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함북 부령(副寧) 사람이다.
서울 보성고보(普成高普) 학생으로 1919년 2월 28일 밤 독립선언서 약 200매를 가지고 송현동(松峴洞) 자신의 숙소에서 이철(李喆) 등 3명과 함께 협의한 후 선언서 8∼10매를 보관하고 또 동교생 이태영(李泰榮)·김장열(金長烈) 외 6명 등에게 배포케 하였다.
이튿날 3월 1일 독립선언서 전부를 가지고 등교하여 이철 등과 함께 오후 2시를 기하여 탑동(塔洞) 공원 앞 종로 남쪽지역 부근에 배포하고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3월 4일 경성 배재고보(培材高普) 기숙사에서 학생대표인 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각 학교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동년 4월 22일 밤 [선포문]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취지서](國民大會 趣旨書) 약 6,000매 및 국민대회의 개최를 알리는 간판을 이철(李喆) 등에게 전달하고 23일에는 집합 장소인 남대문 앞에서 시위 군중들에게 [선포문]과 [취지서]등을 배포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공소하여, 1920년 3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이후에도, 1924년 4월 1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창립위원회에서 전북지방(全北地方) 시찰원으로, 동월 21일에 노농총동맹(勞農總同盟) 집행위원 및 전형위원으로, 동년 12월 8일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 창립식에서 집행위원으로, 1925년 3월 26일 노총간담회(勞總懇談會) 집행위원으로, 1926년 4월 22일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에 각각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20. 3. 7 京城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41∼14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391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8∼82·131∼15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94∼121面
- 判決文(1919. 12. 19 京城地方法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9卷 164·167·29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74∼176·182∼184·187·206·207面
- 東亞日報(1924. 4. 1, 4. 21, 12. 8, 1925.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