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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독립유공자 정보
관리번호 1695
성명
한자 南廷珏
이명 南英得 南寧得 號: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주소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공훈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공훈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그는 1913년 3월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기독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수원·안성·용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배부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만세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하였다.

1920년 3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중국청년회(中國靑年會) 어학과(語學科)에서 수학하다가 동년 12월 중퇴하고 장춘(長春)·천진(天津)·상해(上海) 등지를 순력하며 독립지사들을 찾아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던 중 1921년 겨울 북경에서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과 만나고 1922년 6월 최용덕(崔用德)·이종암(李鍾岩)의 소개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최용덕·이종암이 그에게 서울에 있는 김 한(金翰)이 폭탄을 국내에 들여와 투척할 성의가 있는가를 확실히 파악할 것을 부탁하므로 그는 동월 그믐께 서울에 들어와 시내 수창동(需昌洞) 모 여관에서 김 한과 면담하고 김 한의 의향을 타진하니 그는 폭탄을 안동현(安東縣)까지만 운반해 오면 이를 자기의 부하로 하여금 국내에 들여다가 조선총독부·조선은행·동양척식회사 등을 파괴하겠으니 잠복할 장소설치 등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그는 곧 상해로 돌아가서 영조계(英租界) 신려사(新旅社)에서 김원봉·최용덕과 만나서 "김 한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복명한 뒤 김원봉으로부터 자금 2,000원을 받아 동년 8월 다시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갖고 온 자금을 김 한에게 준 다음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려면 안동현에 중계소를 둘 필요가 있으니 자신이 중계인이 되겠다고 말하고 약장수로 가장하여 안동현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적당한 집이 없으므로 중계소 설치계획을 중단하고 다시 입국하여 김한과 폭탄반입에 대한 협의를 한 뒤 천진을 거쳐 상해에 가서 김원봉과 협의하고 때를 기다리면서 국내의 김한(金翰)과 수차 회합하여 그 방법을 논의하였다. 동년 12월 28일경 동지 이현준(李賢俊)과 같이 서울에 도착하여 시내 운니동(雲泥洞) 박완명(朴完明)의 집에 투숙하면서 폭탄의 도착을 기다렸으나 자금의 미비로 도착하지 않자 그는 국내에서 운동자금을 모집하고자 동년 4월 14일 시내 황금정(黃金町) 2정목(현 을지로 부근) 정목여관(正木旅舘)에서 동지 권동산(權東山, 일명 正弼)·유병하(柳秉夏)·유시태(柳時泰) 등과 의논하고 그들에게 권총을 주며 내자동(內資洞) 이인희(李麟熙)에게 자금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동년 2월 21일 그는 상해에서 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정(丁)모라 가칭하고 유시태와 함께 이인희의 집에 가서 5,000원을 요구하였다가 그의 고발로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후 동지들도 피체되어 동년 8월 7일 의열단원 12명의 공판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삼시(三矢) 재판장, 평산(平山) 검사의 입회로 개정되어 연일 계속되다가 동월 12일 징역 8년의 구형을 받았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분기충청한 태도로 일어나 "나는 의열단원이오. 검사의 말이 우리의 행동을 직업적이라 하나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소. 나는 경술국치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이다. 나는 군자금을 모집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의열단은 군자금을 모집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 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은 즉 나의 형벌에 대해서는 사형도 좋소이다. 더 말하지 않겠소"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출감하자 그는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하여 지하운동을 하는 한편 천진교민회(天津僑民會)를 조직하고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때 그는 귀국하는 교포들의 여비 및 기타비용을 조달코자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배편을 이용하여 많은 교포를 무사히 귀국시키는데 진력하였으며, 귀국후에는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에 가입하여 건국사업에 협력하며 동지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고자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23. 8. 21 경성지방법원)
  • 고등경찰요사 218·220·221면
  • 기려수필 285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23·426·43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8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252∼279·397·733∼77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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