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758
성명
한자 李丙禧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6 훈격 애족장
1932년 부친 이경식(李京植)이 장진홍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가족들이 모두 만주로 이주하려고 하였으나 조부의 연로 등으로 부친만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학업을 중단하고 1933. 5월 경부터 서울에서 종연방직(鍾淵紡織)주식회사의 여공(女工)으로 근무하면서 1936년 김희성(金熙星), 박인선(朴仁善) 등과 회합하여 여성동지를 획득하고 공장노동운동을 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2년 4월의 옥고를 치른 후 북경으로 망명하여 이육사(李陸史) 및 의열단원 등의 연락활동을 지원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 피체되어 이육사와 북경감옥에 함께 수감되었다가 1944. 1월 석방된 후 계속 복역 중이던 이육사가 옥사하자 시신과 유품을 정리하여 국내유족에게 인도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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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36년 서울 종연방적주식회사(鍾淵紡績株式會社)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고, 1938년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이육사(李陸史) 등 의열단원(義烈團員)의 연락활동을 지원하였다. 장진홍 의사의 대구 조선은행 폭탄투척의거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부친 이경식(李京植)의 민족의식을 이어받은 그는 동덕여자보통학교(同德女子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3년 5월 경성 신설동(新設洞) 종연방적주식회사의 여공으로 근무하며 항일활동에 나섰다. 1936년 그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김희성(金熙星)·박인선(朴仁善) 등과 여성동지들을 규합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2년 4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9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는 1939년 4월 출옥하자, 1940년 북경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고, 동지 박시목(朴時穆)·박봉필(朴鳳弼)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그러던 1943년 그는 국내에서 북경으로 망명 온 이육사(李陸史)와 독립운동을 협의하던 중, 이해 9월 일경에 붙잡혀 북경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잠시 국내로 잠입하였던 이육사도 붙잡혀 북경감옥에 함께 구금되고 말았다. 그는 1944년 1월 11일 결혼을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나, 이육사는 같은 해 1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이육사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품을 정리하여 국내의 유족에게 전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6輯 129面
  • 除籍謄本(李陸史 屍身의 北京監獄에서 引受한 內容)
  • 判決文(1939. 4. 14. 京城覆審法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병희 - 서울 -
본문
1918년 1월 14일 서울 종로구(鐘路區) 봉익동(鳳翼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조부(祖父)는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환런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한 뒤 독립군 양성을 비롯한 교육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동하(李東廈)이다. 부친(父親) 역시 대구에서 장진홍(張鎭弘)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를 일으킨 이경식(李京植)이다.경성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부와 부친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1933년 5월에 종연방직주식회사(種淵紡織株式會社)의 여공으로 위장 취업하였다. 종연방직은 일본 미쓰이(三井) 그룹의 계열사로, 경성에 제사공장을 세우면서 조선에 진출한 일본 거대자본이 운영하는 기업이었다. 이 공장은 여성노동자들의 비율이 높았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고통 받았다.종연방직주식회사의 여공인 이효정(李孝貞)·변홍대(卞洪大)와 교류하면서 일본 자본의 폭압으로부터 고통받는 여성들을 돕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35년 9월 여성 노동자 500여 명을 설득하여 노동 조직을 결성하였고, 회사 측에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본 자본을 비호하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이 경찰에 대거 체포되었다. 이때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36년에 동대문경찰서에 붙잡혔고,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1939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194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박시목(朴時穆)·박봉필(朴鳳弼)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열단 활동을 통해 만난 이육사(李陸史)와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협의하던 중 이들의 활동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 1943년 9월 붙잡혀 베이징감옥에 다시 갇혔다. 이육사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붙잡혔고, 베이징감옥에 함께 갇히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육사는 “너는 목숨을 건져 더 큰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며, 위장결혼을 통해 출옥할 수 있는 방법을 권유하였다. 이육사의 부탁을 수락하여 1944년 1월 11일 선을 통해 만난 필부(匹夫)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이육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유품과 유해를 수습하여 국내로 가져와 유족에게 전달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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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영리유괴, 사기는 면소 경성지방법원 1938-05-2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1년, 3년간 집행유예 경성지방법원 1939-04-14 국가기록원
3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징역1년(3년 집유) 경성지방법원 1939-04-14 국사편찬위원회
4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1년 경성지방법원 1939-04-14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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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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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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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의열기념관 경상남도 밀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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