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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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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4623
성명
한자 李商在
이명 (號)月南 성별
생년월일 (음)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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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2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독실(篤實)기독교 신자(基督敎信者)이며 일본(日本)한국기독교연합회 공작(韓國基督敎聯合會工作)저해(沮害)하고 교도(敎徒)들에게 민족사상(民族思想)고취(鼓吹)진력(盡力)함.
2. 1898년 서재필 박사(徐載弼博士)도미(渡美)함에 독립협회(獨立協會)지지(支持)하여 자유사상 고취(自由思想鼓吹)진력(盡力)함.
3. 황성기독교 총무(皇城基督敎總務)로서 청소년(靑少年)애국 사상(愛國思想)지도(指導)함.
5. 3.1운동 당시(運動當時) 민족적(民族的)지도자(指導者)로서 활약(活躍)했으며 말년(末年)에는 조선일보 사장(朝鮮日報社長)역임(歷任)함.
6. 1927년 신간회(新幹會) 회장(會長)으로 있다가 서거(逝去)함.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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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충청남도 서천(舒川)군 한산(韓山)면 종지(種芝)리에서 태어났다. 1881년에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그의 수원이 되어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 도중에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도 선진제국에 낙후되지 않도록 과감한 혁신을 꾀할 것을 역설하였다.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주사가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그 해 12월 4일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홍영식이 참살 당하자,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887년 6월에 박정양이 초대 주미(駐美)공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2등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도미(渡美)하였다. 청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자주 외교를 인정치 아니하고 주미청국공사가 고종의 국서를 자기가 대리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하면서 주미조선공사의 독립적 활동을 저지하려 하자, 크게 분개하여 청국공사관원과 담판하고 박정양 조선공사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케하여 자주독립외교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이에 분개한 청국이 조선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1888년에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다른 관직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1894년 7월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고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학부대신 박정양의 추천으로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사범학교, 관립중학교, 관립소학교, 외국어학교의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으며,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직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부심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관직을 다시 사임하였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관의 건설을 서재필과 함께 추진하여 완성했으며, 「토론회」를 조직하여 국민을 계몽하였다. 1898년 2월에는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를 친로수구파 정부가 허락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구국선언상소를 올리고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뒤이어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열강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어 더 이상의 이권양여를 저지하였다. 계속하여 의회(議會)를 설립해서 전제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려는 운동을 벌이다가 친로수구파에 의하여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부대신으로 한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모략에 걸리어 17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민들의 자발적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어 이상재 등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강경히 요구했으므로 1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당한 후에는 초야에 묻혀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감옥 안에서 기독교 성서들을 읽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기독교도들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하여, 당시 일제가 일본에서 파견한 동아기독교협회(東亞基督敎協會)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친일화 하려는 정치공작을 분쇄하고 기독교계를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지도하에 이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어 일제 통감부는 기독교세력을 반일 독립세력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주로 기독교청년운동에 종사하여 국권을 회복할 실력을 배양하려고 하였다.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여, 한국기독교청년회를 일본기독교청년회에 예속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을 남궁억(南宮檍) 등 동지들과 함께 분쇄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전국 각 지방 순회강연을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불교청년회 및 천도교청년회와 종교단체 친목회를 조직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기에 노력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계열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4개월 만에야 석방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하자, 일제의 모략과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의원단들을 만나 한국의 탄압 받는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여 그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4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되는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에게 탄압 받는 한국기독교운동을 폭로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와 일본 기독교청년회의 분리를 결의케 한 다음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려서 이 결의를 통고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의 독립을 실현하였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추대되어 당시 새로 대두되는 자치론을 저지하고 완전독립을 민족운동노선으로 정립하는데 노력하였다.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달에 노환으로 서거하여, 10만 군중의 애도 속에 사회장으로 장의를 엄수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일생을 통한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0·23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996면
