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차희식(車喜植)·차병한(車炳漢)·차인범(車仁範) 등의 동지와 함께 화성군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4월 3일 자기 동네 주곡리(珠谷里) 광장에 갔다가, 차희식으로부터 만세시위운동 계획을 전해듣고 적극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날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던 차희식 등은 이미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도 모두 몽둥이를 가지고 장안면 사무소로 모일 것을 연락하고,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연락을 받은 그는 석포리(石浦里)에 살고 있던 이영쇠(李永釗)에게 이 계획을 전하고 즉시 장안면 사무소로 달려갔다. 당시 면사무소에서는 면장이 200여 명의 군중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역설하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자 그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어서 그는 차인범 등의 동지와 함께 2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달려가 면사무소 건물과 집기·공문서를 부수었다. 다시 군중을 인솔하여 같은 면내인 화수리(花樹里)에 있는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투석하고 불을 질렀다. 이 때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이 총을 쏘면서 도망치자 차희식·차인범·이순모(李順模)·장제덕(張濟德) 등의 동지와 함께 추격하여 붙잡아 격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체포되어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24년 12월 7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60-1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48-37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