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1년
3.
4. 1941년 많은
- 출옥(出獄) :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석방되어 나옴.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평북 선천(宣川)의 신성(信聖)중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105인사건으로 일경에 붙잡혔으나 탈주하여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 북경대학 재학 중 이용설(李容卨)·문승찬(文承贊) 등과 함께 고려기독교청년회(高麗基督敎靑年會)를 조직하여 한국인 유학생의 어학교육과 숙식을 주선하는 한편 신채호(申采浩)·한진산(韓震山)·서일숙(徐日肅) 등과 함께 화북(華北)일대에서 활약중 재로(在露) 교포들과의 연합을 목적으로 비행사 서일숙을 노령(露領)으로 파송하였다. 1922년 북경에서 개최된 세계기독학생대회(WSCF)에 한국대표로 이상재가 참석하자,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 손정도와 함께 북경에 파견된 그는 이상재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도록 권유하였다.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YMCA) 학생부 간사를 맡았던 그는 동회에서 실시한 해외훈련에 뽑혀 1924년 미국에 파견되어 예일대·콜롬비아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1926년 8월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동포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7년 7월 귀국한 그는 동년 8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여 김종덕(金鍾悳)·조병옥(趙炳玉)·박현환(朴賢煥) 등과 함께 혁명투사 양성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고 청년운동, 직업학교 설치, 보건운동의 홀동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는 동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YMCA의 농촌사업 연구를 위해 1927∼1929년 3년간 이기태와 함께 농촌운동 선전 및 농촌지도자 강습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였다. 1937년 5월 17일 청년운동과 동우회사건으로 붙잡힌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른후 재판 결과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그후 그는 1939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거부하는 등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4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61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83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2권 501·82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2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366·1429·14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