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성익현 의진 (成益鉉義陣) 에 군자금 800냥을 지원하였고 1907년 신민회원 (新民會員) 으로서 향리 (鄕里) 인 사동 (沙銅) 에 대흥학교 (大興學校) 를 설립하여 인재 (人財) 를 양성하였으며 1912년 만주 (滿洲) 로 건너가 유하현 (柳河縣) 삼원포 (三源浦) 의 신흥학교 (新興學校) 에 재정 지원 (財政支援) 을 하고 1913년 노령 (露領) 대한국민의회 (大韓國民議會) 에 참여하여 1919. 9 - 10월 주진수 (朱鎭洙) 등과 함께 만주 (滿洲) 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통한 항일의식 고취 와 미국 (美國) 으로부터 군자금 3백만불 차관문제를 논의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국내 (國內) 로 파견되어 군자금을 모집하고 1927년 신간회 울진지부장 (新幹會蔚珍支部長) 에 선임되는 등 활동 사실 (活動事實) 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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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늑결 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향리에 주둔하고 있던 성익현(成益鉉) 의진(義陣)에 군자금 8백 냥을 지원하면서 의병활동을 격려하였다.
그 후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향리인 사동(沙銅)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며, 1913년에는 노령(露領)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가하였던 그는 1919년 9월 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1925년 정의부(正義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이 상해(上海)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길림(吉林)에서 상해로 갈 때, 동행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성립되자 신간회 울산지회(蔚山支會) 회장에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울진의 얼(울진군, 1982) 46·47면
- 울진군지(울진군지편찬위원회, 1984) 349면
- 울진문화(울진문화원, 1986) 제2호 55∼5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449면
- 국오선생실록(1977) 1∼5면
-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신용하) 45·46면
-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 선생(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1976, 필사본)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3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