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평북(平北) 사람이다.
1920년대 만주독립군 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설립한 화흥학교(華興學校)를 졸업하고 조선혁명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대 중국 관내(關內)로 넘어가 의열단(義烈團)과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통신특파원(通信特派員)으로 활약하였다.
김병일은 1926년 정의부가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세운 화흥중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으며 독립군의 기초를 다져갔다. 1920년대 중반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만주에서 정의부 주도로 삼부(三府) 통합운동이 전개되어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이 성립될 때, 그는 정의부의 일원으로 1930년 국민부(國民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 가입하여 독립군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으로 인하여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자 조선혁명당은 유동열(柳東說), 최동오(崔東旿) 등을 중국 관내로 파견하여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 이무렵 중국 관내로 근거지를 옮겨 남경에 있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당시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의열단은 일제의 만주침공이 일어나자 한중대일공동전선을 모색하면서 북경에서 남경(南京)으로 본거지를 이전한 상태였다. 그리고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를 설립하여 1935년까지 청년투사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교하여 정치·군사훈련을 받은 뒤, 의열단이 중심이 된 민족혁명당의 통신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35년 11월 병을 얻어 남경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思想情勢視察報告集(社會問題資料硏究會編) 第2輯 258·262·321·322·379面
- 思想情勢視察報告集(社會問題資料硏究會編) 第3輯 27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