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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168
성명
한자 朴烈
이명 朴準植, 朴爀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1989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6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10월 일본국(日本國) 동경(東京)으로 가서 동경(東京)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수학하면서 1921. 5월 김약수(金若水), 조봉암(曺奉岩)등과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다가 다시 흑우회(黑友會)로 재조직하고 일본제국주의타도를 위하여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표방하며 활동, 1923. 9월 소위 일황(日皇)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황측의 귀족을 비롯하여 내각총리대신, 조선총독등을 폭살(爆殺)하려는 계획을 세워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폭탄을 구하기 위하여 동지를 파송하다가 피포(被捕)되어 일본 대심원(日本大審院)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0여년간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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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에 재학할 당시 3·1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그해 10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東京)의 정칙(正則)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5월 동경(東京)에서 김약수(金若水)·조봉암(曺奉岩)·김종범(金鍾範) 등과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으나 김약수·조봉암 등의 공산주의와 사상적으로 대립되어 해산하고 장상중(張祥重)·홍진유(洪鎭裕) 등과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4월 정태성(鄭泰成) 등 동지 16명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 및 악질적인 친일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천황을 비롯하여 황족과 내각총리대신, 조선총독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의 실현을 위해 폭탄을 구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上海)로 동지 김중한(金重漢)을 파송하다가 붙잡혔다. 이에 1926년 3월 폭살계획으로 인하여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26년 4월 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0여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10월 17일 전승국인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령에 의하여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332면
  • 조선일보(1926. 3. 12, 3. 16, 3. 20, 3. 23, 3. 25, 3. 26, 3. 27, 3. 29, 4. 6, 4. 7)
  • 동아일보(1926. 1. 21, 4. 21, 4. 24)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19·96·11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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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열 초명 : 혁식(赫植), 이명 : 박준식(朴準植) 경북 문경(聞慶) 일왕폭살계획 사건
본문
1902년 3월 12일(2월 3일, 음력)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戶西南面) 모전리(茅田里)에서 부친 박지수(朴芝洙)와 모친 정선동(鄭仙洞)의 1녀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초명은 혁식(赫植)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열(烈)로 불렀고, 호적에는 박준식(朴準植)으로 되어 있다. 몇 해 되지 않아 가족 모두 마성면(麻城面) 오천리(梧泉里) 샘골로 이주해 살았다.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전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한다. 맏형 정식(庭植)과 둘째형 두식(斗植)은 오천리 마을 구장을 맡아보며 인근 산지의 삼림보호와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星山組合, 1919년 권농조합으로 개칭)을 이끄는 등 마을일에 적극 앞장섰다. 7세인 1908년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는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咸昌)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한국인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일본교사는 경찰의 형사”라고 말하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의 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경복궁 근처 소격동에서 하숙하며 재학하던 중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이른바 ‘대역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학교에서 1919년 3 · 1운동을 맞아 시위에 참여했는데, 일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 문경에서 친구들과 함께 4월 초부터 중순까지 태극기를 들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에 끌려간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취체 경험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마침내 1919년 10월경 부산에서 도쿄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 노동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반제 자유사상을 가진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재일유학생들을 만났고 우연히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사상 공감에 이어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기로 하면서 자연스레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도쿄 최대의 한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유학생인 김약수(金若水), 백무(白武)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 교육을 위한 야학활동도 벌였다. 나아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당시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주최하는 여명회(黎明會)와 코스모구락부 · 자유인연맹 등 각종 사상단체의 강연회에 참여하면서 반제 자유사상과 아나키즘에 공명하게 되었다. 또한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도쿄(東京)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義血團)[후에 철권단(鐵拳團), 혈권단(血拳團), 박살단(撲殺團)으로 개칭]을 조직해 친일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거나 집단 구타하여 응징하였다. 1921년 11월 29일 원종린(元鍾麟), 김약수 등 유학생들과 함께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다.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책임을 맡아 1922년 7월 10일자 창간호와 8월 10일자 2호를 발간하고, 니카다현(新潟縣) 나가쓰가와(中津川)의 한인노동자 학살사건에 조사단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흑도회는 9월 7일 학우회와 함께 도쿄 YMCA에서 이 사건의 진상보고회를 개최하였다. 1천여 명이 모인 이 행사에서 일본 약탈체제의 근본적 파괴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학살조사를 국내에 보고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김한(金翰) 등 의열단 간부들을 비밀리에 만나 폭탄구입을 요청하였다. 김약수, 백무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여 1922년 12월 홍진유(洪鎭裕), 장상중(張祥重) 등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서 가네코와 함께 기관지 『후데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 『민중운동』 등 항일 잡지를 발간하였다. 또 일본 및 한인 사회단체들과 함께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 반대운동을 벌이고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는 한편,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일본지식인을 초청하는 등 연대활동을 펼쳤다. 1923년 4월 중순경 자택에서 한인 15명과 일본인 6명으로 구성된 불령사(不逞社)를 별도로 조직해 노동쟁의 후원과 민중강연회 참가 등의 대중활동을 펼쳤다. 1923년부터는 의열투쟁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폭탄유입을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외국에서 폭탄을 유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를 실험하는 한편, 의열단 국내 책임자인 김한에게 폭탄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하였다. 