  • 고등경찰요사 4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74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상재 호 : 월남(月南), 자 : 계호(季皓) 충남 서천(舒川) 신사유람단,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
본문
1851년 10월 26일 충남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 종지리(種芝里)에서 아버지 이희택(李羲宅)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자는 계호(季皓)이고 호는 월남(月南)이다. 자녀는 승륜(承倫), 승인(承仁), 승간(承侃), 승준(承俊) 등 4형제를 두었다 1867년 과거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친족 이장직(李長稷)의 소개로 박정양(朴定陽)의 문객이 되었다. 1881년 박정양 ・ 홍영식(洪英植) ・ 유길준 ・ 윤치호(尹致昊) 등이 제3차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일본으로 파견되자, 단장 박정양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으로 시찰을 떠났다. 일본에서 내무성 ・ 농상무성 등을 시찰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자료 등을 수집 ・ 정리하여 시찰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884년 우정총국(郵政總局, 현 우체국)이 개설과 함께 인천에 우정분국(郵政分局)이 설립되자, 홍영식의 추천으로 인천분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참여한 홍영식이 살해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하자 1887년 8월 7일 주미외교서기관으로 발령이 났다. 박정양을 단장으로 이종하 ・ 이완용 ・ 이하영 ・ 이채연 등과 1888년 1월 1일 미국 땅을 밟았다. 도착후 워싱턴으로 가서 고종(高宗)의 국서(國書)를 1월 17일 미국 외교부를 통해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G. Cleveland)에게 봉정하였다. 하지만 청나라는 ‘영약삼단(另約三端)’이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조선의 자주적 외교에 대해 간섭하였다. 청의 요청으로 1888년 12월 박정양이 파직당하게 되자, 이보다 앞서 귀국하여 주미공사로서 독립적인 업무 수행에 대해 소명하였다. 1895년 3월 25일 학부(學部) 관제 개편에 이어 4월 1일 학부 조직이 발표되자 조병건 ・ 홍우관과 함께 학부 편집국 참서관으로 임명되었다. 1896년 2월 내각 총서(總書)로 옮기기 전까지 약 1년간 교육 부분에서 일하였다. 이 시기 학부아문(學部衙門) 참의와 학부 참서관으로 근무하면서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으며, 한성사범학교 관제, 외국어학교 관제, 법관양성소 관제 등을 만들어 학교를 설립하였고, 114명의 양반 출신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후 박정양이 학부대신에서 내각 수반으로 임명되자, 『소학교령』을 발표한 데 이어 서울 소재 관립 소학교의 개교를 목표로 교과서를 만들고, 교사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1895년 12월 1일에는 새로 설립된 관립외국어학교 교장도 겸직하면서 여러 나라와 교류 업무를 수행할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를 기르고자 교사 초빙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관립 외국어학교 교사는 모두 일본인을 초빙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일에 대해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이노우에와 담판을 통해 관립외국어학교의 외국어 교사는 해당 국가 사람을 초빙하기로 담판지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3일 후인 2월 14일 내각 개편에서 종2품 내각 총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중추원 1등 의관(議官)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어 탐관오리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서재필 ・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연설가로서 활약하였다. 정동구락부에 출입하면서 개화파 인사나 외국인 선교사들과의 사교적인 모임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의정부 총무국장 시절, 총무국장 신분에도 불구하고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정부 시책을 비판하였다. 1898년 7월에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올바른 시무의 방안을 건의하면서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직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되었다. 그해 가을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리자, 사회를 보았다. 이때부터 토론자와 청중을 사로잡기 시작하여 유명 사회자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해 10월에는 독립협회에서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입헌군주제 실시를 핵심으로 한 국정개혁안인 「헌의육조(獻議六條)」를 왕에게 제출하였다. 「헌의육조」는 만민공동회 토론회를 거쳐 정리한 것으로 그가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고종도 「헌의육조」에 동의하여 중추원(中樞院) 장정 제정, 신문 발행, 상공학교 설립 등의 5개 사안을 더하여 국정개혁방안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의회구성안도 올리게 하자, 독립협회 회원도 의회의 민선의원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보수 관료들이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고 모함하자, 1898년 11월 4일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이승만(李承晩) ・ 양홍묵(梁弘默) 등은 경무청(警務廳) 앞에서 석방을 주장하며 철야 시위를 벌이자 고종은 6일 뒤에 이들을 석방하였다. 이 일로 1899년 1월 30일 의정부 총무국장 자리를 물러났다. 그후 1902년 6월 이원긍 ・ 유성준 ・ 김정식 등과 함께 일종의 비밀경찰조직인 경위원(警衛院)에 구속되었다. 이유는 입헌군주제를 추구했던 독립협회의 지향으로 인해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이상재를 내부대신(內部大臣)으로 하는 공화정부를 수립하려는 계략을 짜고 있다고 고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개혁당 사건’으로 두 달여 동안 가혹한 고문을 받고 15년형을 받아 한성감옥소에 수감되었다. 이 기간 동안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이승만 등과 함께 감옥학교를 운영하다가 2년 1개월 만인 1904년 5월 석방되었다. 