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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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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智煥
이명 없음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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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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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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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3.1운동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공훈록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관서학원 대학신학부(關西學院大學神學部)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교육사업을 통한 민족계몽과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조국 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15일 상경, 정춘수(鄭春洙)를 방문하여 시국을 토론하다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22일에는 다시 오화영(吳華英)·이인환(李寅煥)과 만나 거족적인 독립운동계획에 관하여 이야기를 듣고 이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여,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 참가국 위원들에게 제출할 의견서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 서류를 중국 상해(上海)에 머물고 있던 현순(玄楯)의 처에게 우편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우선 만주의 안동현(安東縣)에 목사로 있던 김병농(金炳穠)을 만나기로 하였다. 이에 28일 함태영(咸台永)으로부터 서류를 전해 받고 3월 1일 서울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신의주(新義州)에 도착하였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도보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 안동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김병농이 부재중이어서 그의 아들인 김태규(金泰圭)에게 대신 중국우편으로 현순의 처에게 서류를 우송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 위하여 도보로 남만주의 백마역(白馬驛)에 이르러 기차를 기다리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재판 받는 과정에서 고생하다가 이듬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20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2·91·12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6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15·25·29·40·41·5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19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4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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