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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694
성명
한자 李昌輝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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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01 훈격 애족장
1943년 LA에서 민족지 『독립』의 발간에 참여하여 운영경비로 230여원 이상의 기부를 하였으며, 『우리의 당연한 임무』, 『단결을 향한 한 걸음』 등의 기고를 통해 민족의식의 고취와 민족단결을 촉구하였고, 1944년 10월 군사운동촉진위원회(軍事運動促進委員會)를 조직하여 그 서기로서 독립을 위한 군사활동을 촉구하였으며, 1945년 2월 40대 중반의 나이로 군대에 입대하여 OSS 소속으로 번역과 해석 활동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한 사실이 확인(確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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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강원도 이천(伊川) 사람이다.

1927년 남감리교 연희 주일학교부에서 서무와 번역, 잡지 편집 등에 종사하였으며, 1930년 5월 도미하여 1937년 봄까지 내쉬빌에서 학업에 전력하였다. 1937년 학비 부족으로 귀국하고자 내쉬빌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농장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본국의 친우들에게 국내 취직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총회(大韓人國民會總會, 일명 北美大韓人國民會)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종사하였다.

1941년 2월 중국 한구(漢口)에 있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후원할 목적으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美洲後援會)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편입된 후, 1943년 1월 회명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미주지부(美洲支部)로 개칭하고 김원봉(金元鳳)의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회원이었던 그는 1943년 9월 김성권(金聖權)·변준호(卞準鎬)·최능익(崔能益)·김강(金剛) 등과 더불어 기관지 {독립}을 발기하고 독립신문사 이사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10월 {독립}이 창간되자, 230여원 이상의 운영경부를 의연하는 한편, [조선사람의 기원], [독립신문사가 탄생되기까지], [우리의 당연한 임무], [단결을 향한 한 걸음(One step To Our Unification)], [연합회와 학생회 문제], [인도 국경에서 연합군은 실패인가], [타협은 어느 정도까지], [국제정세와 독립신문], [군사운동비 모집에 대하여] 등의 기고를 통해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단결을 촉구하였다.

1944년 로스엔젤레스의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일본어교수로 재직하면서 동년 10월 재미한인사회의 군사운동(軍事運動)을 확대 강화하기 위하여 군사운동촉진위원회(軍事運動促進委員會)를 조직하여 동 위원회 서기로서 독립을 위한 군자금 모집과 군사활동을 촉구하였으며, 1945년 2월 14일 40대 중반의 나이로 미국 군대에 입대하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미국전략첩보국)에 소속되어 훈련을 받은 뒤, 중국 서안(西安)에서 활약 중이던 이범석(李範錫) 장군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2지대에 파견되어 주로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등의 정보문서 번역요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전쟁을 후원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도미하여 동년 11월 28일 제대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NAPKO PROJECT OF OSS(國家報勳處) 127·716面
  • 동포사랑 가슴에 안고-이창휘선생 유고 및 회고의 글-(김준, 1997), 20∼22面
  • 독립(1943. 10. 6, 10. 27, 12. 22, 1944. 1. 5, 2. 16, 3. 1, 4. 13, 4. 19, 6. 7, 9. 6, 10. 25)
  • OSS 除隊證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창휘 - 강원 이천(伊川) -
본문
1902년 3월 15일 강원도 이천(伊川)에서 태어났다. 1927년 남감리교 연희 주일학교에서 서무와 변역, 잡지 편집 등을 맡았다. 1930년 5월 미국으로 건너가 1937년까지 내쉬빌에서 학업에 매진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단하였다.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귀국할 기회를 엿보다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1937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가입하였고, 1943년 1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미주지부로 개편하자 이에 가입하였다. 1943년 9월에는 『독립』신문사를 세우고 이사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10월 기관지 『독립(Korean Independence)』을 창간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운영 경비 명목으로 230여 달러의 의연금을 내기도 하였다. 또 「조선사람의 기원」, 「독립신문사가 탄생되기까지」, 「우리의 당연한 임무」, 「단결을 향한 한 걸음(One step To Our Unification)」, 「연합회와 학생회 문제」, 「인도 국경에서 연합군은 실패인가」, 「타협은 어느 정도까지」, 「국제정세와 독립신문」, 「군사운동비 모집에 대하여」 등의 글을 기고하여 국제정세 분석과 독립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44년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대학의 일본어 교수로 재직하며, 10월에는 재미한인사회의 군사운동을 강화할 목적으로 군사운동촉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서기를 맡아 군자금 모집에도 앞장섰다. 1945년 2월 14일 40세를 넘긴 나이로 미국 군대에 입대한 뒤 미국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에 소속되어 훈련을 받았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활동 중인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파견되어 일본어와 중국어·영어 등의 정보 문서 번역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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