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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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5064
성명
한자 安在鴻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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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89 훈격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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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 5. 대한민국(大韓民國)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총무(總務)활약(活躍)하다 옥고(獄苦)를 겪었으며 조선일보(朝鮮日報) 주필(主筆)사장(社長)으로 재직(在職)하며 신간회(新幹會) 총무간사(總務幹事)활약(活躍)하는 등 항일활동(抗日活動)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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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경기 평택(平澤) 사람이다. 1912년 일본 동경(東京)에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朝鮮留學生)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조도전(早稻田) 대학에 재학중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주필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간회(新幹會)의 총무간사에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8년 12월 전남 광주(光州)에서 학생운동이 봉기되자 당시의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朝鮮民衆大會)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되었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 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48·49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3권 101-10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41·34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53-256·260·1015·1443·1444면
  • 조선일보(1937. 5. 9)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391·533·628·88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52면
  • 동아일보(1927. 12. 12, 1928. 5. 23, 5. 26, 8. 3)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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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안재홍 호 : 민세(民世), 필명 : 저산(樗山), 저음(樗陰), 규당(逵堂), 사암(竢庵), 응암(應庵) 경기 평택(平澤) 조선일보 필화 사건, 광주학생운동 보고를 위한 민중대회, 만주동포 구호 의연금 유용 사건, 난징 군관학교 학생사건
본문
1891년 12월 30일(11월 30일, 음력) 경기도 진위군(현 평택시) 고덕면(古德面) 두릉리(杜陵里, 지금도 ‘게루지’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아버지 윤섭(允燮)과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 洪氏) 사이에서 9남매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호는 민세(民世)이다. 필명으로 역사 연구 등에는 저산(樗山) ・ 저음(樗陰) ・ 규당(逵堂) ・ 사암(竢庵)을, 대종교(大倧敎) 관계에는 응암(應庵)을 주로 사용하였다. 6~7세 때부터 두릉리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수학하는 동안 ‘조선의 사마천(司馬遷)’이 되기를 다짐하였다. 1907년부터 부친의 권유에 따라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평택의 사립학교인 진흥의숙(振興義塾)을 거쳐서 상경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중학부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이상재(李商在) ・ 남궁억(南宮檍) 등의 민족지사를 만났다. 졸업반이던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9월 구국의 뜻을 품고 일본 유학의 길에 올라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1년 남짓 어학 준비를 끝냈다. 1911년 3 ・ 4월경 도쿄(東京)에서 이승만(李承晩)을 만났는데, 뒷날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1911년 무렵 ‘민중의 세상’이란 뜻의 아호‘민세(民世)’를 지었다. 1912년 여름 중국 정세를 관찰하기 위하여 상하이(上海) ・ 베이징(北京) ・ 선양(瀋陽) 등을 돌아다니던 중 비밀결사 동제사(同濟社)를 주도하고 있던 신규식(申圭植), 조소앙(趙素昻), 신채호(申采浩) 등을 만나 이 단체에 가입한뒤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해 10월 27일 신익희(申翼熙), 최한기(崔漢基), 서경묵(徐慶黙)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였다. 191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7월 귀국하였다. 1915년 5월부터 서울에 소재한 중앙학교 학감(學監)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 1915년 3월 조직)에 일반 계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민족자본을 축적 ・ 육성하여 민족경제의 자립을 꾀하려는 목적에서 조직되었다. 일제는 이 단체를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엮어 1917년 3월 간부와 계원을 체포하여 검찰에 송치하였다. 