하지만 의열단 내의 정보혼란으로 폭탄유입이 중단되고 일제의 계략으로 압수당하자, 고교동창이며 동지인 김중한(金重漢)을 통해 폭탄을 구입하려 하였다. 한편으로 불령사 회원 최영환(崔英煥)을 통해 중국의 한인 의열단체인 다물단으로부터 폭탄을 건네받았다. 유입된 폭탄은 1923년 10월 중 예정된 일본 히로히토(裕仁) 태자의 결혼식에 투척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돌연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한인 폭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6천여 명의 한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선량한 한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6,200여 명이 강제 연행될 때,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3일 새벽 경찰서에 검속되었다. 검찰 취조 도중 폭탄 구입사실이 알려졌고, 이때부터 일본 정부와 경찰은 이를 ‘대진재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 즉 대역사건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 검찰은 관련자 진술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자, 1924년 2월 1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 세 사람만을 추가 기소하고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방면하였다. 일본 검찰에 기소된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혹심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일체 자신을 ‘피고’로 부르지 말 것과 조선 예복의 착용,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공판 전에 자신의 선언문을 낭독하게 할 것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일본 사법부가 이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조선의 사대관모와 관복을 입고 법정에 출두해 반말투로 일왕의 죄를 밝혔다. 그리고 옥중에서 작성한 선언문인 『음모론』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 권력자계급에게 준다』 등 4편의 글을 낭독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였다. 일본 정부는 1926년 3월 25일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던 일제는 10일 만에 특별감형을 요청하였고, 두 사람에게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킨다고 발표하였다. 스스로 조작사건의 실체를 드러내 준 꼴이 아닐 수 없다. 가네코 후미코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지바(千葉) 형무소와 도치키(栃木) 형무소로 옮겨짐에 따라 이별해야 했는데, 이에 4월 6일 이감되자마자 은사전달에 저항하며 약 10일 동안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가네코는 가혹한 자신의 상처와 항일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아 출간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가매장되었다. 유골은 옛 흑우회 동지들의 노력으로 발굴되었고, 일본 경찰과의 충돌과 우여곡절 속에서 4개월 만인 11월 5일 가까스로 박열의 고향 선산인 경북 문경 팔령산(八靈山)에 묻혔다. 한편 9월초에는 옥중에 수감 중이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다정한 포즈로 찍은 ‘괴사진’이 일본 언론에 의해 알려짐에 따라 큰 파장이 일었다. 문제의 사건은 두 사람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예심판사가 박열과 환담하던 중, 마침 옆방에 온 후미코를 동석시켜 사진을 찍게 한 후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을 ‘사법권의 문란’으로 본 우익과 야당 인사들이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였는데, 이로 인해 내각이 붕괴되고 담당 사법관이 파면당하는 등 정계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36년 8월 고스게(小菅)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43년 8월 도쿄에서 먼 동북지방의 해안가인 아키다(秋田)의 형무소로 옮겼다. 이후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세계 최장기간 수감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제는 꾸준히 사상전향을 강요해 모두 5편의 전향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제시된 전향선언서는 문장구성과 내용이 이전과 지나치게 다르고, 주변인물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를 출옥시키거나 감형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작되었다고 여겨진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었으나, 일제는 72일이나 지난 10월 27일까지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에 먼저 출옥한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김천해(金天海) 등 사상범들이 1945년 10월 15일 박열의 석방을 요구하며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시위를 벌이고,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부 앞으로 석방탄원서를 제출하였다. 1945년 10월 홋카이도(北海道) 변방에서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다. 1945년 12월 6일 도쿄에서 석방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옥중에서 박열을 감시했던 형무소 주임인 후지시다 이사부로(藤下伊一郞)가 나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사죄의 뜻으로 아들을 양자로 바치고, 자신의 이름 또한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도쿄에 돌아오자, 당시 재일조선인연맹 등 조선인단체들이 앞다투어 지도자로 모시려 하였다. 하지만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강훈, 원심창 등 항일동지들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5월 백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즉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버려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 3열사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오게 된 것이다. 이어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다. 신조선건국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범우파 단체들과 통합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시켰다. 이때 초대단장을 맡았다. 민단은 부단장에 이강훈, 사무국장에 원심창, 도쿄지국장에 고순흠 등 일제치하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항일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룬, 반일 · 반공산주의적 재일동포단체이다. 이후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이승만 정부도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지지 방침은 민단 내부의 분열을 촉진시켰다. 결국 1948년 2월 민단의 재정고갈과 이승만 정권 반대세력 등과의 내부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다. 이듬해 5월 영구귀국을 결심하고 서울로 돌아와 머물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하였고, 사흘 뒤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압송 당하였다. 납북 이후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는 당시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조헌영 등과 함께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상무위원과 최고위원, 회장 등을 맡아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74년 1월 17일 73세 나이에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노선에 따라 일왕과 일본 침략자들에게 폭탄을 투척하려다 체포되어 22년 2개월이란 세계 최장의 수형을 받은 혁명가이다. 광복 후에는 재일한인들의 단체인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립하여 초대단장을 역임한 사회활동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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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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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념관 박열의사 기념관 경상북도 문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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