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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466
성명
한자 張琴煥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9 훈격 애족장
1904년 하와이로 이주, 1909년이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군도 국구유라 지방회(地方會) 부회장(副會長)과 하라학가지방(地方) 평의원,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하와이지부 당원(黨員) 등을 역임하였으며, 광복시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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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평남 안주(安州) 사람이다.

미주 하와이 지방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하와이지부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하와이로 이주한 장금환은 한인사회의 발전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군도 국구유라지방회의 부회장과 하라학가 지방회 평의원을 역임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합성협회(合成協會)가 발전적으로 통합한 국민회(國民會)가 1910년 5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탄생한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중앙총회 아래 북미·하와이·멕시코·시베리아·만주 등 다섯 곳에 지방 총회를 두었으며 다시 지방총회 아래 116개의 지방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는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했던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의사를 돕기 위한 운동에 적극 참가하면서 지원금 마련에 노력하였다. 이후 그의 독립운동 자금 의연활동은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1940년「국민보(國民報)」에 게재한「금일 우리의 급선무」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우리의 대과업이 독립전쟁에 있으며, 조국 독립의 달성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1944년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 당원으로 중국 중경의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하여 지원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國報(1909. 3. 30, 5. 4, 6. 8, 1910. 5. 4, 5. 10)
  • 義務金收納帳簿(1913. 5. 19, 7. 23)
  • 國民會寄附金 帳簿(1934. 7. 1, 1935. 2. 1, 1935년, 1940년, 1941. 1. 1, 1942. 2. 22)
  • 國民報(1914. 5. 2, 1937. 4. 1, 8. 11, 9. 20, 9. 22, 12. 15, 1938. 3. 9, 6. 1, 1942. 3. 25, 4. 8, 4. 29, 7. 17, 9. 9, 1943. 5. 5, 8. 11, 1944. 4. 12, 6. 14)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장금환 - 평남 안주(安州) 해외한족대회
본문
1883년 5월 27일 평남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1904년 하와이로 이주한 이후 행상(行商)을 하여 끝내 지역유지로 성장하였다. 1908년 장인환·전명운 의거 때 후원금과 변호사 비용 모금에 동참하였다. 1909년 3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국구유라 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5월에는 카우아이(Kauai) 하라학가 지방회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11월 카우아이 후라이아 지방회 구제원으로 피선되어 한인동포들 경조사에 앞장섰다. 논설과 연설활동에도 참여하였는데, 1910년 10월 󰡔신한국보󰡕에 「금일 우리의 급선무」는 논설을 실어 해외동포의 대사업이 독립전쟁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도적의 물건’이 되어버린 조국의 현 상황을 “자유 독립국이었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하면서 “대한제국 독립만세의 영광을 위한 해외동포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3년 12월에는 국민회의 첫 교육사업으로 카우아이 콜로아(Koloa)지방에 세워지는 한글학교인 신흥학교 설립에 연조하는 등, 지역 유지로서 교육비를 비롯하여 한인들의 호상비·이재동포 위로금·구제금 등을 꾸준히 후원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3·1운동 기념금을 지속적으로 모금하였다. 1932년 하와이로 건너온 현순(玄楯) 목사의 「상해진상」 연설로 윤봉길 의거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정부후원회를 조직, 재정을 모집하였다. 이때 와히아와 지방후원회에서는 1년에 12원(圓)씩 내기로 동참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지원한 하와이애국단(愛國團)은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로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그도 당원이 되어 한국광복군 창설과 충칭(重慶)특파원 경비 및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1945년 5월에는 상항회의(桑港회의, 샌프란시스코회의) 한국대표 지원에 특연을 보냈고, 독립을 맞이할 때까지 독립금 명목으로 의연을 계속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조국과 하와이 한인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6년 호놀룰루에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을 새로 건축할 때, 국민회 청년위원으로 회관 이전·수리 및 설비 비용 등을 연조하였다. 1963년 1월 29일 신병으로 입원 중 사망하였다. 하와이 누우아우(Nu’uanu)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02년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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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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