 대표들의 회의에서 초대 임시대총통에 선출된 것은, 혁명운동세력 내에서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상과 명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1912년 1월 1일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첫 번째 임시 대총통에 올랐다. 그러나 뒤이어 청 황제의 퇴위를 조건으로 대총통의 자리를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주는 정치적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당시 혁명세력의 기반은 취약하였다. 이어서 위안스카이가 약속을 어긴 채 국회를 해산하고 임시약법(臨時約法)을 철폐하자 공화국 수호를 위한 전쟁을 일으키지만 위안스카이에게 완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주권의식을 가진 국민’이라는 지지 기반을 가지지 못한 공화혁명은 설 자리가 없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신해혁명을 ‘미완의 공화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이후 몇 차례 지방군벌들과의 합작을 바탕으로 광둥(廣東)을 중심으로 혁명정권을 만들지만 사적 군대를 소유한 군벌들 간의 계속된 다툼 가운데 공화국의 명맥을 유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혁명정권을 바탕으로 군벌들에 대한 정벌전쟁(북벌)을 통한 전국적 통일을 꾀하였지만, 오히려 한때 혁명정권을 지지하던 군벌들과의 대립과 충돌이 격화되어 혁명정권의 존립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1922년 6월에 일어난 광둥 군벌 천즁밍(陳炯明)의 반란사건은 당시 그의 정치적 입지가 얼마나 좁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정치일생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탈 아래 독립국의 지위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속에서 국가적 독립의 회복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열강들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는 사실이다. 열강들의 중국 침탈을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열강들로부터의 재정적 ・ 외교적 도움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니 그자체로만 보자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신해혁명 직후 일본의 일부 기업가들과 벌인 협상에서 만주지역을 일본에 할양하는 대가로서 군사자금을 마련하려고 시도한 것은 군사적 기반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청조 타도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었기에 할 수 있던 하나의 정치적 승부수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비판하던 제국주의 열강과 손을 잡는 일종의 무모한 정치적 투기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무렵부터 시작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중국혁명에 대한 지원정책은 새로운 희망이 되기에 족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10월혁명이 성공한 2년 뒤인 1919년에 만들어진 국제공산당(코민테른, Comintern)은 공산주의혁명의 세계적 확산을 목표로 한 것인데, 특히 식민지 약소국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을 지원하는 전략으로 자본주의 혁명세력과 연합을 통하여 공산주의 혁명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이른바 연합전선정책을 제기하였다. 중국의 경우 코민테른의 지원은 공산당 창당과 국민당과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1922년부터 본격화된 국민당과 신생 공산당과의 연합, 곧 첫 번째 국공합작은 이렇게 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실제적인 출발은 1924년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하여 이루어진 국민당의 개조(改組)였다. 1905년 도쿄(東京)에서 만들어졌던 중국혁명동맹회를 기반으로 신해혁명 이후 정당으로 만들어졌던 국민당은 혁명영수의 개인적 지도력에 크게 의존하는 전근대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데, 코민테른 측에서는 이 국민당에 대하여 연합과 지원의 대가로서 볼셰비키(Bolshevik) 정당으로의 조직개편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코민테른의 재정적 ・ 군사적 지원을 받는 데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진 국민당 측에서 여기에 적극 응하여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대중적 기반을 강조하는 정당조직으로의 대대적인 개편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소련과의 연합(聯俄), 공산당과의 협력(容共), 노동자농민운동의 지원(扶助農工)이라는 새로운 정책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후 소련의 군사 ・ 정치적 원조 아래 국민당 휘하의 당군(黨軍)인 국민혁명군의 육성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군벌과의 전쟁인 북벌전쟁과 전국통일, 대중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국민혁명으로 이어졌다. 