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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870
성명
한자 李甲成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1. 1919년 3.1운동시(運動時) 민족대표삼십삼인중의 일인(一人)으로 일정(日政)에 구금되어 이년육개월간 마포감옥(麻浦監獄)에서 징역을 살었음
2. 1920년 복역중 3월 1일에 옥내(獄內) 전죄인들에 기념만세를 부르도록 지도하여 3800여명의 수감자가 일시에 만세를 부르게 되어 벌감(罰監)에 들어갔음
3. 출옥이승만 박사(李承晩博士)에게 군자금 송부사건(軍資金送付事件)에 관계하여 육개월 수감되었고 민립대학 기금 모집 사건(民立大學基金募集事件)으로 평북(平北) 선천경찰(宣川警察)에 피검되어 육개월 복역하였으며 광주학생 사건(光州學生事件)을 지도하다가 징역 유월을 당하였다
4.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활약하다가 귀국 후 경북 경찰(慶北警察)에 피검되어 수십차 고문 후 석방되어 경찰의 감시하에 8.15를 맞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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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경상북도 대구(大邱)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일찍이 기독교를 신봉하였으며,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부속병원의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국내외에 독립의 기운이 감돌자,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기로 결심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이 진행되자, 박희도(朴熙道)와 함께 독립운동을 실행함에 있어 학생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서울의 학생들이 시국의 추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학교에서 영향력이 있던 학생들과 자주 만나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는 한편, 비밀리에 학생들의 동정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1919년 2월 22일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이를 중지하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고 2월 27일에는 이인환(李寅煥)·박희도(朴熙道)·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함태영(咸台永)·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함태영이 최 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여러 가지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그 취지에 찬성하여 기독교측의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월 28일에는 김창준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600매를 받아가지고, 그날 5매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설(李容卨)에게 교부하고, 다음 날인 3월 1일에 400여 매를 자기 사무실에서 역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에게 주어, 그중 200매는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나머지 200매를 마산(馬山)의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또 김병수(金炳洙)에게는 군산(群山)에 있는 박연세(朴淵世)에게 보내기 위해 200매를 주었으며, 서울에서는 강기덕(康基德)에게 1,500매를 주어 배포케 하였다. 2월 28일 밤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 모인 손병희·이갑성 등의 민족대표들은,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결정했던 파고다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정하고, 당일 이갑성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한 뒤, 회합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당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튿날인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들은 태화관(泰華館)에 모였고, 이갑성은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하러 갔다가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여 얼마 후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광복 후에는 여러 정당 단체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952년 10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전시내각(戰時內閣)의 국무총리(國務總理)에 임명되기도 했다. 민족대표 중 최근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87·689·691·692·752·753·104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29·83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9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19면
  • 조선독립운동년감 1면
  • 고등경찰요사 22·23·4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509·819·821·822·823·824·826·827·82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7·71·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36·34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78·379·405·566·567·585·611·66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39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22·34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1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66·173·175·266·269·270·83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14·20·21·23·29·39·41·43·44·46·5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6·97·103·14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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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갑성 - 경북 대구(大邱) 3·1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본문
1886년 10월 23일 경북 대구(大邱)에서 부친 이기덕(李基德)과 모친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889년 10월 23일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연당(硏堂)이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11세 때 한문 서당을 다녀오다가 우연히 만난 기독교 선교사 샤록스(A. M.Sharocks)의 설교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배당에 다니면서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부모가 알게 되어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황성(서울) 기독교청년회YMCA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남대문교회 전도사 함태영(咸台永)을 만나, 그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리스도신문』을 배달하였다. 1906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대구로 돌아가 대남소학교에서 약 1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병원의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여 약학을 전공하였다. 1914년 약학과를 마치고, 다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15년 세브란스연합병원 제약담당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국제질서가 개편될 시기에 즈음하여 기독교 청년들 사이에 조선독립문제가 토론되자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한국 유학생들의 2 · 8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온 후, 기독교계의 3 · 1운동 초기 기획조직 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12일과 14일 두번에 걸쳐서 음악회를 가탁하고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에 있던 자신의 숙소에서 연희전문학교 학생대표 김원벽(金元壁),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김형기(金炯璣), 경성전수학교 학생 윤자영(尹滋瑛) · 김문진(金文珍),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배동석(裵東奭) 등과 독립운동 궐기를 모의하였다. 이 모임은 이후 3 · 1운동의 학생단 독립운동에 합류하였다. 2월 21일 오후 7시경 세브란스의전 구내 숙소에서 이승훈, 함태영(咸台永), 신홍식, 안세환(安世桓), 현순(玄楯) 등과 만나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는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안세환을 일본 도쿄에, 현순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천도교 · 기독교 · 불교 · 학생단의 민족대연합전선이 확정되고, 최남선(崔南善)이 초고한 「독립선언서」 초안이 천도교측으로부터 기독교측 함태영에게 전달되어 오자, 2월 27일 이필주(李弼柱)목사 집에서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 함태영,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이때 모인 10명 가운데 함태영만 빼고 나머지 9명과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7명을 합하여 모두 16명을 기독교측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함태영을 뺀것은 서명자들이 체포될 경우 그 가족의 보호 소임을 맡기 위해서였다. 