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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12
성명
한자 桂奉瑀
이명 桂奉宇, 河瑾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9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1911년 (初)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광성학교(光成學校)에서 국사(國史)국어(國語)교과서를 편찬, 교육하는 등 민족교육에 전념하였으며, 1919년 상해(上海)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자 북간도대표(北間島代表)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議員)이 되어 활동하였고 1920. 5월에는 유동열(柳東說), 이탁(李鐸)과 함께 임정 간도파견원(臨政間島派遣員)으로 활동하였으며『독립신문』에 뒤바보 또는 사방자(四方子)라는 필명(筆名)으로「의병전(義兵傳)」,「북간도(北間島)과거(過去)현재(現在)」,「아령실기(俄領實記)」등 독립정신을 고취(鼓吹)하는 글을 게재하였고, 1920. 10월 이후 치타 극동 공화국 극동부(極東部) (內)한인부(韓人部)에서 활동(活動)하다가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때 일크츠크 코민테른 파에 의해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치렀고, 1937년 중앙(中央) 아시아에 강제(强制) 이주된 후에도『조선문법(朝鮮文法)』『조선역사(朝鮮歷史)』등을 집필(執筆)하여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연구 보급하는 등의 활동(活動)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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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함남 영흥(永興) 사람이다.

1890년 10살 때부터 1899년 19살 때까지 고향인 영흥에서 사립소학교와 사립중학교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습득하였으며, 20대 초반인 1903년부터 1906년까지 3년 동안 한국사와 중국사를 공부하여 사학(史學)에 입문하였다. 이어 1906년부터 3년간 영흥군내 흥명학교에서, 1910년에는 함흥(咸興)의 영생중학교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동휘(李東輝)를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된 1911년 1월 신민회원이자 이동휘의 사위인 정창빈과 더불어 북간도(北間島)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북간도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 자리를 잡은 그는 이동휘·김 립(金立) 등과 함께 소영자(현재는 延吉市로 편입)의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육성하는 한편, 국사와 국어를 가르치면서 『조선역사(朝鮮歷史)』·『국어(國語)』·『조선지리(朝鮮地理)』 등 한국사와 한국어 교과서 편찬을 주도하여 간도 전역에 보급하는 등 북간도 한인사회의 민족교육과 항일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후 1915년, 중국 관헌의 탄압을 피해 다니던 이동휘 등과 함께 왕청현(汪淸縣) 하마탕으로 이주하여 국사와 국어 연구에 전념하던 중, 이듬해인 1916년 음력 10월 용정(龍井)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대가 이동휘를 체포하기 위해 하마탕의 한인촌을 급습할 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인천(仁川)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한 그는 고향인 영흥으로 귀향하였으나 금고(禁錮)로 말미암아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재차 국권회복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1919년 3·1운동 이후 한국인 화부의 도움으로 러시아 상선에 은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고, 8월에 다시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11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북간도 대표 의원으로 부임한 그는 1년간에 걸쳐 의정 활동을 펼치는 한편, 이듬해 1월부터 5월에 걸쳐 '뒤바보'와 '사방자(四方子)'라는 필명으로 「북간도(北墾島) 그 과서와 현재」·「아령실기(俄領實記)」·「金알렉산드라小傳」·「의병전(義兵傳)」 등 주목할 만한 민족운동 관련 저술을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발표하였으며, 김두봉(金枓奉)과 함께 독립운동사와 국문법 등 연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월 유예균(劉禮均)과 함께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에 국민회(國民會)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동년 4월에는 이동휘가 조직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에 가입하여 당 기관지인 『자유종(自由鐘)』의 주필이 되어 필봉을 휘두르는 한편, 5월에는 유동열(柳東說)·이 탁(李鐸)과 함께 임정간도특파원(臨政間島特派員)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1920년 10월경 치타에 위치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 임시수도 웨르흐네우진스크(현 울란바토르)에 파견되어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의 특사인 