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285
성명
한자 朱家驊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77 훈격 대통령장
1940년 중국(中國)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을 지원하고 1945년까지 물질적 원조를 함.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중국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개석(蔣介石)에게 건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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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주쟈화(朱家驊)는 1940년 초 김구와 협력하여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창설 직후 중국 군사위원회의 인준 없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는 한국광복군의 군사 조직 개편과 징모분처(徵募分處) 설치 등 제반 활동에 제약을 가했다. 1940년 말 중국군사위원회는 각지의 군사장관들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엄격히 단속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주쟈화를 창구로 한국광복군 승인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주쟈화는 장제스와 중국군사위원회 판공청(辦公廳)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의 추인을 건의하고 함께 항일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특히 장제스에게 “김구의 말을 살펴보면 실정(實情)에 해당합니다. 과연 한적(韓籍) 사병의 반정(反正)을 책동한다면 직접 우리나라의 항전에 유리할 것”이라고 보고하여, 중국 국민당 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승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구 역시 주쟈화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여 “선생의 가르침과 도움으로 한국광복군 문제가 일단락 되었다”면서 감사의 뜻을 전한 바 있다. 이후에도 한국광복군의 편제와 운용에 관하여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울러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 당시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측의 입장을 중국 고위층에 전하고 이를 다시 김구에게 전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2년 6월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장제스에게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째, 항전 개시가 5년이 지난 시점에 아시아 문제만큼은 중국 측의 의견을 중시할 것이라는 점

둘째, 소련이 일본과 중립협정을 맺었지만 미국과 영국의 원조가 시급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으리라는 점

셋째, 향후 소련이 한인 부대를 이용하여 한국 소비에트 정부를 건설할 가능성이 큰 만큼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

국제 관계상 중국이 서둘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주쟈화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대일 항전의 전선을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10권 4면, 5~6, 19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8) 22권 93~94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8) 25권 98~100면
  • 신한민보(新韓民報)(1942. 10. 22, 1943. 3. 11)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주자화(주가화) 자 : 류선(騮先)·상린(湘麐)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싱현(吳興縣) -
본문
1893년 5월 30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싱현(吳興縣) 야오지아시안(姚家垷)의 상인 겸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류선(騮先) · 상린(湘麐)이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어 형 주시양성(朱祥生)의 부양으로 성장하였다. 주시양성은 생사(生絲) 공장을 경영했고, 훗날 창징장(張靜江)의 양절염무공사(兩浙鹽務公司)에서 장방(賬房)으로 회계를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창징장을 알게 되었다. 6살부터 서당학습을 시작하여 15살 난순공학(南潯公學)에 진학하였고, 1908년 가을 상하이(上海) 통지독일어의학교(同濟德文醫學校, 현재 동제대학)에 입학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중국 감사단(敢死團)에 참가하여 주한(駐漢)대표를 맡았고, 한커우(漢口)의 전투지 및 부상병 의원에서 3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통지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 초 베를린공과대학으로 자비유학을 떠나 지질학을 전공하던 중 창징장의 지원을 받았다. 1917년 초, 귀국하여 베이징(北京)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다가 1년 후,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도움으로 교육부의 국비유학생이 되어 스위스에서 지질학을 연구하였다. 