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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4월 20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생림면(生林面) 생철리(生鐵里)에서 태어났다. 1904년 7월 하와이로 이민 오기 전 경남 밀양(密陽)에 거주하였고, 동갑내기 아내와 사이에 조대흥·조오흥 두 아들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 조대흥은 1917년 콜로라도 에톤에서 농사를 경영하다가 귀국하여 충남 온양(溫陽)에서 정흥순과 결혼한 뒤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1925년 미국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동생 조오흥을 비롯하여 안재창·정양필(鄭良弼) 등과 함께 자본금 2만 달러의 정안회사(鄭安會社)를 설립하고 찹수이 제조 도매상을 하는 등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차남 조오흥(曺五興)은 1914년 한인소년병학교를 졸업하고 경영학을 전공한 뒤 미국 회사 매니저로 일하였으며, 1925년 형과 함께 정안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을 하였다. 1929년 3월에는 디트로이트에서 동지회(同志會)를 조직하고 총무가 되었다. 1934년 유학생 김매리와 약혼하였다. 1935년 말 김매리가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초빙되어 귀국하자, 6개월 후 뒤따라 귀국하여 이화여전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김매리는 「학교종」의 작사·작곡자이자 김규식의 사촌동생이다.
1904년 7월 18일 가족 다섯 명과 함께 차이나(China) 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그후 가족을 하와이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미 본토로 건너왔다. 1905년 9월경 박용만(朴容萬)과 박희병(朴羲秉, 본명 朴章鉉)의 주선으로 네브라스카주 링컨시 동남부에 위치한 테이블 록(Table Rock)의 철도공사장에 취직하였다.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사건이 일어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는 장·전 의사의 재판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한인공동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한인공동회를 위해 5달러를 후원하였다.
1908년 겨울, 박용만이 한인군사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박처후(朴處厚)·임동식(林東植)과 상의한 뒤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농장을 마련하여 생도들이 기숙할 곳을 정하고 미 육군이 사용하던 군용총을 매입하여 군기(軍器)를 마련하였다. 이때 박용만으로부터 농장을 관리·경영할 책임자로 초빙되었다. 이즈음 그의 농장은 커니시 중심부에 있는 재판소에서 약 2㎞ 떨어진 곳에 있었고, 멀지 않은 거리에 임동식의 농장도 있었다. 이러한 준비 끝에 1909년 6월 초순, 커니시에 해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가 창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학기 중에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 여름방학 때 입소하여 평균 8주의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로서 수학과정은 3년이었다. 생도들의 일과는 오전에는 밭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군사훈련, 저녁에는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한인소년병학교 개교 첫 해, 13명의 한인이 입학하여 임동식의 농장에 기숙하며 아침에는 임동식과 그의 농장에서 밭일을 하고, 군사훈련 역시 그의 농장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그도 “나이 비록 늙었으나 왜놈을 대하여 총을 쏘기는 늙은이의 총알도 젊은이의 총알만치 뜨겁다”고 하면서 최고령으로 입학하여 어린 학생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0년 4월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대학의 협조로 한인소년병학교는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그해 6월 두 번째로 개교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가 이전하자, 그 역시 헤이스팅스로 주거를 옮겨 임동식·유은상(柳殷相)과 함께 농장관리자로 일하였다. 또한 하와이에 있던 두 아들도 미 본토로 오게 하여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두 아들은 1910년 7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그중 둘째 아들 조오흥은 11살의 나이에 헤이스팅스의 초등학교를 다니며 여름방학 때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1년 8월 임동식·박처후·유일한·정한경·김용성·김일신·구영숙·이관수 등과 함께 소년병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또한 1911년에는 유은상과 80에이커의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소년병학교 재원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2년 8월에는 아들 조오흥이 한인소년병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오흥은 홍승국·이정수와 함께 졸업후에도 2년을 더 다녀 특별증서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가 6년째 되던 1914년에 들어 유지가 어렵게 되자, 그해 2월 2일 헤이스팅스에서 김유성·신형호·안재창·정양필 등 29명과 소년병학교 유지단을 조직하고 「소년병학교 유지단 취지서」와 「소년병학교 유지단 규칙」을 발표하면서 재정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해 여름, 일본측이 헤이스팅스대학에 항의하는 바람에 소년병학교는 6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한인소년병학교가 문을 닫은 후 1915년 1월 1일 소년병학교 후원자와 졸업생인 안재창·임동식·신형호·박처후·한시호·박장순·이명섭·홍승국 등과 더불어 한인농업회사 취지서를 발표하고 콜로라도주 웰도 카운티 갈레턴에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던 중, 1916년 오마하의 세인트 조셉병원에서 신병을 치료하다가 12월 6일 오전 11시 사망하였다.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는 그를 평하여 한인소년병학교의 설립 “그날부터 오늘까지 소년병학교와 흥망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정부는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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