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1월 하순부터 1941년 9월경 (月頃) 까지 서울 아현동 (阿峴洞) 에서 조국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의식의 앙양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이를 위해 애국가 (愛國歌) 의 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애국가 (愛國歌) 「백두산 (白頭山) 과 황해 (黃海) 의 물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의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無窮花) 삼천리 (三千里) 화려 (華麗) 한 강산 (江山) 대한인 (大韓人) 은 대한 (大韓) 을 영구 (永久) 히 보존 (保存) 하세」라는 내용의 가시 (歌詩) 를 지어 경성공립직업학교 (京城公立職業學校) 동급생 등 여러사람에게 전파하고 시국담을 논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국독립에 대하여 자기의 신명 (身命) 을 희생함도 아깝지 않다는 결의를 담은 통신문을 김광록 (金炚祿) 에게 우송하는 등 독립의식을 고취 시키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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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일제의 대륙 침략이 극심하던 1940년대 초 경성공립직업학교 재학 중 애국가를 보급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임용태는 평소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식을 앙양해야 하고, ‘애국가’의 보급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940년 11월 하순 서울 아현동에서 “백두산과 황해의 물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의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강산 대한인은 대한을 영구히 보존하세”라는 내용의 애국가 가사를 지어 경성공립직업학교 학생들에게 전파했다.
또한 동급생들을 대상으로 시국담을 논하였으며, 조국독립을 위해 자신의 신명을 희생하는 것이 아깝지 않다는 결의를 담은 통신문을 친구인 김광록(金炚祿)에게 우송하는 등 독립의식 고취 활동을 펴 나가다가, 1941년 9월 일경에 발각되어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不穩歌詩事件에 관한 件(京永警高秘 제79호, 1942. 3. 13), 思想에 關한 情報(警察署長)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