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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9월 27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북계동(北溪洞)에서 아버지 권하일(權河一)과 어머니 김봉주(金鳳周)의 3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두 동생은 명규(命圭)와 상규(商圭)이다.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에는 본적이 경북 안동(安東)으로 되어 있으나, 「제적등본」에는 영양으로 되어 있다. 부모를 비롯한 동생 가족들은 1918년 영양에서 경북 군위군(軍威郡) 소보면(召保面) 위성동(渭城洞) 으로 이사하였다. 1912년 10월 이희경(李熙卿)과 혼인하여 장녀 정숙(마가렛, 1916년생), 장남 영만(1923년생), 차남 영철(1926년생), 막내딸 정희(에스터, 1928년생) 등 2남 2녀를 두었다. 부인 이희경도 하와이 이주 후 1919년 대한인부인구제회 회원을 시작으로 1928년 영남부인회와 영남부인실업동맹회 회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등 활동을 펼쳐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만 17세이던 1905년 사이베리아(Siberia)호를 타고 2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이민국 입국 기록 자료에 의하면 이름은 영어로 ‘Kwen, Do In’, 나이는 18세로 기혼(married), 마지막 거주지는 ‘Kern Pyeng’으로 되어 있다. 하와이 도착 후 카우아이(Kauai)섬에 있는 콜로아(Koloa)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어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성년자였던 탓에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다고 한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소식을 듣자, 미주 한인 사회에서는 안중근을 돕고자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이때 국민회(1910년 5월 대한인국민회로 개칭) 하와이지방총회에서도 의연금을 모집하자, 콜로아에서 의연금으로 1달러를 기부하였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일당은 하루 10시간씩 일하면 남자의 경우 67센트를 받았던 시절이었다.
1910년 9월 4일 하와이지방총회 콜로아지방회 임원 교체 시 회장으로 선출되어 지방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사탕수수 농장의 낮은 임금에서 벗어나려고 4년여 동안 일하던 콜로아를 떠나서 도시인 호놀룰루로 이주하였다. 이주 시기는 1910년 말경 또는 1911년으로 추정된다.
호놀룰루 시내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1912년 10월 이희경과 결혼하였다. 이희경의 본명은 이금례(李今禮)로 1912년 5월 대구의 사립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를 1회로 졸업한 뒤, 그해 10월 ‘사진신부(Picture Bride)’로 하와이로 건너왔다. 당시 하와이 한인 사회는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 온 홀아비들이 많아 술과 도박 등 문제를 일으키자, 한인 사회 안정을 꾀하기 위해 국내 처녀들과 혼인을 추진하였다. 거리상 대면할 수 없자 서로 사진을 보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당시에는 ‘사진신부’라 하였고, 경상도 출신 여성들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1,000여 명이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결혼 후 호놀룰루에서 가구점을 운영하며 사업가로 성공하였다. 발명에 특재를 가져서 미국 정부의 특허를 얻어 독점 판매권을 소유하였던 상품이 여러 가지였다는 훗날 그의 장례식 추도사를 미루어 보면 여러 사업을 벌였던 것 같다. 다만, 1920~1936년 사이 하와이 한인 자료가 없는 관계로 활동을 살필 수 없다. 자료상 독립운동 활동은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하와이국민회에 전쟁 비용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하와이국민회는 즉시 혈성금(血誠金) 모집에 착수하였다. 임원이자 재무를 맡아 활동하던 때라 비상근무를 하며 혈성금 모집에 앞장섰다. 또한, 8월 27일 하와이국민회가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을 체계적으로 후원하려고 찬무회를 조직하자, 찬무회에도 참여하였다. 찬무회는 후방의 참모부 성격을 표방하고 산하에 재무부·선전부·기밀부를 두었다. 이때 재무부를 담당하며 고덕화·임성우·정운서와 함께 혈성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1937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이하 하와이국민회) 총임원 선거에서 실업부원으로 선출되어 한인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다. 2월 3일 하와이국민회 총임원회에서 청년회 세칙(細則) 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고, 4월에는 하와이국민회 예비회원의 세칙을 기초한 데 이어 국민회 재무에 만장일치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7년 8월 하순 하와이국민회와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同志會)가 임시정부 후원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합동을 추진하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두 단체의 합의로 그해 10월 합동결의안을 추진하기 위해 각기 5명의 위원을 선정하였다. 이때 위원장 정봉관(鄭鳳觀)을 비롯하여 정인수(鄭仁洙)·한길수(韓吉洙)·김원용(金元容) 등과 함께 국민회 교섭위원으로 선정되어 여러 차례 회의에 참석하는 한편 「국민회·동지회 통합에 대한 기원」이라는 성명서에 서명하는 등 활동을 하였으나 의견 불일치로 중단되었다.
1938년 3월 하와이국민회는 총임원회에서 호상제도 확장을 의결하였다. 이 의결에 따라 그해 6월 새로 확장된 호상부에서 부원 5인 중 1인으로 활동하였다. 호상제도는 하와이 한인 사회 내 홀로 지내는 노인이 증가하자, 이들의 노후와 장례를 준비할 복지제도를 확장한 것이다. 1938년 12월에는 한길수의 외교 활동을 돕고자 명목상 존재하던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을 새롭게 조직하자, 차신호(車信浩)·최선주(崔善周)·최창덕(崔昌德)·민찬호(閔贊鎬)·정봉관 등과 함께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9년 4월 김원봉(金元鳳)의 군사 활동을 지원하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북미 지역에서 조직되자 후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41년 4월 호놀룰루에서 9개의 한인 단체 대표가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연합회 대표 자격으로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후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후원회로 변경된 이후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9월 하와이 한인들이 국방공채위원회를 조직할 때 회장 양유찬과 함께 부회장에 선임되어 전시공채 구입과 국방헌금 기부 등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1943년 1월 국방공채위원회는 한미공채위원회로 개칭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도 공동으로 1944년까지 약 70만 달러의 미국 국방공채를 매입하는 성과를 이뤘다.
개인적으로는 5,200달러에 달하는 공채를 구입하였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국방공채금과 한미승전후원금 등을 포함해 각종 의연금 명목으로 출연한 금액은 총 8,210달러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자원하여 민병대에 참가하여 운전수가 되어 트럭을 몰고 물자를 공급하였다. 이때 하와이대학교 ROTC였던 장남 영만과 보이스카우트 출신의 차남도 입대시켰다.
1945년 1월 하와이국민회 대의회에서 카우아이 라나이 지역 참의원으로 선출되어 광복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6월 20일 한미문화협회가 발족하자, 부재무로 참여해 한국 도서와 한국 도서대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직후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비자 발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포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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