한형권(韓馨權)·박진순(朴鎭淳)·박 애(朴愛) 등과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에 한인부(韓人部)를 조직하고 장도정(張道政) 등과 더불어 5인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가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조직하여 자유시(自由市)로 집결하는 남북만주 독립군부대의 군(軍)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1921년 4월 사할린의용대가 주둔하고 있는 바사노프에서 이동휘 등과 함께 제2차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동 위원회의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군권 수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동년 6월 전개된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이르쿠츠크파에 의해 붙잡혀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臨時高麗軍事革命法院)에서 소위 혁명방해죄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수모를 겪었다. 1921년 11월 15일 코민테른 감사위원회의 결정으로 오명을 씻고 출옥한 그는 치타로 가서 한글잡지인 『새사람』의 주필이 되었으나, 이동휘가 꼬르뷰로(高麗局)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이동휘를 따라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전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 주요 도시의 각급 학교에서 민족교육과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국학(國學) 연구 및 교과서 편찬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국민학교용 역사교과서, 1924년에는 원동(遠東) 행정당국의 위임으로 국민학교용 우리말 독본인 『붉은 아이』를 각각 편찬하였고, 1924년 1월부터 6월까지 블라디보스톡 제8호 중학교에서, 1926년 8월부터 1930년 3월까지는 블라디보스톡 노동학원에서 『대한문전(大韓文典)』 등 한국어를 교수하였다. 1930년 중학교용 교과서를 편찬한 그는 그 해 5월부터 1933년 4월까지 하바로프스크대학에서 모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1931년에는 『고려인의 구력과 명절의 미신』을 저술·간행하였다. 그리고 1933년 봄부터 1935년까지 극동 스파스크 즈비야기노 소재의 국민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쳤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북프로호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고려어 교과서』를 편찬·간행하는 등 1921~1937년까지 연해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국어국문학과 한국사에 괄목할 만한 업적과 저술을 남겼다. 특히 이 시기 『조선역사』1·2권과 『동학당폭동(東學黨暴動)』 등 대표적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937년 소련내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그는 광복 후 북한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도 거절한 채 생을 마감할 때까지 22년 동안 크즐오르다에서 모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조선문법(朝鮮文法)』·『조선역사(朝鮮歷史)』 등을 집필하여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연구·보급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26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38·7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14·90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331·427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68·73·79·82·83·93·10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62·179·181·356·357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37면
  • ·현대사자료(강덕상) 제27권 195·196·313면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준엽·김창순) 제1권 114·193·199·201·211·227·268·278·283·300~302·341·355면
  • ·한국학연구(인하대학교) 제5권 별집 동학당폭동 해제(윤병석) 158·159면
  • ·한국학연구(인하대학교) 제5집 별집 리동휘 성재 선생(리영일)
  • 인하사학 제1집, 계봉우의 생애와 저술목록(윤병석)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95·3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190면
  • 동아일보(계봉우의 생애 햇빛 1993. 4. 1)
  • 소련의 한인들―고려사람(유네스코한국위, 1990) 계봉우年譜(고송무)
  • 카자흐스탄 및 중앙아세아 한국학 소식 계봉우 선생의 후손들(고송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계봉우 호 北愚, 뒤바보, 四方子, 檀仙 함경남도 영흥군 洪仁面 南出里 89 3.1운동,
본문
