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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0284
성명
한자 金鐸遠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7 훈격 애족장
1919년 3월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7월(미결구류(未決拘留) 160일 통산(通算))을 받았으며, 1929년 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 특별위원, 신간회(新幹會) 집행위원 및 회계, 1931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이사, 조선나병환자구제연구회(朝鮮癩病患者救濟硏究會) 상무위원, 만주동포문제연구회(滿洲同胞問題硏究會) 조사부에서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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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도 민족의식을 갖고 일제의 차별에 맞서 의사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경북 대구에서 태어난 김탁원은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파고다공원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탁원은 “평화적 수단으로 일본에 독립을 요구하고, 만약 일본이 이를 허용치 않는다면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킬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로 일제 경찰에 붙잡힌 김탁원은 징역 7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는데, 신문과정에서 “참정권을 비롯하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도 인정치 않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불평등하다”며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탁원은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좌우합작을 추구했던 신간회(新幹會)에서는 집행위원 및 회계를 맡았으며, 1931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의 상무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외에도 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 특별위원, 조선나병환자구제연구회(朝鮮癩病患者救濟硏究會)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열악한 한국의 보건·의료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관헌의 단속과 수해 등으로 실의에 빠진 만주 동포를 구제하고자 만주동포문제연구회(滿洲同胞問題硏究會)를 조직하여 위문품 전달 등을 실시하기도 했다.

김탁원은 한성병원(漢城病院), 경성여자의학강습소 등을 운영하며 한국 의료계를 주도하며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태동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중앙일보(1931. 12. 17, 1932. 2. 19, 4. 22)
  • 동아일보(1932. 1. 28, 2. 16, 2. 19, 4. 17, 4. 23, 1933. 8. 9, 1940. 3. 17)
  • 조선중앙일보(1934. 4. 5)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59, 70, 73, 83~84, 86~8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3집 94, 100, 104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4권 314~315, 346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8. 30, 11. 6)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0. 2. 27)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탁원 - 경상북도 대구(大邱) -
본문
1898년 7월 16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동성동(東城洞)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다니던 중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에 크게 고무되어, 이에 호응하는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각 학교 학생들은 1919년 2월 20일경부터 회합을 갖고 시위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2월 26일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 집에서 회합을 갖고 시위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였다.이때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완수를 결의하였다. “평화적 수단으로 일본에 독립을 요구하고, 만약 일본이 이를 허용치 않는다면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킬 수단을 강구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독립 방략을 세우고, 만세시위를 결행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으면서도 “참정권을 비롯하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도 인정치 않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불평등하다”라며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월(미결구류 160일 통산)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東京)제국대학 의학부에서 2년간 병리학을 연구하다가 1926년 귀국하여 병원을 열었다. 의사로서 옥고를 겪은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하는 한편, 1927년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집행위원과 회계를 맡아 보았으며, 1931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상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 특별위원으로 있으며 아동들에 대한 심리 치료를 연구하였으며, 조선나병환자구제연구회(朝鮮癩病患者救濟硏究會) 상무위원 등으로 일하며 열악한 한국의 보건·의료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관헌의 단속과 수해 등으로 실의에 빠진 만주 동포를 구제하고자 만주도포문제연구회(滿洲同胞問題硏究會)를 조직하여 위문품을 전달하고, 순회 치료를 하는 등 재외동포 구제에도 앞장섰다.한성병원(漢城病院)·경성의학강습소 등을 운영하고, 한성의사회장을 맡는 등 한국 의료계를 주도하였다. 1933년에는 미국인 의사 로제타 홀 여사가 운영하던 유일한 여자의사교육기관 조선여의강습소를 인수하여 부인 길정희와 함께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후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 발전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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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7월,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7월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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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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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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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적지 조선소년총연맹회관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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