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영해읍(寧海邑)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시위는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知品面洛坪洞)교회 조사(助事)로서 유학(留學)차 평양(平壤)으로 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평양에 갈 것을 단념하고 즉시 귀향한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救世軍參尉) 권태원(權泰源)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18일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내의 영해면·병곡면(炳谷面)·축산면(丑山面)·창수면(蒼水面)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면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에 주력하였다. 특히 이 고장의 독립만세운동 추진에 있어서는 대중규합 방법으로 토착 향반(鄕班)인 군내의 권(權)·남(南)·이(李)·박(朴)·백(白) 등 5성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때 그도 거사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적극 찬성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그는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정규하(丁奎河) 등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에게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다시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며 건물 등을 파괴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탈취 파기하였다. 이날 오후 2시경, 그는 정규하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면 병곡동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연도의 군중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영해주재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병곡주재소에서는 인근 평해(平海)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하려 하자,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과 기물을 파기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 그곳 건물도 완전 파괴하였다. 그러는 동안 평해에서 응원하러 온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니,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시위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9. 30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3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