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636
성명
한자 金鎭孝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 1919년 본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주모자(主謀者)) 운문사로 들어가 선언문(宣言文)을 등사하여 살포하려다 체포되어 2년 6월형(月刑)을 받고 대구(大邱)에서 복역(服役)함.

2. 군자금 7,000원을 모집하여 임정특파원(臨政特派員) 박윤군에게 수교 송금한 것이 발각되어 1년형(年刑)을 받고 복역(服役)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청도(淸道)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운문면(雲門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에서는 3월 1일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을 참배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목격하고, 귀향한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 등에 의해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는 당시 사립 문명학교(文明學校) 교사로 있었는데, 지난 3월 15일 밤 손기현(孫琪鉉)·김재화(金在華) 등이 부락민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어 붙인 일과 관련하여 김상구·김종태·손한조(孫漢祚)·김종식(金鍾軾)·강재식(姜在植)·홍용팔(洪龍八)·홍해성(洪海性)·김대선(金大善) 등과 함께 운문주재소로 연행되었다.

이날 취조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그는 즉석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동행하는 친구들과 결의하고,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들에게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제작하도록 하여 독립기를 들고 이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나와 동리를 시위행진하고, 면장인 이영호(李永浩)의 집에서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부른 후, 돌아오는 길에 방음동(芳音洞)·오진동(梧津洞)에 들러 또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3월 20일 대구 헌병분대 헌병 3명과 청도 경찰서 서장 이하 4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대대적인 검거를 할 때 그도 결국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문명학교 교장 김우곤(金禹坤) 등과 군자금 7백원(圓)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전달하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3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45·446·44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437∼144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진효 - 경상북도 청도(淸道) 청도군 문면 만세시위
본문
1887년 11월 17일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운문면(雲門面) 공암리(孔巖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고 1919년 당시 문명학교(文明學校)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운문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0일에 문명학교 졸업생 김종태(金鍾台)와 재학생 김상구(金相久)가 시위계획에 합의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15일에는 김재화(金在華)와 손기현(孫琪鉉) 등이 “우리 동포 형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 리 강토를 탈환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운문면 내 곳곳에 붙였다.3월 17일에 김상구·손한조(孫漢祚)·김용구(金龍久) 등과 함께 문명학교에서 만세시위를 다짐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8일에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경찰에 소환되어 격문에 대한 취조를 받았다. 귀가하는 길에 주도자들과 함께 곧바로 시위를 단행하기로 결의하면서 “면사무소에 가서 깃발을 만들어 만세를 부르면 마을 주민도 나올 것”이라고 독려하였다.면사무소에 도착하자 일행 중 김종태가 먼저 2척 길이의 명주 수건에 ‘(大)’를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이때 4명의 면서기에게 ‘(韓)’, ‘(獨)’, ‘(立)’, ‘(萬)’을 쓰도록 종용하였다. 이후 누군가가 ‘(歲)’를 적음으로써 「대한독립만세」 깃발이 완성되었고, 이에 곧바로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를 이끌었다.이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3월 20일 일본헌병과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여 그 해 7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1921년에 문명학교 교장 김우곤 등과 군자금 7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유고집 『구산소감(九汕所感)』, 『대한의열록(大韓義烈錄)』, 『규윤문보감(閨閏門寶鑑)』 등을 저술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징역 2년 6월 대구지방법원 1919-05-0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징역 1년(원판결 취소) 소요의 점은 무죄 대구복심법원 1919-07-05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9-25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경산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기념관 운문면 3·18독립운동 기념관 경상북도 청도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진효(관리번호:863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