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도 민족의식을 갖고 일제의 차별에 맞서 의사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경북 대구에서 태어난 김탁원은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파고다공원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탁원은 “평화적 수단으로 일본에 독립을 요구하고, 만약 일본이 이를 허용치 않는다면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킬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로 일제 경찰에 붙잡힌 김탁원은 징역 7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는데, 신문과정에서 “참정권을 비롯하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도 인정치 않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불평등하다”며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탁원은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좌우합작을 추구했던 신간회(新幹會)에서는 집행위원 및 회계를 맡았으며, 1931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의 상무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외에도 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 특별위원, 조선나병환자구제연구회(朝鮮癩病患者救濟硏究會)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열악한 한국의 보건·의료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관헌의 단속과 수해 등으로 실의에 빠진 만주 동포를 구제하고자 만주동포문제연구회(滿洲同胞問題硏究會)를 조직하여 위문품 전달 등을 실시하기도 했다.
김탁원은 한성병원(漢城病院), 경성여자의학강습소 등을 운영하며 한국 의료계를 주도하며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태동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중앙일보(1931. 12. 17, 1932. 2. 19, 4. 22)
- 동아일보(1932. 1. 28, 2. 16, 2. 19, 4. 17, 4. 23, 1933. 8. 9, 1940. 3. 17)
- 조선중앙일보(1934. 4. 5)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59, 70, 73, 83~84, 86~8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3집 94, 100, 104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4권 314~315, 346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8. 30, 11. 6)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0.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