이때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지만 중앙학교에서 해직되었다. 이후 대종교(大倧敎)로 개종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6월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서울에서 비밀결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조직되었다. 7월경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참여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강령 ・ 규약을 작성하였고, 8월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6개 항의 「건의서」를 작성하여 총무인 자신의 명의로 직접 임시정부에 발송하였다. 이어 외교단을 배달청년단(倍達靑年團)으로 개명하여 전국조직으로 확대 개편하려던 중, 11월 말 대구에서 발각되어 경상북도 경무국(警務局) 제3부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결심 공판에서 이른바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첫 옥고를 치른 뒤, 1922년 6월 가출옥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이 쇠퇴한 1924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참여하여 토산(土産) 장려를 주장하였다. 이어 5월에는 『시대일보(時代日報)』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언론활동을 시작하였으나 7월 사내(社內) 분규로 퇴사하였다. 6월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시대일보사의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언론집회 압박탄핵회를 결성한 뒤 13명의 실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9월에는 『조선일보』(사장 이상재)의 주필 겸 이사로 입사하였다. 1925년 3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를 결성하는 12명의 창립회원(부장 이상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결성한 동지회(同志會)와 연관을 맺고 1925년 3월 국내에서 창립된 비밀결사였다. 이해 4월 국내 최초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全朝鮮記者大會)에서 부의장으로 피선되면서(회장 이상재) 언론계의 중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7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서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가 열리자, 이 회의를 한국에 유리하게 활용하려면 식민지 한국의 실지 사정을 조사 ・ 연구하는 조직체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에 9월 백남운(白南雲), 홍명희(洪命熹), 박찬희(朴讚熙) 등과 함께 ‘조선문제 인식의 과학화’를 위하여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의 18인의 발기인이자 7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이 주최한 모임에 권동진(權東鎭), 이종린(李鍾麟), 박동완(朴東完), 신석우(申錫雨) 등과 참여하여 민족협동전선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무렵 민립대학기성운동(民立大學期成運動)을 재개하는 대표자로 선정되었다. 9월 들어 자치운동을 추구하는 연정회(硏政會)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10월 김준연(金俊淵)과 함께 이 사실을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에 알려 연정회 재건 계획을 무산시켰다. 12월에 다시 자치운동이 등장하려 하자, 자치운동이 일제와 연락 ・ 호응하여 민족운동의 전선을 분열시키는 ‘관제적(官制的) 타협운동’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배격하는 논설을 집필하고 반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新幹會) 발기인대회에 참여하여 3개 항의 강령을 채택하였으며, 자치운동을 ‘타협운동’이라 비판하면서 신간회를 이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좌익전선’으로 규정하는 논설을 집필하였다. 2월 15일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여 조사연구부 총무간사로서 신간회운동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하면서 신간회를 지도하였다. 그해 9월 『조선일보』 주필로 발행인을 겸하였다. 12월 만주에서 중국 관헌들이 한국인 동포를 집단으로 축출하는 사태가 사방에서 일어나자, 신간회 본부는 이 사건을 중대한 민족문제로 보고 재만동포 옹호운동을 전개하였다. 12월 9일 전국 각 단체의 대표들과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1928년 두 차례의 필화로 옥고를 겪었다. 이관구(李寬求)가 집필한 1928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 사설의 「보석(保釋) 지연의 희생, 공산당 사건의 실례를 보고」를 발행한 책임으로 25일 편집인 백관수(白寬洙)와 함께 체포되어 31일 이른바 「신문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2월 3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가 4월의 1심 공판에서 금고(禁錮) 4월을 받고 항소하였다. 이 필화 사건은 신간회를 지원하는 안재홍과 『조선일보』를 신간회에서 떼어내려는 일제의 탄압 술책이었다. 보석 재판 중에도 『조선일보』를 통하여 신간회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일제의 중국침략정책을 비판하였다. 1928년 3월 신간회 중앙본부를 통하여 민족운동의 당면과 제로 6개 항목을 발표케 하고 이를 지회(支會)에 하달하면서, 『조선일보』의 사설 「실제운동의 당면과제-신간회는 무엇을 할까」(1928. 3. 27)에서 이 지침을 설명하였다. 그해 5월 9일자 『조선일보』 사설 「제남(濟南) 사건의 벽상관(壁上觀)-다나카 내각(田中內閣)의 대모험」을 집필하여 일제의 대륙 침략 야욕을 비난하고 다나카 수상의 침략 경력도 폭로하였다. 