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합천(陜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삼가면(三嘉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김상준(金相峻)과 함께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김상준은 고향인 산청군 신동면 평지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주도하였으며, 윤규현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갔다. 그는 한필동(韓弼東)·허동규(許東奎)·한식동(韓湜東)·윤구현(尹求鉉)·윤승현(尹承鉉)·허장(許 ) 등과 더불어 삼가면·가회면(佳會面)·상백면(上栢面) 등 각면의 동지를 규합하면서 거사 준비를 해 나갔다. 그들은 3월 23일 삼가시장에서 거사하기로 합의하고, 면민들로 하여금 그곳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3월 23일 상백면에서는 약 4,000여 명의 군중이 봉기하여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면사무소를 불태운 후 통신을 차단하기 위하여 전신주 2개를 절단하면서 약 10리 되는 삼가시장으로 모여들었다. 가회면민들은 농악을 울리면서 속속 삼가시장으로 몰려왔다. 이렇게 모인 군중은 12,000∼13,000명에 달하였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기던 일경들이 요소 요소에 배치되었으나 군중들은 위세 당당하게 몰려들었던 것이다.
드디어 오후 3시, 정금당(正衿堂) 앞 광장에서 주도 인물들에 의해 일제 규탄의 성토대회가 개최되었다. 임종봉이 열띤 연설을 하고 있는 도중,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대퇴(大腿)를 맞아 단상 아래로 떨어졌다. 이를 본 군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여 곤봉과 낫을 들고 경찰 주재소와 우체국으로 몰려갔다. 이에 놀란 일경들은 일제히 그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순식간에 13명의 순국자와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인해 윤규현은 붙잡혀, 이해 9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陜川의 獨立運動史(陜川文化院, 1990) 32·33·36面
- 陜川誌(故鄕文化社, 1994) 220∼222面
- 抗日獨立有功者追慕碑(1995年 建立)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18·319面
- 3·1運動實錄(李龍洛, 1969) 657·676·678面
- 釜山·慶南 3·1運動史(3·1同志會, 1979) 491·494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慶南獨立運動小史(卞志燮, 1966) 17·18·42·45面
- 陜川郡誌(陜川郡誌編纂委員會, 1981) 638∼640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