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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월 22일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고지면(古之面) 대룡리(大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원석(圓石)이다. 이명으로 조성호(趙聖浩)·조양원(趙養元)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동필(金東弼) 등과 같이 대한13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 명의로 을사5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동지 박정빈(朴正彬)·우병렬(禹炳烈)·이진룡(李鎭龍)·박장호(朴長浩)·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이어 경의선 계정(鷄井)과 예성강 연안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이진룡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남만주로 망명하여 홍범도·윤세복(尹世復)·차도선(車道善)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해 창바이현(長白縣)·푸숭현(撫松縣)·린장현(臨江縣)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동포를 규합해 항일사상 고취와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해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하고, 애국청년들을 만주로 불러들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16년 10월 이진룡과 협의하여 포수단의 황봉선(黃鳳善)·황봉운(黃鳳雲)·김원섭(金元燮)·김일(金鎰)·김효선(金孝善) 등과 함께 군자금 확보를 위해서 평북 운산(雲山)에 진입하였다. 미국인이 운영하는 금광회사의 송금차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18년 1월 차도선·신봉황(申鳳荒) 등과 함께 무링현(穆陵縣) 팔면통(八面通)에 충의사(忠義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동지 규합과 병기 입수에 진력하였다. 그해 4월에는 남북만주 전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진영을 통합해 대규모 독립군단으로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만주 각 독립운동단체, 의병장·유림대표·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 등 500여 명을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에 모았다. 3일간의 회의 끝에 종전의 단체를 모두 해체시키고 1919년 3월 13일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라는 단일 기관을 조직하고 총단장에 선출되었다.
독립단 위치는 싼위안푸 다화셰(大花斜)였다. 대한독립단 임원은 부단장 최영호(崔永鎬), 총무장 김원섭(金元燮), 서기장 현병근(玄炳瑾), 검찰장 김중화(金仲和) 등 수십 명이었다. 퉁화현(通化縣)·싱징현(興京縣)·린장현·지안현(輯安縣)·환런현(桓仁縣)·콴뎬현(寬甸縣) 등에 지방지부를 두었다.
중앙에서는 내외지(內外地)에 의연금을 모금하고 청년들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확충하였다. 지방에서는 100호 이상으로 구(區)를 정하여 매구에 관구(管區)를 두었으며, 10구마다 단장을 두어 자치 행정을 실시하였다. 각 구에 건장한 청년으로 검찰대(檢察隊)를 편성하여 전투시를 대비하게 하였다. 매호에 1원 50전을 배당하여 해당 지방의 경상비(經常費)로 지출하며 연말에 이를 청산케 하였다.
대한독립단 총단장으로 각 간부들과 명의로 「대한독립단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해 간 교활한 술책 과정들을 복기하고,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의 신성한 자손’인 대한의 2천만 동포가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기가 없거든 목검을 들고, 목검을 깎을 겨를이 없거든 맨주먹으로 일어나서 왜적을 물리치자’는 결연한 문장으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일깨웠다.
아울러 대한독립단의 국내진입 활동을 총지휘하면서 군자금 모집, 단원 모집 및 일제 앞잡이 처단 등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원칙, 즉 대한독립단의 통칙(通則)을 마련하였다. 통칙에 의하면, 대한독립단 본부인 총재소(總裁所)는 류허현 싼위안푸에 두고, 서울-도-군·면에는 전국 중앙기관-총지단(總支團)-군면지단(郡面支團) 설치를 계획하였다.
국내 조직은 군자금 모집과 함께 만주에 있는 본단이 군사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건너올 때에는 일제히 내응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방청년으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郡)에는 중대(中隊, 200명), 도(道)에는 대대(大隊, 400명), 중앙에는 연대(聯隊, 800명)를 설치하고, 이들 중 용감한 사람을 선발하여 암살단(暗殺團)과 방화대를 조직하여 유사시 활동하도록 계획하였다.
1920년 2월 콴뎬현 향로구(香爐溝)에서 독립군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대한독립단은 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義勇軍事議會)·한족회·대한청년단연합회 등 만주 일대의 군사기관들과 함께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직할의 광복군사령부로 개편되었다. 광복군사령부가 설립되자, 광복군 사령장(司令長)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창설된 광복군총영(總營)을 지도하였다. 여순근(呂淳根)·이탁·김승학(金承學)·유응하(劉應夏)·박이열(朴利烈)·홍식(洪植)·양기하(梁基瑕) 등과 함께 일본 경찰주재소 습격, 일제 경찰 처단 등 무력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3월 만주 지안현에서 체포될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당시 보민회장(保民會長) 최정규(崔晶圭)가 최제우교도(崔濟愚敎徒) 16명, 중국 순경 8명을 대동하고 한국인의 귀순을 종용하기 위해 순회 중이었다. 그러던 중, 지안현 패왕조(覇王槽)에 모여 있던 한국인들과 충돌하자, 관헌들은 한족회원 등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박장호(朴長浩)와 함께 있다가 은밀히 피신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같은 해 8월에는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자 대한독립단 총단장 명의로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고, 그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1년 4월 5일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의 이병택(李炳鐸) 외 수 명이 광복군총영에 가입하자, 이들에게 권총 7정, 탄약 420발, 경고문을 주고 파견하였으나 활동 중 순천경찰서에 붙잡혔다. 그해 말에는 광복군 사령장 명의와 참리부장(參理部長) 조병준(趙秉準)이 발급한 경상남북도 특파원 신임장을 안해용(安海容)에게 발급하고 국내로 밀파하여 국내 청년들의 망명을 돕도록 지시하였다. 안해용은 특파원 신임장을 지니고 대구(大邱)·안동(安東)·예천(醴泉)·상주(尙州)·칠곡(漆谷)·성주(星州)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1월 23일 상주경찰서에 잡히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조병준·안해용·김옥명·이덕생·이수건 등과 함께 송치되었다.
그러나 송치된 이후 상황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사망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일설에는 1922년 지린성(吉林省) 수이푼(秋風)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독립신문』 보도에 의하면, 1920년 2월에 중요한 임무를 띠고 러시아로 가 있다가 서거하였다는 설, 또 한편으로는 니콜리스크(蘇王營)에서 몽골 울란바토르(庫倫) 지방에 갔다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살해를 당했다는 설 등을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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