1880년 8월 1일 함경남도 영흥(永興)의 관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7세부터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사기(史記)를 읽었다. 15세부터 24세까지 10년 사이 동학에 입교하기도 하고, 정감록(鄭鑑錄)·점술·사주·관상법 등과 함께 병서(兵書)도 공부하고, 도인(道人) 최통 선생을 찾아 헤매거나 정도령을 찾아 백두산 일대를 뒤지는 등 청소년 시기를 방황하며 보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 체결 소식과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읽고 마음을 잡았다. 1906년 10월 김정규(金正奎)·권영호(權永鎬) 등과 함께 영흥에 홍명(洪明)학교를 설립하고 한국의 역사, 지리와 한문을 가르쳤다. 1908년 기독교를 받아들여 1910년에는 함흥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영생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1908년에는 도쿄 유학생 출신들이 만든 태극학회에 가입하여 영흥지회를 결성하였다. 이동휘의 영향으로 영흥에는 대한자강회와 서북학회 지회가 설립되었고,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이동휘의 권유로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1년 1월 정창빈·오영선·장기영·도용호·김하구 등 이동휘의 추종자 30여 명과 ‘기독교 포교’라는 명목으로 대거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북간도 소영자(小營子)에 위치한 광성학교(길동기독학당)에서 한국 역사와 조선지지(朝鮮地誌)를 가르쳤다. 아울러 청년 단체인 청년친목회(靑年親睦會)와 대동협신회(大東協新會)에 가입하였는데, 특히 대동협신회의 기관지인 월간잡지 『대진(大震)』의 책임주필로 활약하였다. 1912년 『조선역사』(중등부 교재)와 수신(修身) 역사 교과서인 『오수불망(吾讐不忘)』과 『신한독립사』를 저술하여 대동협신회에서 발행하였다. 이동휘 등이 1911년경 북간도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광복단(光復團)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광성학교가 운영자금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자, 1913년 가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자치기관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여 기관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1914년의 러일전쟁 10주년에 대비하여 이동휘·이종호·정재관·이동녕·이상설 등이 1913년 10월 말 11월 초 무렵에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책임비서로 제1대 이상설, 제2대 정도령(正都領)인 이동휘 등과 함께 항일 광복 전쟁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권업신문』에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1914년 6월 28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하여 『권업신문』이 폐간되는 8월 29일까지 1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는 동맹국이 된 러시아 정부에 이동휘 등 36명의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러시아에 의해 이동휘·이종호·이동녕·정재관 등 20명과 함께 추방되었다. 이후 다시 북간도 왕칭현(王淸縣) 하마탕(蛤螞塘)으로 도피하였다. 하마탕에는 이동휘의 부친인 이승교 등 가족들을 비롯하여 구춘선·김학규·임병극 등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로 중일간에 전운이 감돌자 이동휘·이종호·정재관의 주동으로 중국과의 연합을 통한 대일 전쟁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15년 5월 9일 원세개(袁世凱)가 일본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이 계획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강력한 요구를 받은 중국 당국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1916년 11월 당시 중러 국경지대를 순방하며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던 이동휘가 하마탕에 돌아와 있었다. 이동휘는 부인 강정혜의 생일 10월 29일을 맞아, 훈춘에서 왕칭현 하마탕으로 이사한 가족과 동지들과 해후하려고 하마탕에 와 있었다. 21개조 타결 이후 룽징(龍井) 일본 총영사관은 이동휘의 하마탕 방문 정보를 입수하고, 6,7명의 형사를 급파하였다. 이들은 하마탕의 이동휘 본가를 덮쳤으나, 동네 청년들의 제보로 이동휘는 미리 탈출하였다. 이때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회령으로 압송되어 헌병분대에 인도되었다. 일제의 퇴거 처분을 받아 국내로 압송된 후 치안법위반으로 영종도에서 1년의 금고를 산 후, 고향 영흥에서 3년간의 거주 제한 처분을 받았다. 3·1운동이 발발하기 전인 1918년 12월 고향 영흥에서 거주 제한을 받고 있던 중 함남 덕원에서 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姜基德)을 만나 서울에서 항일운동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 수속을 밟는다는 핑계로 2월 27일 서울로 올라가 남문(南門) 안 봉래정의 신학생 숙소인 신행여관에 머물렀다. 이때 거사 일이 바뀌어 3월 1일 1시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제2의 만세 시위운동 지휘책임자였던 강기덕의 요청에 따라 세브란스병원 밀실에서 선언서 초안을 집필하여 건네주었다. 3월 3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참관한 후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가 영흥으로 귀환한 후 원산에서 망명 계획을 부탁한 바 있는 차장로(車長老)를 찾았다. 