1904년 6월 일본은 어공원(御供院) 소관의 산림 하천 ・ 연못 등의 황무지 개간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유생들과 선각자 등이 보안회(輔安會)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간권 반대운동을 벌이자 반대운동에 동참하여 상소문을 작성하고 반대 여론을 주도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이준 ・ 이동휘 등과 협동회를 조직하여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황성기독청년회(YMCA)와 국민교육회에서 강연하며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황성기독청년회 교육부장을 맡아 청년회 학관(學館)을 개설하고 기독교 청년 뿐 아니라 일반 청년들을 대상으로 교육에 나섰다. 특히 그가 기획 ・ 추진한 전국적인 순회강연회는 성공적이었으며, 국권의 위기 앞에서 청년들에게 분발할 것을 호소하였다. 경술국치 후인 1911년 9월 일제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꾸며 기독교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성기독청년회의 간부들이 구속되는 등 기독교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시기 황성기독청년회 총무를 맡아 기독교 사회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모든 책임을 본인이 떠맡으려 하였다. 또 해외에 있는 이승만에게 3 ・ 1운동 관련 자료를 비밀리에 보내 해외독립운동세력들이 연대하고, 국제외교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그의 전국적이고 본격적인 교육운동은 3 ・ 1운동 이후 조선교육협회를 결성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20년 6월 윤치호 등과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할 것을 논의한 후 11월 26일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교육협회는 그의 지도 아래 약 10년간 활동하면서 민립대학설립운동 주도, 50여 회의 전국순회강연, 『노동독본』 등의 책자 간행, 고학생 숙소 운영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2년 4월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만국청년대회에 참석하여 하와이에서 참석한 사람 편으로 이승만에게 보내 격려와 지지를 표현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조선교육협회와 별도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조선교육협회 건물에 사무실을 두었고, 조선교육협회 임원진 대부분이 민립대학설립기성회에 적극 참여하여 실질적으로는 조선교육협회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1923년 3월 29일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되자, 의장으로 선출되어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조선에 대학이 설립되어 인재양성과 민족 문화 창조 및 발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에서는 대학 설립을 위해서 총사업비 1,000만원을 3년간 분할하여 모금하기로 계획하고 설립 기금을 모집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모금 방해공작과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추진, 1923년부터 거듭된 수해와 가뭄 등으로 인해 모금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또한 이 해에 최남선 ・ 오세창 ・ 한용운 ・ 박영효 ・ 강매 등의 명의로 된 「경고해외각단체서」라는 건의서를 만들어 전국 사회단체 대표자 372명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이승만이 운영하는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이 ‘모국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올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 환영위원회를 만들어 요코하마(橫濱)까지 영접하러 사람을 보냈으며, 국내 도착후 야구시합 ・ 연극 ・ 음악회 ・ 강연회 ・ 다과회 등을 개최하고 군수와 경찰의 협조를 받으며 방문활동을 하도록 조직하기도 하였다. 즉 이승만의 하와이에서의 활동을 하와이 교포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성과로 인정받도록 널리 알리고 명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24년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오늘날의 한국보이스카우트) 의 초대 총재를 역임하였다. 보이스카우트 본래의 순수한 취지와 교육방법을 지키고자 하는 입장과 교육이념과 방법을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바꾸고자 하는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던 것을 통합하여 1924년 3월 소년척후단(小年斥候團)으로 발족시켰다. 1925년 3월에는 이승만 계열과 YMCA 활동가를 중심으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흥업구락부 회장이 된 후, 조직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조선의 산업과 상업 발달을 위해 조선인 상공회를 조직하여 상공인 운동대회 개최를 지원하였고, 경기도 연천(漣川)에서 대규모 농장을 하였다. 1924년 9월 75세의 나이에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기획한 것 중 하나가 조선기자대회이다. 조선기자대회는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1925년 4월 15일 10시에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460명의 관련자가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또한 사망하기 전까지 조선일보 사장으로 재직했던 1924년 말부터 1927년 초까지의 2년 6개월간은 『조선일보』가 거듭나는 기간으로 엄청난 진통을 겪었다. 당시 조선일보사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기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지배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민족해방 및 계급해방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총독부의 감시와 통제가 심해지고, 내부의 사상적 대립과 분열도 가시화되었다. 마침내 1925년 9월 8자 신문의 사설 「조선과 노서아(露西亞,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를 문제삼아 『조선일보』는 발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 때문에 윤전기가 압수당하고 편집인과 인쇄인 등이 구속 수감되었다. 이와 같이 발행 정지의 사태에서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진하여 월급을 받지 않는 등 솔선수범하여 희생을 감내하였다. 조선의 민중적 거인으로 신망받던 그는 건강 악화로 병석에 누워있음에도 신간회 회장직을 수락하였다. 1927년 1월 20일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민족단일당 건설을 내걸고 좌우 합작하여 신간회(新幹會)의 창립 발기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해 3월 29일 78세의 일기로 재동 셋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4월 7일 그를 추모하는 장례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처음에는 한산 선영에 모셨으나 1957년 6월 묘소를 경기 양주군(楊州郡) 장흥면(長興面) 삼하리(三下里)로 이장하여 부인 강릉유씨와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면소 방면 경성지방법원 1919-08-0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양주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이상재 집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2 비석 월남이상재선생추모비 충청남도 서천군
3 생가 월남이상재선생생가및기념관 충청남도 서천군
4 동상 월남이상재선생동상 충청남도 서천군
5 동상 월남 이상재선생 동상 서울특별시 종로구
6 사적지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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