지난(濟南)은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성도(省都)였다. ‘지난 사건’이란 일본이 산둥을 침공함으로써 중국 ・ 일본 양군이 무력충돌한 사건을 가리켰다. 이 사설이 문제가 되어 『조선일보』 발행인에서 물러났고, 『조선일보』도 무기 정간을 당하였다. 이 때문에 5월 25일 항소 판결에서는 1심판결보다 4월이 추가된 금고 8월을 언도받았다. 또한 도주 염려를 이유로 보석도 취소되었다. 최종 판결에서 다시 상고가 기각되어 금고 8월이 확정되었다. 1929년 1월 만기 출옥한 뒤 조선일보사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논설 집필을 계속하였다. 3월부터 조선일보사가 제창하여 색의단발(色衣斷髮) ・ 건강증진 ・ 상식보급 ・ 소비절약 ・ 허례(虛禮)폐지를 권장하는 생활 개신(改新)운동을 지도하였다. 7월에는 역시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귀향(歸鄕)남녀학생 문자보급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운동은 농촌계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해방 뒤인 1948년의 신생활구국운동으로 이어졌다.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진상보고를 위하여 신간회가 12월에 실행한 민중대회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연내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0년 1월부터 기소유예 상태에 있으면서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관견(朝鮮上古史管見)」을 연재하였다. 이때 쓴 글들은 1937년부터 집필하고 8 ・ 15해방 후 상 ・ 하 두 권으로 간행된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1947 ・ 1948)의 기초가 되었다. 그해 7 ・ 8월 백두산을 올랐고,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1930년 12월 신간회 부산지회가 처음으로 해소(解消)를 결의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안에서 신간회 해소를 공론화하며 확산시켜 나갔다. 이에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 신간회를 해소하려는 사회주의들의 전술에 맞서 열띤 논전을 벌이며 신간회해소론을 비판하였으나 막지는 못하였다. 1931년 5월 16일 신간회 제2차 전체대회는 신간회를 ‘해소’한다고 가결함으로써 마지막 전체대회가 되어 버렸다. 1931년 5월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고, 7월에는 발행인을 겸하였다. 이해 8월 말경 중국이 수재를 크게 당해 재중(在中) 동포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자, 9월 중국수재동정회(中國水災同情會)를 발기하였다. 10월에는 동정회가 만주조난동포문제협의회(滿洲遭難同胞問題協議會)로 확대 개편되자, 조사 선전부 상무에 피선되었다. 1932년 1월, 신간회 해소를 반대하였던 서정희(徐廷熙), 이종린 등과 함께 신간회를 대체할 민족주의 단체로 민족단체통제협의회를 구성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3월 만주동포 구호의연금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기 시작하여 4월경 구속되자 감옥에서 조선일보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만주조난동포문제협의회는 조선일보사를 통해 재만동포 구제의연금을 모금하였는데, 당시 조선일보사는 경영난을 겪자 모금된 구제의연금을 일시 유용하였다. 이를 안 일제는 조선일보를 탄압하기 위해 횡령사건을 조사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횡령죄로 공판에 회부되었다가 보석으로 잠시 석방되었으나, 1933년 2월 금고 8월을 받아 수감된 후 11월 출옥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파시즘 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정치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민족해방을 위한 ‘차선(次善)’의 활동으로 “국사를 연찬(硏鑽)하여 민족정기를 불후에 남기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1934년 들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조선학’을 천명하면서 ‘조선문화운동’을 제창하였고, 정인보(鄭寅普)와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 ・ 간행하기 시작하여 1938년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하였다. 조선학의 목표를 ‘제삼신생적(第三新生的)’ 이념을 도출하는 데에 두고, “민족으로 세계에, 세계로 민족에, 교호交互되고 조합(調合)되는 민족적 국제주의-국제적 민족주의를 형성”하자는 이른바 민세주의(民世主義)를 제창하였다. 민세주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세계주의)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이때 조선학은 민족운동의 새로운 이념을 ‘조선적(朝鮮的)’ 영역에서 도출하고, 이로써 세계사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전망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8 ・ 15해방 후 제창한 신민족주의 이념의 기반이 되었다. 1934년 이후에도 중국 ・ 일본 등 동아시아를 비롯해 유럽을 포함하여 전 세계의 동향에 대한 정세 분석을 쉬지않았으며, 1935년 3월 『중국의 금일(今日)과 극동(極東)의 장래』를 출간하였다. 1936년 6월 난징군관학교학생사건(南京軍官學校學生事件)으로 지명수배를 받고 있던 정세호(鄭世鎬), 김재형(金在瀅)에게 국내정세에 대한 동향과 운동자금 ・ 운동방침을 요구받은 사실로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다. 1년 여에 걸친 예심 끝에 1937년 10월 징역 2년을 받았다. 