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형설은 1938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인천시 송림동 88개소 공원(지금의 선인중고등학교 자리, 일본 불교의 석불이 88개가 있던 곳)에 모여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친목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1941년 졸업할 때까지 연 2회의 비밀 집회를 통해 동지 규합에 대해 토의하였다.
1941년 3월 6일 졸업 후 1943년까지 3년간 충북 영동군 영동읍 괴산리 한성은행에 다니면서 읍내 거주 이기하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1943년 충북 영동에서 인천공립상업학교 동기생인 송재필(宋在弼, 당시 일본 명치대학 재학)과 안학순(安鶴淳, 당시 보성전문학교 재학)이 주도하는 학병 강제 모집 반대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43년 12월 8일(혹은 1944년 1월 10일) 영동경찰서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인천공립상업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42년 7월경, 송재필이 안학순을 만나 학병거부 및 기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동기생 정귀택이 학병거부를 종용하는 서신을 작성하여 송재필·안학순이 지명하는 학생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은 대전 거주 김정일(일본 명치대학 재학)이 충북 영동에 거주하는 경성제대 응용화학과 재학생 신모에게 서신을 전달하려다가 영동 기차 정거장에서 영동경찰서 경찰의 불심 검문에서 발각되었다. 이후 일제의 2개월 여에 걸친 조사 끝에 1943년 8월, 편지의 출처가 알려져 관련자 24명이 체포되었다.
김형설은 온갖 고문을 당하고 1944년 4월 25일자로 한성은행에서 면직되었다. 1944년 6월 4일, 대전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겨져 예심에 회부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1945년 4월 28일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가 1945년 7월에 재수감 통지서를 받은 상태에서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미추홀(仁川高等學校, 1973년) 제16호 86~94면
- 仁高九十年史(仁高九十年史編輯委員會, 1985) 189~19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