국민혁명의 추진과정에서 소련과의 연합이나 공산당과의 협력을 둘러싸고 벌어진 국민당 내부에서의 분파와 대립은 국민혁명의 추진과정이나 성격을 둘러싸고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급기야 1927년 4월, 국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의 공산당에 대한 대탄압이라는 이른바 4・12정변을 불러와 국공합작은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1928년 6월 국민혁명군의 베이징(北京) 입성, 그에 이은 1928년 12월의 이른바 ‘동북역치(東北易幟)’라 칭하는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의 국민당에 대한 복속 선언으로 전국적 통일을 이룩한 국민혁명은 청조 멸망 이래 다각적인 방향에서 모색되어 오던 중국의 국민국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직접적 과정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현대사상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국민혁명의 초기 단계인 1925년 3월 군벌들과의 정치적 협상을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함으로써 국민혁명의 성과를 맛볼 수는 없었지만, 그 단초를 놓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국민당이나 공산당을 막론하고 모두 자신들이 중국혁명의 계승자라고 자처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국민혁명의 기본적 골격과 추진이 그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삼민주의는 1904년에 처음 그 뼈대를 갖춘 이래로 1924년 여러 차례의 강연으로 최종 정리될 때까지 그 내용에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919년 5・4운동을 경계로 하여 그 이전 시기의 삼민주의와 그 이후 시기의 삼민주의의 내용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새로운 삼민주의의 내용과 평가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보아서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와 노동자 농민 계급에 대한 새로운 이해,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신삼민주의는 ‘대중의 발견’으로 일컬어지는 5・4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있으며 그 안에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의 영향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삼민주의의 첫 번째 대목인 민족주의는 공화혁명(신해혁명)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즉 만주족 왕조인 청조의 지배로부터 한족의 민족적 해방을 목표로 한 것으로 반만(反滿) 혹은반청(反淸)으로 표현되었던 것으로 중국 역사상 자주 등장하는 이민족의 한족(漢族)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한족 민족주의라는 종족주의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반만이 황제제의 철폐, 곧 공화혁명 주장과 맞물리면서 전통적 종족주의와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공화혁명의 현실적 무기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평가가 오히려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반만 민족주의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의 역할이 나타나게 되는 5・4운동을 거치면서 반제 민족주의로 거듭나게 된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의 국가적 독립을 회복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반제 민족주의가 신해혁명 단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주의의 실체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동반하는 단계로서의 반제민족주의는 5・4운동 이후에야 나타나게 되고 5・4운동 이후 등장하게 되는 공산주의운동의 영향으로 더욱 중심적인 정치주장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공합작 단계에 가게 되면 반제를 공동의 목표로 하는 식민지 약소국들 간의 연대를 강조하는 ‘반제연대’의 주장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반만 민족주의이든 아니면 반제 민족주의이든 삼민주의 중의 민족주의가 전통적 중화주의적 잔재를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커다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지적은 새겨들을만한 대목이다. 특히 삼민주의 중의 민족주의가 티베트와 몽골, 만주족을 비롯한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요구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그의 민족주의가 가지는 자기 모순적 한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삼민주의의 두 번째 대목인 민권주의 장제스 는 중국의 오랜 정치체제인 황제체제를 전복한 이후 어떤 정치체제를 구축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어떻게 중국에서 실현할 것인가를 목표로 하여 선거의 방법과 의회의 구성 방안, 헌법의 제정, 법치의 실현, 정부의 구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관계, 지방자치의 실현 문제 등을 그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고대 이래 중국의 정치체제에서 늘 문제가 되었던 권력의 집중(중앙집권)과 권력의 분산과 균형(지방분권)이라는 문제는 민권주의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상당히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신해혁명 이전 단계에서는 지방분권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임시대총통의 지위에 오른 이후 단계에 가서는 중앙집권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이러한 입장은 공화혁명을 배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위안스카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공화혁명 이후 위안스카이에 의한 혁명의 배반과 위안스카이 사후까지 계속된 군번정객들에 의한 선거와 의회의 파행을 경험한 이후에 가서 강조하게 된 스위스식의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문제 또한 광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경제적 부강을 목표로 하는 민생주의의 내용은 크게 보아서 자본주의의 병폐인 부의 편중과 자본가의 독점체제를 미연에 막기 위하여 계획경제의 요소를 적극 도입하는 식의 국가자본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부의 불평등 분배를 가져오는 결정적 요인인 토지 가격 상승에 따라 생기게 되는 불로소득, 즉 경제발전, 특히 간접자본의 투자에 의한 토지가격의 상승분을 국가가 적극 환수하는 방안인 이른바 ‘평균지권(平均地權)’ 정책과 대기업의 자본 