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의
후손
을 찾습니다.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전체메뉴 열기

유공자정보

독립유공자 정보
관리번호 7371
성명
한자 張彩極
이명 王子明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주소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공훈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3 훈격 애족장

공훈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함북 부령(副寧) 사람이다.

서울 보성고보(普成高普) 학생으로 1919년 2월 28일 밤 독립선언서 약 200매를 가지고 송현동(松峴洞) 자신의 숙소에서 이철(李喆) 등 3명과 함께 협의한 후 선언서 8∼10매를 보관하고 또 동교생 이태영(李泰榮)·김장열(金長烈) 외 6명 등에게 배포케 하였다.

이튿날 3월 1일 독립선언서 전부를 가지고 등교하여 이철 등과 함께 오후 2시를 기하여 탑동(塔洞) 공원 앞 종로 남쪽지역 부근에 배포하고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3월 4일 경성 배재고보(培材高普) 기숙사에서 학생대표인 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각 학교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동년 4월 22일 밤 [선포문]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취지서](國民大會 趣旨書) 약 6,000매 및 국민대회의 개최를 알리는 간판을 이철(李喆) 등에게 전달하고 23일에는 집합 장소인 남대문 앞에서 시위 군중들에게 [선포문]과 [취지서]등을 배포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해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공소하여, 1920년 3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이후에도, 1924년 4월 1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창립위원회에서 전북지방(全北地方) 시찰원으로, 동월 21일에 노농총동맹(勞農總同盟) 집행위원 및 전형위원으로, 동년 12월 8일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 창립식에서 집행위원으로, 1925년 3월 26일 노총간담회(勞總懇談會) 집행위원으로, 1926년 4월 22일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에 각각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20. 3. 7 京城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41∼14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391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8∼82·131∼15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94∼121面
  • 判決文(1919. 12. 19 京城地方法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9卷 164·167·29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74∼176·182∼184·187·206·207面
  • 東亞日報(1924. 4. 1, 4. 21, 12. 8, 1925. 3. 26)
페이스북 담아가기 트위터 담아가기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셨습니까?

현재 페이지의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의견을 수렴하여 빠른 시일 내에 반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