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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2월 18일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에서 태어났다. 일제 측 자료에서는 본적지가 경성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후손들은 연해주 지방 하연추(下煙秋, 下延秋, Нижний Янчихe)에서 한 옐리세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명으로 이노켄티 엘리세예비치(Иннокентий Елисеевич)라는 러시아식 이름이 있다. 연해주 지역 항일무장투쟁 지도자였던 한창걸(韓昌傑)의 동생이다.
유소년기 중국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한 뒤 2년제 고등학교를 마쳤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한창걸과 함께 제정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듬해인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Brest Litovsk Treaties)을 체결하여 독일제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군이 유럽 동부전선에서 물러날 때, 하급소위(прапорщикъ) 계급으로 군대를 전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징집에서 해제되어 연해주 수청(水淸. Сучан) 지역으로 돌아온 후 농업에 종사하며 촌회 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교사로 활동하며 항일 민족교육에 힘썼다. 1918년 10월 중순 이후 수청지역에서는 백위파군과 체코슬로바키아군의 구원을 명목으로 러시아 원동지역에 파견된 일본군을 비롯한 국제간섭군에 저항하는 비합법적인 활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1918년 말 수청지역 한인사회 인사들은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명의로 ‘한인부’를 조직하고 ‘독립군의병대’ 조직에 착수했다. 이때 한창걸(韓昌傑),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한인부’ 조직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연락을 맺고 한인 군대를 재조직했다. 1919년 11월 18~19일 러시아 사회혁명당(에스.엘, Партия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 СР)과 멘셰비키(Меньшевики)의 지원을 받은 체코군 사령관 가이다(Rudolf Gaida)가 주도한 반(反)로자노프(Розанов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봉기에 참여했다. 이는 문창범(文昌範), 한명세(韓明世) 등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들이 군사 정변을 조직해 승리한 후, 한인 부대를 조직해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제안했던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로자노프의 방첩 특무기관에 체포되어 일제 군대에 넘겨져 옥고를 겪었다. 1920년 1월 30일 러시아 혁명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하기 하루 전인 1920년 1월 30일 감옥에서 풀려났다.
석방된 이후 한창걸을 따라 연해주 지역에서 1922년 원동해방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철수한 이후 교직에 복귀하였고, 1926년에는 소련 공산당원으로서 연해주 수청지역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1928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蘇王嶺, 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ий, 현 우수리스크) 사범전문학교 주임, 1933년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역 인민교육부 주임 등의 직위를 역임하였다.
1937년 11월 1일 내무인민위원부에 의해 러시아공화국 형법 제58-6조에 규정된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되었다. 1938년 4월 15일 원동변강 지방내무인민위원부 트로이카 판결로 최고형인 총살형과 모든 개인 재산 몰수 재산형을 선고받고, 5월 11일 형이 집행되었다. 1958년 6월 5일 연해주 법원 간부회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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