이후 보석되어 고향인 두릉리에서 한국 상고사와 관련한 저술을 시작하여 「기자조선고(箕子朝鮮考)」 ・ 「부여조선고(夫餘朝鮮考)」 등 7편을 탈고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자, 군관학교학생사건의 보석이 취소되어 다시 구금되어 3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출옥 후 군관학교학생사건의 최종 판결에서 2년형이 확정되자, 다시 수감되어 1940년 2월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1943년 3월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Saipan) 섬을 점령하자 일제가 곧 패망하리라 확신하고, 그해 7월 ‘해방 이후’의 사태에 대비하여 민족주의자들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해 8월에서 12월 사이 여운형(呂運亨)에게서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참여하지 않았다. 12월 상순 일제의 관원과 시국수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민족자주’ ・ ‘호양협력(互讓協力)’ ・ ‘마찰방지’의 3원칙을 제시하고, 여운형과 함께 민족대회 소집운동을 추진하였다. 1945년 5월 일제 측에 다시 민족대회 소집안을 제시하였다. 민족대회 소집은 일제가 허용하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으나, 표면에서 ‘해방 이후’를 준비한 건국운동으로, 건국동맹과 함께 8 ・ 15해방 당일 신속하게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건국사업을 추진하는 기반이 되었다. 8 ・ 15해방 당일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좌편향하자 9월 10일 탈퇴하였다. 이어 9월 24일 신민족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삼는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이때 국민당의 이념 정립을 위하여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탈고하였다. 신민족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무산계급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본계급독재)를 모두 극복한 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삼아 ‘초계급적 통합민족국가’를 국가건설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영립보강(迎立補强)을 주장하면서, 10월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에 참여하였고, 12월 말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어 반탁운동의 선두에 섰다. 1946년 2월 우익 정치세력의 결집체였던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의 대표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이해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여운형 ・ 김규식(金奎植)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자, 7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면서 좌우합작 교섭의 우측대표로 선임되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다. 12월 좌우합작운동의 부산물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관선의원(官選議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7년 2월 남조선과도정부(南朝鮮過渡政府)의 민정장관(民政長官)에 취임하여 1948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1950년 5 ・ 30 선거 때 고향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6 ・ 25전쟁 기간 중인 1950년 9월 납북되었고, 1965년 3월 1일 평양 시내의 한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저술로는 『백두산등척기』 ・ 『중국의 금일과 극동의 장래』 ・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 『조선상고사감』 상 ・ 하, 『한민족(韓民族)의 기본 진로』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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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3년 대구지방법원 1920-06-2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위반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 100일 본형에 산입 대구복심법원 1920-12-27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신문지법위반 금고 8월 경성복심법원 1928-05-25 국가기록원
4 판결문 신문지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8-07-26 국가기록원
5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보안법위반 징역 2년 원심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38-05-04 국가기록원
6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7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8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치안유지법위반 징역2년 미결150일 경성복심법원 1938-05-04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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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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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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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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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가 민세 안재홍선생 생가 경기도 평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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