1920년 독일로 옮겨 1922년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24년 귀국하여 베이징대학 지질학과 교수 겸 독일어 주임을 맡았다. 이때 베이징대학 학생들의 5·30운동 참여를 적극 지지하고, 국민당의 취화호동파(翠花胡同派)에 참가하여 베이양정부의 지명수배를 받았다. 이 때문에 베이징을 떠나 잠시 고향으로 피신하였다. 1926년 저장에 온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 저우쥐에(周覺)의 권유로 다이지타오(戴季陶)가 국민혁명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광저우(廣州)로 떠나자 동행하였다. 얼마 후 광둥(廣東)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해 10월 광둥국민정부가 광둥대학을 중산(中山)대학으로 개칭하고 교장제를 폐지하면서 다이지타오 · 구멍위(顧孟餘) · 쉬치엔(徐謙) · 딩웨이펀(丁惟汾)과 함께 교무위원에 위촉되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학교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교무위원장을 대리하였다. 1927년 4월 국민당의 청당(淸黨)으로 광둥성정부가 개조되었고, 다이지타오의 추천을 받아 정치무대에 나섰다. 이후 광둥성 정부위원 겸 민정청장, 광저우정치분회 위원, 중산대학 교무 등을 역임하였고, 양광(兩廣)지질조사소를 직접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다. 그해 8월 광둥성 교육청장 겸 중산대학 부교장을 맡았고, 겨울에 저장으로 돌아와 창징장 휘하에서 저장성 정부위원 겸 민정청장이 되었다. 저장에서 큰 치적을 쌓던 중 1929년 3월,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주석단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정치회의위원으로 선출되어 국민당의 핵심인물로 부상하였다. 저장에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져 1930년 국민당 저장성당부 전성대표대회 선거에서 부하와 측근들이 성당부위원 후보자 명단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자 CC계와 권력쟁탈을 일으켰고, 천궈푸(陳果夫)에게 배척당하였다. 창징장과도 성당부위원 후보자 인선문제로 분쟁을 일으켜 다이지타오가 중재했지만 그해 9월 이직되었다. 이때 다이지타오로부터 중산대학 교장직을 넘겨받았고, 11월에는 난징(南京)의 중앙(中央)대학 교장 장나이얀(張乃燕)이 사직하자 다이지타오의 지지에 힘입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31년 봄, 중영경관동사회(中英庚款董事會, 1943년 중영문교기금동사회로 개칭)의 이사장을 겸임하였고, 대학과 고등학교의 군사훈련방안을 제출하여 중앙정치회의를 거쳐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1931년 말, 국민정부 교육부장으로 중소학과정표준, 소학법, 중학법 등을 제정하고 중앙도서관, 박물관, 편역관 등을 창립하였다. 아울러 대학의 정치훈련 강화방안을 제출하였다. 1932년 11월 교통부장, 이듬해 12월 중앙정치위원회 대비서장을 역임하였고, 1936년 봄, 중앙연구원 총간사로 초빙되었다가 1940년 3월 차이위안페이의 사후 몇년 동안 대리원장을 겸임하였다. 1936년 겨울, 저장성정부 주석 겸 민정청장으로 취임했으나 7·7사변에 미온적으로 대응하여 1937년 12월, 성 주석에서 해임되었다. 국민정부가 우한(武漢)으로 옮긴 후 1938년 3월 군사위원회 참사실 주임, 4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장 겸 당무위원회 주임위원, 중앙조사통계국 국장 등을 겸임하였다. 그해 7월 삼민주의청년단이 성립되어 상무간사와 중앙단부의 서기장을 차례로 역임했으며, 중앙훈련단 당정훈련반 제1~3기 활동을 관장하였다. 1939년 12월 국민당 중앙의 조직부장을 맡아 국민당 당무를 주관했는데 각 대학마다 당부를 설립하여 지식인의 입당을 적극 추진하였고, 중통 국장을 겸직하면서 특무조직을 운영하였다. 조직부장을 4년 반 동안이나 맡으며 천궈푸 · 천리푸(陳立夫)의 세력과 맞설 수 있게 되어 신CC계라 불렀다. 1944년 5월 조직부장에서 물러나 11월 행정원 교육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 3월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제6기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어 천궈푸 · 천리푸 형제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1946년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환도하면서 전시교육의 복원작업을 주도하였다. 1948년 겨울에는 고궁중앙박물관, 중앙연구원, 베이징도서관의 문물서적을 타이완(臺灣)으로 옮겼다. 그해 12월 행정원 정무위원을 거쳐, 1949년 여름 행정원 부원장을 맡아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타이완에서는 총통부 자정(資政)을 역임하였고, 1963년 1월 3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중국국민당 지도자 중 한국독립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해준 인물이다. 젊은 학생시절부터 한국의 망국에 대해 많은 동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독립운동 인사와의 직접적 접촉은 1926년 여름, 광저우 중산대학의 주임 겸 교무위원을 담당한 시기로 보인다. 1924년 국민당 개조 이후 쑨원(孫文)은 아시아민족해방운동의 지원정책을 발표하였고, 이를 계기로 광저우의 중산대학과 황푸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이 대거 모여 들었다. 