이때 이갑성은 기독교측 대표 중 한사람으로 결정되어 3 · 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서명하였다. 2월 28일 저녁 가회동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모임에서 독립선언식 장소를 변경하자고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손병희의 제안으로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이회의에서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를 보내는 일을 위탁받고, 흔쾌히 이를 수락하였다. 한편, 2월 28일 인쇄되어 그 일부가 기독교 측에 전달된 독립선언서의 경상도지역 배포와 학생단 전달 책임을 맡았다. 2월 28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설(李容卨)에게 독립선언서 5매를 주어 등사해서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에게도 배포하도록 하였다. 다음날인 3월 1일 400여매를 자기 사무실에서 다시 이용설에게주어 200매는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나머지 200매는 마산의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또한 군산에 있는 박연세(朴淵世)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기 위해 김병수(金屏洙)에게 200매를 주었다. 학생단에게는 보성전문학교 학생대표 강기덕(康基德)에게 총 1,500매를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와 있는 캐나다 선교의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石虎弼)에게 해외 홍보등의 협조를 구하였다. 3월 1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월 상순 경찰과 검찰의 취조가 일단락되고, 검사국에 의해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었다.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관할위(管轄違)로 예심종결결정을 받고, 최고심인 고등법원에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한다.’는 특별 예심 결정을 선고하여 다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공소 불수리’ 판결을 하여 다시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졌다.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로 최남선 · 김창준 · 오화영과 함께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5월 5일 오화영과 함께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소감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나올 때에 같은 동지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차마 발이 돌아서지 아니하는 것을 할 수 없이 나왔습니다.”라고 하여, 동지에 대한 간절한 정서를 표하였다. 출옥 후인 1922년 11월 이상재(李商在), 한용운(韓龍雲), 이승훈, 현상윤(玄相允), 송진우(宋鎭禹), 장덕수(張德秀), 남궁훈(南宮薰), 홍덕유(洪悳裕)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준비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 3월 20일 발기회에도 참가하고, 이승훈 · 조만식 · 안재홍 등과 함께 모금운동 지방 강연회에도 참가하였다. 1925년 3월 22일 신흥우(申興雨) 집에서 이상재, 윤치호(尹致昊), 유성준(兪星濬), 장두현(張斗鉉), 구자옥(具滋玉), 유억겸(兪億兼), 오화영, 박동완 등과 함께 이승만(李承晩) 계열의 재미 독립동지회(獨立同志會)와 관련을 갖은 흥업구락부(興業具樂部)를 결성하였다. 1926년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1927년 1월 이상재, 이승훈 등 28명과 함께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신간회 해소 후 독립운동을 하러 1933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임시정부가 전 해에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멀리 떠나 이동 중이어서 귀국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신흥우, 윤치호, 장덕수, 유억겸, 안재홍, 구자옥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일제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전면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인을 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한 탄압과 예비검속을 자행한 것이었다. 일제는 흥업구락부가 1925년 창립 후 성금을 모금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와 하와이 이승만에게 송금한것까지 모두 들춰내어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결국 51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7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친일의혹논쟁’에 휩쓸렸다. 1980년 박창암이 애국지사 조경한(趙擎韓)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일제 ‘밀정’의 의혹이 있다고 잡지 『자유』에 고발 기사를 쓴 것이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과 미쓰비시주식회사 만주 신경출장소장 등으로 활동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SBS가 2005년 3 · 1절 특집으로 이 문제를 정밀 조사하고 취재한 바, 친일 의혹은 증거가 없고, 일제 패망 때까지 일제의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감시 대상이었던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 1945년 8 · 15 광복 후 이승만과 동행하여 우익진영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0월 반탁운동을 목적으로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大韓獨立促成中央協議會)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14일 권동진(權東鎭)을 당수로 추대하고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였다. 1946년에는 우익정당의 통합을 위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국민당(國民黨)과 신한민족당의 ‘3당통합’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이 안재홍(安在鴻)을 제명하자, 분개하여 탈당하였다.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입법의원을 지냈다. 1948년 3월 5 · 10 총선거 관리를 위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5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여 제2대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6 · 25전쟁 시기인 1951년 5월 부산 피난지에서 제2대 국회에서 실시한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73표를 얻어 78표를 획득한 김성수에 패배하여 낙선하였다. 1952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시내각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 달 야당이 우세한 국회가 인준을 부결하였다. 1953년 이승만의 요청으로 집권당인 자유당의 최고위원과 정무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60년 4 · 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61년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서 박정희, 김종필 등의 요청을 받고 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3년 건국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1965년 2월 27일 독립운동 유공자단체로서 광복회(光復會)가 창립되자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이 해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로 추대되었다. 별세 때까지 매해 3 · 1절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81년 3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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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징역 2년 6월(원판결 취소),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신청은 각하(却下)함, 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5 인물카드 - - - - 국사편찬위원회
6 인물카드 보안법범 - - - 국사편찬위원회
7 인물카드 조선독립선언에 가담함 징역금고2년6월 경성지방법원 1919-03-05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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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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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2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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