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771
성명
한자 車美理士
이명 金美理士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2 훈격 애족장
미국으로 건너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발기하고 『대동(大同)』신문의 발간에 기여하였으며, 1910년부터 1920년까지 배화학교의 사감(舍監)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朝鮮女子敎育會)를 설립하여 학교교육『강연』기고 등을 통하여 여성의 각성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을 도모하였으며, 1927년 근우회(槿友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실(事實)확인(確認)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 선진문화를 습득하고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5년부터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간 뒤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활동을 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유홍조, 이병준 등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조직하였다. 대동교육회는 국망을 예견하고 해외에 나와 있는 한인들끼리 나라를 구하는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교육기관이었다. 대동교육회는 북미 파사디나에서 조직되었으며 장경희가 회장을 맡은 단체였다. 그는 대동교육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동교육회가 대동보국회로 발전할 때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대동신문의 발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7년 미국선교회에서 파견하는 선교사로 귀국한 후 배화학교(培花學校) 교사와 사감(舍監)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배화학교 사감으로 있으면서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 당해 봤지. 나 한 목숨이 죽고 나라를 찾으면 대대손손이 다 살게 아닌가!"를 역설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3·1 운동 이후에는 조선여자교육회(朝鮮女子敎育會)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조선여자 교육회는 여성의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1920년 1월에 조직한 것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배화학교 사감을 그만두고 예배당을 빌려 여자야학을 실시해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계몽에 헌신하였다. 또한 근화학원(槿花學院) 설립에 참여하였으며,『여자시론』이란 잡지를 발행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전국순회강연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차미리사는 무궁화를 사랑해서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교정에 무궁화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자수시간에도 무궁화를 수놓도록 했다고 한다. 광복후에는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해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在美韓人50年史(김원용) 89面
  • 東亞日報(1921. 2. 21, 3. 14, 3. 27, 5. 2, 5. 19, 5. 21, 7. 10, 7. 16, 7. 17, 7. 19, 7. 21, 7. 25, 7. 27, 8. 8, 11. 8, 1927. 4. 27)
  • 祖國을 찾기까지(최은희) 中卷 74, 142∼14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51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차미리사 김미리사(金美理士), 김멜리사 서울 마포(麻浦) -
본문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이명은 김미리사(金美理士)·김멜리사 등이다. 1879년 (음)8월 21일 한성부 서부 고양군 공덕리(孔德里)에서 아버지 차유호(車柳鎬)와 어머니 장씨(張氏) 사이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 1880년생으로 되어 있다. 1895년 17세에 서울 무교동 김진옥(金振玉)과 혼인하여 출가하였다. 1897년 남편이 딸 하나만을 두고 사망하자, 고모의 권유에 의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감리교파 상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교회의 선교사에게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아 이후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김미리사로 활동하였다. 1901년 선교사 헐버트(Hulbert)의 주선으로 중국 쑤저우(蘇州)로 유학하여 감리교파 중서여숙(中西女塾)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약 4년간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격렬한 뇌 신경병에 걸려서 그 후유증으로 귀가 어두워져 평생 고생하였다. 1905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0월경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12월 로스앤젤레스 부근 패서디나(Pasadena)에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 1월 대동교육회가 확대 개편하여 출발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의 발간에도 관여하였다. 같은 해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건너오는 한인 노동자들을 위해 숙소, 직업 알선, 전도 활동 등의 사회봉사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재미 한인사회 활동가로서 봉사하였다. 1908년 1월 대동보국회 제3차 중앙회 대의회에서 상의원에 선출되었고,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선사업에 힘써 여성사회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최초의 재미한인 여성단체 한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1910년 8월 미주리주 캔사스(Kansas)시 스캐리트 성경학원(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하였다. 1912년 7월 성경학원을 졸업하고 8월 선교사 자격으로 귀국하여 서울 배화학교(培花學校)의 사감과 교사로 취임하였다. 1919년 9월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종다리예배당(현 종교교회)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하고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계몽에 진력하였다. 또한 그해 (음)12월 30일(양력 2월 19일) 여성의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조선여자교육회(朝鮮女子敎育會)를 발기한 후 다음날 창립하여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3월 조선여자교육회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배화학교를 사임하였다. 이 무렵 잡지 󰡔여자시론(女子時論)󰡕을 조선여자교육회의 기관지로 인수하여 제2호 발간을 시작으로 일제에 의해 폐간당하는 1921년 4월까지 제6호를 발간하였다. 1921년 5월 조선여자교육회 회관을 청진동에 마련한 후, 전국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전국순회강연을 실시하는 등 여성교육과 민족의 실력양성을 역설하였다. 1922년 1월 조선여자교육회 명칭을 조선여자교육협회로 변경하였고, 3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발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부인야학강습소 명칭을 근화학원(槿花學院)이라 명명하고 주간부를 신설하여 교육의 중심을 야학에서 주간으로 변경하고, 이후 설립자이자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다. 특히 무궁화를 사랑해서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교정에 무궁화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자수시간에도 무궁화를 수놓도록 하여 무궁화사랑운동을 전개하였다. 근화학원은 1925년 8월 근화여학교로 정식 인가, 1934년 2월 재단법인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정식 인가 등으로 변화·발전하였다. 1927년 4월 근우회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36년부터는 ‘차미리사’라는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8년 10월 ‘근화’라는 교명이 불온하다는 이유 등으로 조선총독부의 강요로 근화여자실업학교에서 덕성(德成)여자실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40년 8월 나이가 많고 일본어를 못하므로 황국신민화 정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에서 사퇴하였다. 해방 후 1946년 1월 풍문여고 강당에서 열린 반탁치(反託治)여자대회에 참석하였고, 1948년 4월 김구의 남북회담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동참하였다. 1950년 여성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여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을 설립하였다. 1952년 1월 덕성여자대학 이사장을 사임하였다. 1955년 6월 1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유언으로 ‘온전한 독립을 못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6월 3일 덕성여자중고등학교 교정에서 학교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우이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차미리사(관리번호:960771)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