차장로의 소개로 강우규(姜宇奎)를 만나 훗날 사이토 총독 폭탄 투척 사건의 공모자가 되는 최자남(崔子南)을 소개받고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9년 8월의 일이다. 신한촌에 며칠 머무는 동안에 철혈광복단(철광단)에 가입하였고, 모친 등 가족들을 만나려고 북간도 하마탕을 방문하였다. 1910년대 민족운동 당시 동지들이 주도하는 북간도 국민회와 연계를 갖게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위해 유례균과 함께 상하이로 파견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으로부터 단장으로 선임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북간도에 20일 정도 머문 뒤인 1919년 11월경 북간도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떠났다. 철혈광복단 단장에 취임하기 위해서였다. 도착 당일 단장 취임식이 거행되었는데, 취임식은 노령의 국민의회가 상하이임시정부에 통합되는 것을 반대하던 일부 단원들이 그의 상하이행을 저지하고자 기획한 회의였다. 당시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국민의회간에는 승인 개조 분쟁으로 당초의 통합 합의 협약이 깨지고 일부 철광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반대와 국민의회 복설이 추진되고 있었다. 결국 국민회의 임시정부 지지 입장과 철광단의 반대 입장이 맞서는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아니지만, 지지하는 다수 의견에 따라 상하이행을 취하였다. 1919년 11월 26일 상하이에 도착한 이후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 독립운동사 재료수집원, 『구국일보(救國日報)』 기자로 활약하였다. 상하이 도착 직후부터 활발한 문필활동을 하는데 『독립신문』 주필인 이광수의 청탁에 따라 1920년 1월부터 5월에 걸쳐 거의 매호에 걸쳐 민족운동에 관한 매우 중요한 글들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즉, 계봉우는 ‘사방자(四方子)’라는 필명으로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4회, 1920.1.1 1.10, 1.13, 1.22) 발표를 시작으로,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아령실기(俄領實記)」(8회, 1920.2.26, 3.4, 3.13일, 3.18, 3.25, 4.1, 4.3), 「김알넥산드라소전(小傳)」(3회, 1920.4.17, 4.20, 4.22), 「의병전(義兵傳)」(7회, 1920.4.27, 4.29, 5.1, 5.6, 5.8, 5.11, 5.15)을 각각 발표하였다. 1920년 4월 19일 임시정부가 서간도 파송원으로 선정하였다. 안정근과 이탁은 북간도 파견원이 되었다. 그러나 서간도로 떠나지 않고 파견원 직을 사임하였는데, 한인사회당 활동에 전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오랜 동지이자 의형제인 이동휘의 소개로 『구국일보(救國日報)』 주필 황각(黃覺, 黃介民)이 주도하던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대동단은 “국가 평등, 인종 평등, 세계 평등”의 이념을 가진 단체였다. 황각은 일본 유학 중인 1915년 말에 김철수·윤현진·장덕수 등의 한국 유학생들, 그리고 대만의 팽화영(彭華榮) 등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일체의 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 또는 신아동맹단)을 조직한 인물이다. 1920년 4월 김립의 권고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사회주의 신수(社會主義 神髓)』를 읽고 사회주의에 처음으로 접하고 곧바로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였다. 한인사회당에 입당하면서 기관지 『자유종(自由鐘)』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에 「경성노동회에 대하여」(1920.5.27)를 기고하였는데 사회주의적 인식이 반영된 글이라 할 수 있다 한인사회당 대표로 국제공산당에 파견되었던 이한영이 약간의 선전 자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상하이의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1920년 9월 초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당의 명칭을 한인공산당으로 개칭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개편하였다. 이동휘는 한인공산당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김립은 이한영·김만겸·안병찬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인사회당선동출판부는 『신대한독립보』를 개칭한 신문 『신생활』과 『자유종』을 개칭한 잡지 『공산』을 출판하는 한편, 『공산당선언』을 번역·발간하였다. 대회에서 김립·이한영과 함께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 등 러시아로 파견할 대표로 선정되었다. 김립은 당의 결정에 따라 국무원비서장 직을 사임하였고, 후임에는 이동휘의 사위인 오영선이 취임하였다. 김립과 이한영 보다 하루 늦은 9월 23일 보이틴스키가 이르쿠츠크의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보내는 밀서를 휴대하고 9월 23일 상하이를 떠났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이한영이 동반하기로 하였지만, 하루 사이에 당간부 결정이 바뀌어 이한영은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복귀하였다. 1920년 12월 2일 치타에서 7인의 지역대표가 참가하여 개최한 한인공산당 중임(重任) 당원회의에 상하이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원동부(달이뷰로, 원동공화국 수도 치타 소재) 소속의 한인부의 5인 위원으로 박애, 김진, 박창은, 장도정과 함께 선출되었다. 