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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695
성명
한자 南廷珏
이명 南英得, 南寧得, 號:山, 金錫鎭, 丁燮, 南午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1997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삼일운동 참가(三一運動參加).

2. 1920.3 중국 망명(中國亡命) 의열단(義烈團).

3. 1923 국내 왜관(國內倭冠)시설 파괴(施設破壞)요인 암살(要人暗殺)목적(目的)으로 중 경성(京城)에서 체포(逮捕)되어 경성지법(京城地法)에서 8년형(年刑)을 받다.(동아일보(東亞日報) 13(卷) p. 227)

4. 1929 중국 망명(中國亡命)(천진(天津)).

5. 천진교민회 조직(天津僑民會組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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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그는 1913년 3월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기독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수원·안성·용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배부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만세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하였다.

1920년 3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중국청년회(中國靑年會) 어학과(語學科)에서 수학하다가 동년 12월 중퇴하고 장춘(長春)·천진(天津)·상해(上海) 등지를 순력하며 독립지사들을 찾아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던 중 1921년 겨울 북경에서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과 만나고 1922년 6월 최용덕(崔用德)·이종암(李鍾岩)의 소개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최용덕·이종암이 그에게 서울에 있는 김 한(金翰)이 폭탄을 국내에 들여와 투척할 성의가 있는가를 확실히 파악할 것을 부탁하므로 그는 동월 그믐께 서울에 들어와 시내 수창동(需昌洞) 모 여관에서 김 한과 면담하고 김 한의 의향을 타진하니 그는 폭탄을 안동현(安東縣)까지만 운반해 오면 이를 자기의 부하로 하여금 국내에 들여다가 조선총독부·조선은행·동양척식회사 등을 파괴하겠으니 잠복할 장소설치 등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그는 곧 상해로 돌아가서 영조계(英租界) 신려사(新旅社)에서 김원봉·최용덕과 만나서 "김 한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복명한 뒤 김원봉으로부터 자금 2,000원을 받아 동년 8월 다시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갖고 온 자금을 김 한에게 준 다음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려면 안동현에 중계소를 둘 필요가 있으니 자신이 중계인이 되겠다고 말하고 약장수로 가장하여 안동현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적당한 집이 없으므로 중계소 설치계획을 중단하고 다시 입국하여 김한과 폭탄반입에 대한 협의를 한 뒤 천진을 거쳐 상해에 가서 김원봉과 협의하고 때를 기다리면서 국내의 김한(金翰)과 수차 회합하여 그 방법을 논의하였다. 동년 12월 28일경 동지 이현준(李賢俊)과 같이 서울에 도착하여 시내 운니동(雲泥洞) 박완명(朴完明)의 집에 투숙하면서 폭탄의 도착을 기다렸으나 자금의 미비로 도착하지 않자 그는 국내에서 운동자금을 모집하고자 동년 4월 14일 시내 황금정(黃金町) 2정목(현 을지로 부근) 정목여관(正木旅舘)에서 동지 권동산(權東山, 일명 正弼)·유병하(柳秉夏)·유시태(柳時泰) 등과 의논하고 그들에게 권총을 주며 내자동(內資洞) 이인희(李麟熙)에게 자금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동년 2월 21일 그는 상해에서 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정(丁)모라 가칭하고 유시태와 함께 이인희의 집에 가서 5,000원을 요구하였다가 그의 고발로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후 동지들도 붙잡혀 동년 8월 7일 의열단원 12명의 공판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삼시(三矢) 재판장, 평산(平山) 검사의 입회로 개정되어 연일 계속되다가 동월 12일 징역 8년의 구형을 받았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분기충청한 태도로 일어나 "나는 의열단원이오. 검사의 말이 우리의 행동을 직업적이라 하나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소. 나는 경술국치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이다. 나는 군자금을 모집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의열단은 군자금을 모집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 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은 즉 나의 형벌에 대해서는 사형도 좋소이다. 더 말하지 않겠소"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출감하자 그는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하여 지하운동을 하는 한편 천진교민회(天津僑民會)를 조직하고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때 그는 귀국하는 교포들의 여비 및 기타비용을 조달코자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배편을 이용하여 많은 교포를 무사히 귀국시키는데 진력하였으며, 귀국후에는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에 가입하여 건국사업에 협력하며 동지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고자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23. 8. 21 경성지방법원)
  • 고등경찰요사 218·220·221면
  • 기려수필 285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23·426·43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8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252∼279·397·733∼77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정각 호 : 오산(午山), 아명 : 남영득(南英得·南寧得)이명 : 김석진(金錫鎭), 정섭(丁燮), 우각(迂玨) 경기 용인(龍仁) 의열단 황옥경부 폭탄사건
본문