독점을 막기 위하여 대규모 공공사업을 국가가 관장하는 이른바 ‘절제자본(節制資本)’이 민생주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아직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미미하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고 따라서 계급투쟁이 필요한 단계는 아니며 단지 생산력을 높이면서 한편으로 예상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국가가 나서서 미연에 막으면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민생주의가 다수 국민의 경제적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안이기 때문에 자신의 민생주의가 곧 (평등을 실현하는) 공산주의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국공합작의 추진과 더불어 이러한 민생주의의 내용에도 변화가 적지 않게 보이고 있었으니 특히 실제 경작을 담당하는 농민들이 토지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의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 토지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니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말년에 가서 민생주의가 실제로 공산주의에 접근하는 것으로 변화해 갔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결국 삼민주의는 청조 멸망 이후의 근대적 국민국가를 어떤 모양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 것인가를 광범위하게 다룬 것으로 이를테면 독립, 통일되고 민주적이며 부강한 국가를 세우는 구체적인 청사진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는 1905년 도쿄에서 만들어진 혁명단체인 중국혁명동맹회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 유학했던 조소앙(趙素昻)을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과 따이지타오(戴季陶)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유학생 간의 긴밀한 교류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한인들의 중국 망명과 중국에서 이루어진 혁명세력과의 교류는 공화혁명 곧 신해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인 1908년경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여했던 김규흥(金奎興)의 경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한인 지사들의 중국 망명과 중국 혁명세력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1911년 10월 신해혁명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의 성공 소식을 들은 직후 중국으로 망명해간 것으로 확인되는 신규식(申圭植), 김규식(金奎植) 등 한인 망명 지사들은 혁명의 중심지인 상하이, 난징(南京) 지역에서 중국혁명에 직접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명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중국혁명 지도자들과의 밀접한 교류를 가지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중국 혁명세력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한국임시정부와 중국혁명세력과의 교류 협력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1921년 9월에서 10월에 있었던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의 광저우 호법정부(廣州護法政府) 방문과 회담은 한국독립에 대한 지원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흔히 언급되어 왔다. 특히 신규식과의 회담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와 호법정부가 상호간에 외교적 승인을 하기로 했다는 점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 지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신규식의 광저우 방문 일정을 자세하게 추적한 연구에 의하면 당시 광저우의 비상국회(非常國會)에서 다룬 것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안이 아니라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이었고, 임시정부나 임시의정원에서도 호법정부 승인안을 처리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임시정부와 호법정부 사이의 승인은, 구두에 의한 ‘사실상의 승인’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런 한편으로 같은 시기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들과 밀접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당시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여운형(呂運亨)과의 긴밀한 교류관계를 볼 수 있으니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반제연대의 일환으로서 중국, 한국, 베트남, 인도의 혁명가들 사이에 추진되고 있었던 연대활동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운동가들과 중국 혁명세력 인사들과의 연대를 위한 단체의 결성도 나타나고 있었으니 1912년에 신규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나 1921년 상하이, 광저우, 창사(長沙) 등지에서 만들어졌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같은 조직이 이에 속한다. 이들 조직을 통하여 중국혁명가들의 한국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과 한국독립운동가들의 중국혁명 참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20세기 전반기 한중관계의 기본 맥락이라고 할 ‘한중호조’의 실천가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많은 도움을 준 가장 대표적인 중국의 정치지도자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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