의장으로서 한인부의 간부를 선출한 이 회의를 주재하였는데, 한인부 위원과 한인부 규정집 작성을 위한 3인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인부는 “전한공산당 립대회가 정식으로 소집될 때까지 조직 업의 권한을 떠맡기로 하였다. 1921년 1월 16일에 열린 한인부 정기회의에서 박애·장도정과 함께 3인으로 구성되는 간부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선전선동출판부장에 선임되었다. 한인부의 선전선동출판부장으로서 1921년 2월 한인부의 기관지인『노동신문』을 창간하였고 제2호를 3월에 간행하는 등 매월 4회 간행하였다. 그러나 『노동신문』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극동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탄압으로 인하여 폐간되고 말았다. 이르쿠츠크파는 슈미아츠키가 이끄는 동양비서부의 일방적 후원으로, 5월의 전한고려공산당대표대회 준비위를 한명세·남만춘·이성·채성룡·김철훈 등 자파 일색으로 조직함과 동시에 참가 대표들에 대한 자격심사권을 확보함으로써 상하이파의 대회참가 여지를 박탈하였다. 이르쿠츠크파의 남만춘은 동양비서부장 슈미야츠키의 명령을 받아 치타의 한인부를 해산하고, 하바롭스크에 있는 한인 공산 기관들을 해산하였으며, 장도정·김진·오성묵 등 한인공산당위원회에서 발간하던 기관지 『신세계』를 폐간시켜 대표 파견과 활동할 권리를 박탈하였다. 슈미야츠키의 지도하에 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5월 4일에서 17일에 걸쳐 제1차 고려공산당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중국과 국내에서 32개의 공산주의 단체와 8,730명(1,880명은 현역당원, 나머지는 후보당원)을 대표한 83명이 참석하였다. 이 가운데 64명만이 표결권을 갖고 대회에 참여하였다. 특히 상하이에서 김만겸·안병찬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40만 원 자금 문제로 이동휘·김립 등의 한인사회당 측을 반대한 인물들이었다. 대회는 동양비서부의 슈미야츠키가 모든 진행을 지도하였다. 대회 폐회 후 다음 날인 5월 18일 고려혁명군정의회와 동양비서부가 합동 회의를 개최하고 위원제의 임시고려혁명법원을 조직하였는데, 한인부 위원 4인에 관한 사건을 처리하려고 구성한 것이다. 이들 한인부 간부들은 원동부의 명령을 받고 한인부 문부들을 송부한 5월 9일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5월 16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들의 체포와 압송은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가 주관한 것이었다. 동양비서부는 이어 5월 15일 상해파의 군사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 흑하 지방(마사노프)에 있던 김규면·한운용·박원섭·우시욱·주영섭·안태국·임상춘 등 13인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흑하 지방 현지의 친상해파적인 러시아 정치보안부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1921년 5월 18일 한인부 간부들은 김철훈·채성룡·채동순 3인의 취조를 받았고, 5월 22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이성·김철훈·채성룡으로 구성되었고, 변호인은 한규선이었다. 검사 백운학은 박애에게 사형, 나머지 3명에게는 세계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금고를 구형하였다. 재판부는 박애에게 8년, 나머지 3인에게는 각각 5년 형을 선고하였다. 이어 8월 8일 소비에트러시아 제5군단과 동시베리아군대 혁명법원에서 감형되어 박애는 5년 징역, 나머지 3인은 3년의 징역 형을 선고받았다. 이동휘·박진순·홍도로 구성된 고려공산당 대표단이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전개한 외교 활동 덕분에 석방되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 양파 대표단의 입장을 검토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은 검사위원회로 하여금 제반 사실과 문건들을 검사하게 하여 5개 항으로 된 국제공산당 검사위원회 결정서」(1921.11.15)을 작성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시참변을 조사할 유력한 검사위원을 선출하여 동양비서부에 의해 체포되어 있는 박애 등을 석방하여 모스크바로 파견할 것, 자유시참변으로 투옥된 80여 명 가운데 검사위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는 곧바로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검사위원회가 상하이·이르쿠츠크 양파 동수로 구성하도록 결정한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의 실권은 이동휘와 홍도에게 넘겨졌다.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 이동휘와 홍도가 이르쿠츠크를 방문하게 되자 이르쿠츠크파는 그 이전에 한인부 간부들로부터 ‘자과(自過)에 대한 회개’를 받아내고자 하였으나 이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고 12월에 서둘러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석방된 후 치타에서 조선인 청년회 잡지 『새사람』의 주필로 활약하였다.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상하이·이르쿠츠크 양파 고려공산당의 통합대회가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개최 전날인 10월 18일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 제1차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상하이와 이르쿠츠크 앙파의 연합 간부와 주요 활동가들이 각각 9명씩 18명과 지도원으로 러시아공산당원 3명이 참석하였다. 