또한 중산대학의 교장을 지낸 조우루(鄒魯)와 다이지타오가 한국독립운동을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학교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쳤고, 재학 중인 한인청년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신기언(申基彥) · 이광제(李光濟) · 김성숙(金星淑)은 모두 중산대학의 제자들이었다. 중국 내에서 임시정부는 중국당국의 협조와 양해를 얻는 일이 급선무로, 조직을 유지·운영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과 교섭하는 주요통로는 국민당이었다.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국민당 조직부장 천궈푸와 김구(金九) 사이에 연락통로가 개설된 것이 그 계기였다. 이후 임시정부가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중국과 교섭하는 창구는 국민당이었고, 담당부서는 조직부였다. 따라서 국민당의 조직부장에 임명된 사람이 한국 업무를 맡게 되었기 때문에 담당자는 변화가 있었다. 1938년 10월 국민당정부가 충칭으로 옮긴 후 임시정부와 교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해 12월 25일 장제스(蔣介石) 군사위원회 위원장이 “철저한 항일전의 수행”을 선언하면서 국내의 모든 당파는 물론 아시아 피압박민족과의 연대도 적극 모색되었다. 이때에 천궈푸 대신 국민당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어, 1944년 5월 우티에청(吳鐵城)이 조직부장을 맡을 때까지 한국담당 책임을 맡았다. 이외에 쉬언청(徐恩曾) · 리차오잉(李超英) · 강저(康澤) 등이 한국담당 실무자들이었다. 또한 1942년 7월 국민당 상무위원회는 다이지타오 · 허잉친(何應欽) · 왕충후이(王寵惠) · 천궈푸 · 우티에청(吳鐵城) · 왕스제(王世傑)와 함께 총 7명으로 전문소위원회를 조직하고, 여기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전체적인 일을 처리하도록 결정하였다. 중국의 한국담당부서와 책임자가 정해지면서, 1940년대 중국과의 외교활동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방법은 두 단계로 우선 임시정부가 국민당 조직부장과 접촉하고, 조직부장이 이를 중국의 당·정·군 책임자에게 보고하는 형식이었다. 중국 측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은 대개 이러한 경로로 이루어졌고 그 내용은 다양하였다. 그중에서도 광복군 창설과 승인문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재정지원,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등이 중요한 현안들이었다. 1938년 군사위원회 참사실 주임과 중통 국장을 겸임하면서 한국독립운동가, 특히 임정인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중통의 임무는 일본 적정(敵情)을 수집하는 것으로 대일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한국독립운동조직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그동안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해 온 샤오정(蕭錚)이 1938년 11월 4일 한국국민당 지도자 김구 등을 소개시켜줬다. 이듬해 4월 1일 중국국민당 비서장으로 김구 · 유동열 · 김두봉 · 윤기섭 · 김원봉 · 송병조 · 박찬익 · 유자명 · 박건웅 · 한일래 · 김학무 · 신익희 · 신영삼 · 이광제 · 신기언 등 한국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과 만나 통합문제를 거론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산대학 출신 이광제가 국민당 비서처에 근무하면서 한국독립운동 인사들과의 접촉 업무를 도와주었다. 1년 가까이 계속된 통합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한국독립운동 내의 각파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깊어졌다. 그 결과 “한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성립 이래, 한민족의 독립불굴정신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이를 확실히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후 김구가 이끈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과 관련하여 국민당중앙 조직부장 겸 중통 국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적극 지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용대는 안정적인 활동여건을 갖춘 반면 한국독립당은 매우 열악하였다. 이에 김구가 “광복군을 편성하여 대일항전을 수행하고, 일본군에 있는 한인사병들을 빼내면 적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서 광복군 창설이 중국의 항일전에 유익하다는 논리로 추진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문제는 쉬언청을 통해 그에게 전해져 1940년 3월 2일 장제스에게 보고되었고, 4월 21일 실시 명령이 떨어졌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지만 중국 군사위원회가 이를 예속시키려고 인준하지 않았다. 특히 군사위원회 판공청 군사처장 호우청(侯成)이 조선의용대를 감싸며 한국독립진영을 두 개의 시스템으로 키우려고 하였다. 한국담당자로서 광복군 인준을 위해 1940년 11월, 중국 정부와 군에 대해 이미 창설된 광복군을 인준하여 항전에 투입시키자고 요청하였다. 