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836
성명
한자 李희경
이명 권희경, 권혜경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02 훈격 건국포장
1928년 영남부인실업동맹회를 결성하고 이후 간부로 활동하고, 1940년대 초 부인구제회의 호노루루지방회의 대표로 활동하고, 1930년대 말부터 광복하기까지 대한인국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수십 차례에 걸쳐 총 수백여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북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창립된 하와이 부인단체의 통일기관인 대한부인구제회(大韓婦人救濟會) 회원으로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전쟁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집·제공하였으며, 애국지사 가족들에게 구제금을 송금하는 등 구제사업을 전개하였다.

그후 1928년 영남(嶺南) 출신 이극로(李克魯)가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체류하여 국어강연을 할 당시, 이승만(李承晩)이 이극로를 폄하하면서 영남지역 멸시 발언을 하자, 경상도 출신 부인들과 함께 대한부인구제회를 탈퇴하였다.

탈퇴후 1928년 9월 2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김보배·박금우·곽명숙·박정숙·이양순 등과 함께 영남부인회(嶺南婦人會)를 조직하였다가 후일 영남부인실업동맹회(嶺南婦人實業同盟會)로 개칭하여 회장을 역임하면서 15년간 한인부인사회의 발전과 독립운동 후원, 재미한인사회의 구제사업 활동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독립금과 중경특파원(重慶特派員) 경비, 의연금, 부인구제회 의무금, 혈성금, 중국구제금, 승전후원금, 군사금 등의 각종 의연금과 군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1940년대 초반에는 부인구제회(婦人救濟會) 호놀룰루지방회 대표로서 부인구제회 승전후원금 모집위원, 부인구제회 사료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회원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총 수백여 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國民報(1937. 11. 10, 1938. 5. 18, 8. 24)
  • 太平洋週報(1942. 12. 9, 1943. 3. 3, 3. 17, 5. 5, 6. 6, 8. 11)
  •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장부(독립기념관 소장)
  • 在美韓人五十年史(金元容, 1959) 238面
  • 國民報-太平洋週報(1943. 8. 25, 1944. 3. 29, 4. 5, 5. 17, 8. 30, 12. 13, 1945. 2. 28, 4. 11)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희경 - 경북 대구 -
본문
1894년 1월 8일 경북 대구 명치정 2정목(현재 중구 계산동 2가)에서 전주 이씨 이종하와 김정원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금례(李今禮)이며, 하와이에서 이희경(李熙卿)으로 바꾸었으며, 한때 이혜경을 사용하다가 다시 이희경으로 바꾸었다. 1912년 대구 신명여자학교 제1회로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꿈꾸며 권도인(1888∼1962, 당시 25세, 하와이 이민자, 경북 영양 출신)의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심하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 가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사진신부가 된 것이었다. 남편 권도인은 17살이던 1905년 2월 13일 시베리아호를 타고 하와이에 와서, 호놀룰루에서 가구 제조 기술을 배워 자립하고, 사진혼인을 통해 이희경과 결혼하였다. 권도인은 이희경과 결혼하기 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1910년 하와이 콜로아 지방 대한인국민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가난한 신혼살림을 시작하여 떡과 잡채·산적 등 음식을 만들어 팔아 10만 달러를 모았다. 1918년 말 돈을 휴대하고 네 살된 맏딸(권정숙)을 데리고 친정 부모를 뵈러 귀국길에 올랐다가 소지한 미화가 세관에서 적발되어 돈을 몰수당하고 수감되었다. 3·1운동 소식도 옥중에서 들었고, 2년 후 석방되어 하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 부부의 사업 아이템은 한국에서 쓰던 대나무 발에서 착안한 커튼이었다. 이 커튼은 옆으로 펼치는 대나무 발에 아름다운 그림까지 넣어 하와이 날씨에 잘 어울리는 제품이었다. 하와이에서 시작한 사업은 샌프란시스코에 공장을 세울 만큼 성장했다. 부부는 가구사업을 통해 번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놓았다. 권도인과 이희경이 희사한 독립운동 자금의 전체 규모를 알 수는 없지만, 1935년 이후 해방 때까지 『국민보』에 실린 금액만 해도 1만 달러가 넘었다. 그녀는 대한부인구제회에서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집·제공하고, 애국지사 가족들에게 구제금을 송금하는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28년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1928년 이극로가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길에 하와이에 들려 국어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극로를 폄하하면서 영남지역을 멸시하는 발언을 하자, 대구 출신이었던 그녀는 대한부인구제회를 탈퇴하고, 1928년 9월 2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경상도 출신 부인들과 영남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영남부인회는 실업 발전과 동포 간의 친목 증진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표방하였다. 영남부인회는 곧 영남부인실업동맹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남부인실업동맹회의 활동은 하와이 한인 여성들의 경제활동에 큰 밑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회장을 역임하며, 15년간 한인사회 내 여성단체의 발전과 독립운동 후원, 재미한인사회의 발전과 국내외 구제 사업에 공헌하였다. 나아가 1940년 12월 하와이한인여성상의회 조직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후반에는 독립금과 중경특파원 경비·의연금·부인구제회 의무금·혈성금·중국구제금·승전후원금·군사금 등 각종 의연금, 군자금을 모금 지원하였다. 1940년대 초반에는 부인구제회 호놀룰루지방 대표로서 승전후원금 모집위원 및 사료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도 수백여 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40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두 아들을 참전시키는 한편, 전시공채 구입에도 적극적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바로가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이희경(관리번호:96083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