상하이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대회에는 북간도 옌지현 대표로 의결권을 갖고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선출된 ‘통합고려공산당’의 중앙간부 10명에 포함되었는데, 신간부는 이동휘·홍도· 밀양·김아파나시·윤자영·장기영·김진·성예완·김철수였다. 꼬르뷰로(고려중앙국 또는 고려총국)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된 1922년 말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 머물면서 국내와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되기까지 교육, 집필 그리고 반종교·무신자 운동을 통한 한인 사회의 사회주의적 건설 과정에 주력하였다. 활발한 집필 활동은 원동에서 『선봉』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레닌기치』에 게재된 기고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923년 이만 ‘고려인회’의 촉탁으로 원동 조선인 소학교의 『조선력사』를 저술하였다. 1924년에는 연해주 학무국의 지정으로 일급학교용 한국어 독본 『붉은 아이』를 편찬하였다. 1924년 1월부터 6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제8호 중학교에서, 1926년 8월부터 1930년 3월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 노동학원에서 한국어를 교수하였다. 1930~1931년에는 초급중학교용 고려어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그해 5월부터 1933년 4월까지 하바롭스크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1933년 봄부터 1935년까지 극동 스파스크 스비기야노 소재의 국민학교에서 고려어를 가르쳤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북프로홀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1937년에는 강채정과 공저로 원동변강국립출판부에서 『고려어 교과서』를 편찬·간행하였다. 한인 사회의 문화적 볼셰비키화를 위해 활약하였다. 한인 사회에 남아 있던 종교와 전통적인 미신과 관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1929년 블라디보스토크현 당간부 선전과의 승인을 받아 오성묵과 함께 무신(자)동맹을 조직하였다. 고려인무신동맹의 요청을 받아 반종교운동의 근거자료로서 『고려인의 구력과 명절의 미신』을 저술하였다. 교육 문화 사업을 통한 한인 대중의 볼셰비키화 과정에서 두 개의 중요한 논쟁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하나는 1930년 11~12월에 오창환과 주고받은 『고려문전』 논쟁이고, 또 하나는 한자폐지론-한자제한론 논쟁이다. ‘고려문법통일에 대한 협의회’에서 한글 문법에 대한 협의와 토론을 거쳐, 오창환의 이론에 따라 저술한 『고려문전』을 비판하자, 오창환이 반박하는 형식으로 논전이 전개되었다. 한자폐지론은 1927년부터 시작된 ‘고려문자라틴화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한글라틴화운동’과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한자폐지 반대론. 한자제한론은 계봉우와 장도정이, 한자폐지론은 이괄과 이백초가 제기하였다. 1930년대에 집필한 주요 저술은 『과학의 원수』(1930), 『동학당폭동(東學黨暴動)』(1932), 『조선역사』1~2권(1936), 3권(1953), 『고려어교과서』(1937, 강채정과 공저) 등이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조선말의 되어진 법』(1941), 『조선문법』(1947~1948), 『조선문학사』 1~ 2(1950)을 집필하였다. 『꿈속의 꿈』(1940~1944)은 특히 혁명 운동 시기에 이름들을 밝히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1921~1922년의 기간에, 그리고 그 이후 얼마동안 치열하였던 동족상잔의 파쟁에 대한 회한과 환멸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된다. 1936년 1월 28일에 작성한 계봉우의 「이력서」에서 ‘교육 사업’이나 ‘저작 사업’의 경우 1935년까지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 혁명 사업’의 경우에는 1920년 3월에 베르흐네우진스크로 들어간 사실까지만 기록하였다. 그 이후 시기에 계봉우의 활동이 교육과 문화저술 활동에 치중한 것도 사실이나 1920년 말 이후 1922년 말까지 보여주었던 활발한 혁명 활동에 비하면 의외라 할 것이다. 조선공산주의 운동에 완전히 손을 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활동의 무게중심이 교육·언어·민속·종교 등 소비에트러시아에서의 한인들의 사회주의적 개조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력서」를 남긴 1936년 1월 28일의 시점에 주목해 보자. 이때를 전후로 한 시기에 상하이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아파나시(1936년 1월 24일 체포)·김미하일·문현(1935년 11월 18일 체포)·최태열(1935년 11월 4일 체포)·홈파(이민환, 1936년 1월 21일 체포)·박일리야(1936년 1월 21일 체포), 이인섭(1936년 3월 20일 체포) 등이 체포되고 있었다. 스탈린 대탄압의 그림자가 닥쳐올 것이라고 예상한 것일까.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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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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