또한 1941년 7월 3일, 허잉친 총장에게 협조편지를 보냈고, 군사위원회 직원들에게도 원대한 시야를 가지고 하찮고 사소한 일들은 따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한국광복군 승인문제는 1942년 9월 12일, 장제스에게 직접 보고되었고, 임시정부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중국을 상대로 한 임시정부의 또 다른 외교활동은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에게 보낸 임시정부의 공함 및 서신 중 상당수는 재정문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필요할 때마다 지원을 요청했으나 광복군을 창설한 후 초모활동을 통해 많은 한인청년들이 광복군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들의 숙식문제가 절박해졌다. 김구가 보낸 한 서신은 최근 중국 각지에서 한인청년 5백여 명이 광복군을 찾아왔다고 하면서 이들의 구제비로 20만원을 요청하였다. 장제스에게 그대로 보고되었고 10만원을 군정부에 지원하라는 장제스의 명령을 받아, 김구에게 이런 내용을 공함으로 보내왔다. 1941년 12월부터 국민당 정부는 정기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매달 6만원을 지급했는데 1943년 5월까지 이러한 규모의 재정적 지원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충칭에는 임시정부 이외에도 여러 독립운동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인구급증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 6만원을 가지고는 생활조차 어려워 임시정부는 새로운 방도를 찾아야 하였다. 임시정부가 찾은 새로운 방도는 중국에 신용차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1942년 6월 중국정부가 솔선하여 임시정부에 실제적인 원조를 한다면 동맹국들도 뒤를 따를 것이라면서 중국정부가 미화 50만 달러의 신용차관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국민정부 재정부장 쿵샹시(孔祥熙)에게 적극 검토해주도록 요청하였으나 중국의 열악한 외화사정을 이유로 부정적인 답변을 보내왔고, 그 결과를 서신으로 김구에게 전하였다. 신용차관을 얻지 못한 김구는 6만원의 지원금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며, 그를 통해 보조비의 증액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대중국 외교활동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942년 5월 23일, 장제스에게 7월 7일을 기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올렸고, 6월 11일에는 10월 10일 쌍십절에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문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장제스와의 직접 면담이 추진되기도 했는데 임시정부가 조직부장에게 요청하면 이를 장제스에게 건의하여 실현시켰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의의 개최 소식을 듣고, 1943년 7월 26일 장제스와 임시정부 요인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군무부장 김원봉,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이 군사위원회 접견실에서 장제스와 만났다. 김구는 장제스에게 미국과 영국이 전후 한국문제에 대해 국제공동관리 방식을 주장하고 있는데, 중국이 먼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여 관철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제스와의 면담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이루어졌다. 1944년 5월부터 우티에청이 조직부장을 맡게 되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과 개인적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고, 스스로 한국독립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교육부장이나 행정원 정무위원을 담당할 때도 개인 신분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도와주었으며, 194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물들을 한국으로 귀국시켰다. 당시 한국광복군 간부였던 김학규(金學奎)과 왕준성(王俊誠)은 “주 부장은 중국 정계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혁명을 특별히 도와주는 분이다. 본 광복군은 작년 장위원장의 허락으로 성립했고, 올해 5월 28일 다시 장위원장의 허가에 의해 성립했는데 모두 주 부장의 역량이다. 그러므로 우리 일반 한국동지들은 전방에 있거나 한국 국내에 있거나, 주부장의 위대한 동정심이 존경스럽다. 우리가 오늘 찾아뵈는 뜻은 전방 동지의 성의를 대표하여 주 부장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이렇듯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민정부간 재정, 군사, 외교문제 등의 다방면에 걸쳐 가교역할을 적극 실천하였다. 한편 티베트, 몽고와 같은 변방의 민족문제를 담당하는 위원회의 의장이며, 또 독일유학 경험으로 인하여 파시스트적 경향이 농후하였다. 당시 중국 파시즘운동의 중심인물이었음으로 한국문제를 중화주의적 시각에서 다루어 변방문제의 하나로 취급하였다. 또한 삼민주의를 한국민족운동의 기본 정치사상으로 공식화 할 것을 요구하는 등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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