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6년 상해(上海)로 망명, 신규식(申圭植)이 조직 운영하던 동제사(同濟社)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으며, 1917년 만주(滿洲) 안동현(安東縣)에서 망명객의 길 안내역을 맡아 활동했고, 영국상선(이륭양행 소속) 안동지사장 죠지 쇼우와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한인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김규식(金奎植)·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임정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에 분주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임정이 수립·선포되자 1919년 4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선출되고 외무부(外務部) 위원이 되었다.
또한 동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가 상해에서 창립되자 상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월 9일 의열단(義烈團)이 만주(滿洲) 길림(吉林) 파호문(巴虎門)에서 창립되자 후원자(총장)가 되고 기밀부·실행부로 구분하여 운영되는 조직의 기밀부 요직을 맡아 활약하였다.
1920년 2월에 북경(北京)으로 가서 2월에 의열단(義烈團)이 중국(中國)에서 폭탄을 매입하여 국내로 보낼 때 안동현(安東縣) 중국세관에 있는 영국인 보잉에게 임정외교차장으로서 신임장을 보내어 곽재기(郭在驥)와 이성우(李誠宇) 등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할 때 막후에서 지원하였다.
1921년 4월 19일에는 미국(美國)에 체재하고 있었던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 이 미국정부에 대해 우리나라를 위임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알려지자 이를 동지와 같이 크게 성토하였다.
동년 5월에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소위 창조파(創造派)의 일원으로서 김립(金立)·원세훈(元世勳)·신숙(申肅) 등과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를 북경(北京)에서 조직하고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8월에는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여 중앙정치위원 겸 7인 정치부의 한 사람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공산당회의에 왕삼덕(王三德)·안병찬(安秉瓚) 등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여 소련공산당 레닌을 면담하고 독립운동 지원자금 40만 루불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동년 9월에는 이르크츠크 재로한인공산자대회(在露韓人共産者大會)에 참가하였으며, 그곳에서 보리스 슈미야츠키를 만났고, 이르크츠크회의에서 의장단으로 사회를 맡았다.
1922년에는 북경에서 의사개업을 했던 한진산(韓震山)과 손잡고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대외업무를 수행하였다.
동년 1월 2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피압박인민대회(極東被壓迫人民大會)의 참가대표 52인 중 1인으로 선발되어 참석하고 김시현(金始顯) 등의 국내파괴 활동을 지원하고 협의하였다.
동년 12월에는 꼬르뷰로의 임원에 피선되었다.
1923년에 국내 및 국외의 지역대표로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를 구성할 때 노령(露領) 시베리아부 대표로서 상해(上海)에 왔으며, 회의 초안기초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후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조직을 발기하였다.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외교총장으로 있으면서 의열단(義烈團)의 이종암(李鍾岩) 등의 입국활동시 필요한 혁명선언서 신임장과 위임장을 교부하였다.
1926년 북경(北京)에서 잡지 ≪혁명≫을 김성숙(金星淑)과 함께 발간하였다. 동년 10월 28일에 북경(北京)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의 취지문을 발표하고 7인 집행위원 중 1인이 되었으며 대표 조성환(曺成煥)의 명을 받아 중국 남부지방에 특파되어 선전에 주력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제3기 간부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다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당원으로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피선되었다. 1928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독립운동 자금관계를 의논한 뒤 상해(上海)로 돌아와 김원봉(金元鳳)과 만나 의열단(義烈團) 고문이 되어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반입하는 일을 지휘했다.
1929년에는 상해(上海)에서 클럽활동을 지휘했으며, 1930년에는 북경(北京) 화북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39년 상해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1년 동안 국내 각 경찰서로 끌려다니며 각종 고문을 받았다.
1941년에 건강의 악화로 사경을 헤맸으며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서 휴양하였다.
1942년 국내를 탈출하여 만주·상해·홍콩을 경유하여 중경에 도착하였다. 동년 2월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개헌에 따라 주석 김구(金九), 부주석 김규식(金奎植)이 선출되었는데, 이때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3년 10월 30일에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서 인도공작원으로 파견되도록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에 신분보장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944년 4월에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5년 독립운동 좌우합작 대동단결을 위해 임정대표로서 연안에 파견되었다가 연안에서 광복을 맞이하여 중경 임정으로 돌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36·143·275·299·355·356·383·423·619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3권 209·279·469·54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5·9·143·144·447·463·480·61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43·364·37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8·143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7·9·43·218면
- 기려수필 247·284면
- 고등경찰요사 15·108·110·111·197·218·278면
- 벽옹김창숙일대기 19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36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3·410·411·535·574·604~609·634·635·638·688·690·768·772·80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7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52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1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93·137·165·255·256·282·283·394·663·734·735·737·743·748·753·755·760·767·76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별집 3권 292·293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6·42·16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