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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90
성명
한자 朴炳好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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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4. 1 충남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장터에서「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운 후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고 시위할 때 일군(日軍)들의 야만적 기총난사로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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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등이, 갈전면(葛田面) 아우내(幷川)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화창하고 계속 절규하니 온 천지가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시위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군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며, 계속 발포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그도 적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59·173·44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2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병호 - 충남 천안(天安) -
본문
1875년 1월 5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동면(東面) 화계리(花溪里)에서 태어났다.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3,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대표적인 시위 중 하나로, 천안의 남부 지역인 갈전면(葛田面)과 수신면(修身面)에서 준비된 각각의 만세운동 계획이 하나로 합쳐져 이루어졌다.갈전면의 만세운동 준비는 유관순(柳寬順)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서울에서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귀향한 유관순은 3월 16일 부친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지역 인사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과 회합하였다. 유관순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병천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만세운동 날짜를 아우내장터 장날인 4월 1일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인근 지역까지 연락망을 조직하고, 거사 전날인 3월 31일 밤 매봉산에 봉화를 올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만세운동 준비의 일환으로 밤마다 예배당에 모여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할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4월 1일을 기다렸다.수신면에서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준비되었다. 고종(高宗)의 장례를 참석하고 돌아온 이순구(李旬求)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해들은 김교선은 홍일선이 만세운동을 제의하자 즉시 찬성하였다. 4월 1일 아우내장터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교선은 3월 29일 이순구·박영학(朴永學)·한동규(韓東圭)·이백하 등을 찾아가 만세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후 김상훈(金相勳)을 만나 만세운동 참여를 제의를 했을 때, 그로부터 갈전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들었다. 즉시 함께 하기로 하고 수신면의 주민 참여는 김교선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계획의 두 가지 흐름은 하나로 합쳐졌다.예정대로 3월 31일 밤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수신면 산마루, 충청북도 진천(鎭川)의 고갯마루에 다음날의 만세운동을 알리는 봉화가 올랐다. 4월 1일 아침, 연락받은 대로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우내장터로 향하는 길목에서 태극기를 받아 옷 속에 숨기고 장터로 들어갔다. 당시 각각의 길목에서 조병호(趙炳鎬)·조만형(趙萬衡)·박봉래(朴鳳來)·홍일선·김교선 등이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면서 태극기를 배포하였다.오후 1시 장터 한가운데서 조인원이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곧이어 유중권·유중무·조병호 등도 함께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주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장터로 오는 길목에서 받아 품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조인원·유중권·김교선 등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 대열을 형성하고 장터 일대를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병천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등 5명의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시위대가 불응하자 일본 헌병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김상헌(金相憲)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보고 분노하여 다수의 시위대와 함께 일본 헌병을 쫓아가 주재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헌병을 구타하였다. 일본 헌병이 다시 발포하여 유중권 등이 사망하였다. 이에 분노한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김상철(金相喆) 등은 100여 명의 시위대를 규합하여 주재소로 진격하여, 유치장 벽을 부수고 구금자를 석방하였다. 분노한 주민들이 계속 주재소로 이동하여 3,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과 함께 일본 헌병에게 달려들어 “소장을 죽여라”고 외치며 주재소장을 잡아 끌어내려고 하는 등 공격을 계속하였다.오후 4시 천안에서 급파된 철도엄호대원 6명이 지원 병력으로 아우내장터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고우(甲) 대위가 지휘한 철도엄호대 병력은 도착하자마자 일본 헌병대와 합세해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 대항하다가 복부에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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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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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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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충청남도 천안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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