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30
성명
한자 金元範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8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3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06년 3월 광주(光州)교외 무등산(無等山)에서 김원국(金元局)거의(擧義)하여 의병(義兵) 300을 규합코 선봉장으로 활동 일병과 수차 교전.

2. 1907년 12월 김태원 부대(金泰元部隊)와 합세하여 장성(長城)에서 교전 의병 300을 영솔하고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교전 일병 40여를 사살.

3. 1908년 1월 호남의병대장(湖南義兵大將) 조경환(曺京煥)과 합세 김원국(金元局)은 선봉장에 김원범(金元範)도포장(都砲將)에 임명되어 일길전(日吉田)부대와 격전 길전(吉田)사살하고 함평 오산(咸平鰲山)을 근거지로 하여 항전하다(김원국 조사서(金元局調査書))

4. 1909년 1월 조대장(曺大將)이 전사하자 전해산(全海山)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고 전해산(全海山)대장(大將)에 추대되고 김원범(金元範)중군장(中軍將)에 추대됨. 광주(光州), 나주(羅州), 담양(潭陽),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동하다(해산(海山), 창의록(倡義錄))

5. 1909년 9월 2일 무등산(無等山)에서 교전중 체포되어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에서 취조 중 설단을 끊고 자결하다(폭도토벌지(暴徒討伐誌) 49호)(호남절의사(湖南節義史) p.469)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김원범은 광주(光州) 사람으로서 1886년 1월 9일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當府面 北村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거의하였던 13살 연상의 친형인 김원국(金元國)과 함께 1906년 광주 교외 무등산(無等山)에서 거의하여 의병 삼백여 명을 규합하여 선봉장이 되어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07년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과 김 준(金準)이 거의하자 김 준의 휘하에 들어가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는데, 특히 의병 3백여 명을 이끌고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와 교전하여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봄 성재와 김 준 등이 순국하고 김 준 휘하의 오성술·조경환·전해산 등 부장들이 각기 의병장을 칭하게 되자 처음에 전해산(全海山) 의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경환(曺京煥·敬煥)의 휘하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피신 중이던 형 원국도 광주군 선암시장(仙岩市場)에서 조경환을 상봉한 후 동생이 경환의 휘하에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선봉장이 되고, 원범은 도포장(都砲將)이 되었다.

이 해에 원범은 창평 무동촌(昌平 舞童村)·장성 낭월산(郎月山)·영광 토산(靈光 土山)·함평 오산(咸平 鰲山) 등지에서 다시 적과 교전하였다.

특히 이즈음 형 원국은 광주 등지에서 의병토벌전의 주역이던 소위 삼국대장(三國大將)이라고 칭해지던 요시다(吉田)를 광주 교외에서 교전 중 사살하였는데 이 전투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9월 영광군 황량면(黃良面)에 살던 일헌병의 밀정 변영서(邊永瑞)를 부하 20명과 함께 함평군 식지면 군평(群坪)에서 붙잡아 총살하였다. 이 일은 전해산의 명에 의한 것으로서 당시 호남의진의 각 의병장간에 유기적 작전계획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1월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다시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고 해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중군장을 맡았다.

그후 광주·나주·담양·장성 등지에서 계속 원국과 함께 활약하였다.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無等山)에서 일병과 교전 중 마침내 체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1909년 9월 2일 스스로 혀를 끊어 23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형 원국과 똑같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대사전 276·277면
  • 호남절의사 4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2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914·91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0면
  • 폭도토벌지 49호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376·64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원범 김원범(金元凡)·김원범(金源凡) 전라남도 광주(光州) -
본문
1886년 1월 9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당부면(當府面) 북촌리(北村里)에서 출생하였다.13살 연상의 친형 김원국(金元國)과 함께 의병 300여 명을 규합하여 1906년 3월 광주 교외 무등산(無等山)에서 거의하였다. 1907년 12월 김준(金準) 의병부대의 휘하에 들어가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1908년 봄 호남회맹소의 의병대장 기삼연(奇參衍)이 사망하고, 이어서 김준(金準)이 사망하자, 휘하의 오성술·조경환·전해산 등 부장들이 각기 의병장을 칭하면서 독립하였다. 그 해 (음)7월 전해산(全海山) 의병부대에 들어가 중군장으로 활약하다가 다시 조경환((曺京煥)·(敬煥))의 휘하에 소속되어 도포장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피신 중이던 형 원국도 광주군 선암시장(仙岩市場)에서 조경환을 상봉한 후 동생이 조경환 의병부대에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경환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어 형제가 함께 활동하였다. 이해 창평(昌平) 무동촌(舞童村), 장성 낭월산(浪月山), 영광(靈光) 토산(土山), 함평(咸平) 오산(鰲山) 등지에서 일본군경과 교전하였다.1908년 9월 의병 20명과 함께 영광군 황량면(黃良面)에 살던 일제 헌병의 밀정 변영서(邊永瑞)를 함평군 식지면 군평(群坪)에서 붙잡아 총살하였다. 이 일은 전해산의 명에 의한 것이다. 당시 조경환 의병진과 전해산 의병진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합동작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1909년 1월 의병장 조경환이 사망하자 다시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고 전해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을 맡았다. 그 후 광주·나주·담양·장성 등지에서 형 원국과 함께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에서 일본군과 전투 끝에 붙잡혀 광주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그 해 9월 2일 스스로 혀를 끊어 자결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원범(관리번호:930)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