1897년 12월 22일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부친 남팔원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오산(午山)이다. 어릴 때 이름은 남영득(南英得·南寧得)이다.1913년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고,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독립신문』을 배포하는 등 시위 확산에 노력하였다.1920년 3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창춘(長春),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등지를 오가며, 이종암(李鍾岩)·최용덕(崔用德) 등과 독립운동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톈진에 머물던 시기 유자명(柳子明)을 김원봉(金元鳳)에게 소개하여 유자명을 의열단에 입단시켰고, 유자명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 동지들과 공동 생활을 하였다.1922년 당시 의열단에서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침략기관을 폭파하기 위해, 다량의 폭탄과 무기 그리고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 등의 선전 문건을 국내로 밀반입하려 하였다. 그 해 6월초 톈진에서 활동하던 중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무산자동맹회(朝鮮無産者同盟會) 회장 김한(金翰)을 만나 폭탄의 국내 반입과 폭파 활동에 관해 협의하라는 단장 김원봉의 지시를 받았다.1922년 6월 말 국내로 들어와 김한에게 의열단의 계획을 설명하였고, 김한도 이에 동의하였다. 7월에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김원봉에게 보고한 다음, 재차 국내로 들어와 의열단의 지원자금 2,000원을 김한에게 전달하였다. 그러자 김한은 이 가운데 350원을 돌려주며, 안동현(安東縣, 현재의 中國 遼寧省 丹東市)에 중간 연락기관을 설치할 것을 부탁하였다. 부탁을 받고 안동현으로 가 양한규(梁漢奎)의 집에 머물며, 중간 연락기관의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이 일이 어렵게 되자 다시 상하이로 건너 가 김원봉과 폭탄 반입 문제를 상의하였다. 1922년 12월 박기홍(朴基弘)과 함께 다시 서울에 파견되었고, 운니동에 있는 박정명(朴定明)의 집에 잠복하며, 김한과 연락을 취하며 때를 기다렸다.이러는 사이 1923년 1월 12일 김상옥(金相玉)의사의 ‘종로경찰서 투탄의거’가 일어나고 김한이 이에 연루되어 붙잡히자, 2월 1일 서울을 빠져나와 톈진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에 김원봉은 김한을 대신하여 김시현(金始顯)에게 폭탄 반입공작을 추진토록 지시하였다. 김시현은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洪鍾祐)와 봉천지국장 신명구(申明九) 등을 만난 다음, 서울에서 뒤따라 온 이현준(李賢俊)과 함께 톈진으로 가서 김원봉과 만나 폭탄 반입에 관해 의논하였다. 이때 경기도경찰부 황옥(黃鈺) 경부(警部)가 김상옥의거의 수사를 위해 1923년 2월 8일 톈진으로 출발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김시현은 황옥을 폭탄의 국내 반입 계획에 가담시키기로 하고, 2월 9일 안동현으로 가서 홍종우로부터 소개받은 조선일보 평북지국원 백영무(白英武)를 대동하고 톈진으로 돌아와, 황옥의 도착을 기다렸다.황옥이 톈진에 도착하자 이때 그를 맞이해 김원봉을 만나게 하였고, 황옥은 의열단의 폭탄 국내반입 계획에 가담하는 데에 동의하였다. 이에 황옥과 동행한 의열단원 유석현(劉錫鉉)을 데리고 상하이로 가서, 함께 폭탄을 톈진으로 운반해 왔다. 그리고 일행보다 먼저 톈진을 떠나 안동현으로 가 뒤이어 운반될 폭탄과 무기의 안전, 보관장소를 점검하였다.1923년 3월 4일 백영무와 이현준은 열차편으로 안동현의 홍종우 집으로 폭탄을 운반하였고, 황옥과 김시현도 3월 7일 안동현에 도착하였다. 이때 유석현을 통해, 이륭양행(怡隆洋行)에 보관시켜 둔 폭탄과 무기를 황옥에게 건네주라는 김원봉의 명령을 전해 받았다. 그리하여 이륭양행의 주인 쇼우로 부터 이륭양행에 맡겨둔 폭탄과 무기를 찾아 황옥에게 인도하였다. 그리고 황옥·유석현·박기홍과 함께 일제 안동영사(安東領事) 김우영(金雨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이후 이들은 3월 8일과 9일 양일간에 걸쳐 폭탄을 신의주의 백영무 집으로 운반하였고, 그 뒤 황옥과 유석현이 먼저 폭탄의 일부를 휴대하고 3월 11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폭탄은 김사용(金思容)과 조황(趙晃)에게 숨겨두고, 15일에는 이경희(李慶熙)로 하여금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문건을 각 도지사와 경찰부에 우송토록 명령하였다.김시현은 김태규(金泰奎)와 함께 3월 11일 폭탄 중 일부를 시내 효자동 21번지 조황에게 우송한 뒤, 12일 나머지 폭탄을 조동근(趙東根)에게 맡긴 다음, 13일 서울에 도착, 조황의 집에 잠복하였다.그러나 3월 15일에는 김시현·황옥 등이, 3월 24일에는 홍종우 등이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조선총독부 안동영사와 경기도경찰부 경부 등이 연루된 의열단의 폭탄 국내반입 활동이 발각되고 말았다.한편 서울로 잠입한 뒤 폭파 대상으로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일본인 전기회사 등을 물색한 뒤, 거사에 필요한 경비를 확보하기 위해 유석현과 함께 자금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폭탄의 운송이 지연되고 거사가 어렵게 되자 독자적인 추진을 시도하였다. 황금정 2정목(현 을지로 2가)에 있는 정목여관(正木旅館)에 머물면서, 권동산(權東山)·윤병하(尹秉夏)·유시태(柳時泰) 등과 운동자금을 조달키 위해 내자동에 거주하는 친일 부호 이인희(李麟熙)를 찾아가 ‘임정 군무총장’을 자칭하고 5천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인희는 자금 마련을 위해 며칠간 시간을 할애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1923년 3월 3일 오전 9시 자금 수령을 위해 이인희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해 있던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이어 동지들도 체포되면서 예심에 회부되었다. 1923년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30년 풀려난 뒤 톈진으로 망명해 병원을 운영하는 등, 한인사회의 중심 인물로서 천진한인교민회(天津韓人僑民會)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천진한인교민회는 의열단의 연락 거점 역할을 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톈진 거주 한인들을 귀국시키기 위해 진력한 다음, 1946년 마지막 귀국 선편으로 돌아왔다.광복 이후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에 가입 정부수립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국내에 경제적 기반이 전무한 동지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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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폭발물취체벌칙, 총포화약류 취체령위반, 강도 당법원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23-06-1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폭발물취체벌칙위반, 강도미수 징역 8년 경성지방법원 1923-08-21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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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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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의열기념관 경상남도 밀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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