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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960023
성명
한자 崔善周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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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4 훈격 애족장
1909년 3월 미국(美國) 하와이에서 국민회(國民會) 가마이 지방회 사찰, 동년 11월 니지매 지방회 서기 겸 학무원, 1914년 3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힐로구역 경찰부장, 1920년 2월 재무 겸 서기에 선임되어 활동함.
1923년 3월 호항한인공동회 발기인, 1925년 4월 조미구락부(朝美俱樂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28년 5월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제1차 대회에서 한인단체의 통합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고, 1930년 3월 하와이 한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동년 4월 와히아와 지방의 독립금 모집을 주선하고, 1934년 3월 와히아와 삼일절 기념식을 주관함.
1935년 10월 이후 국민회(國民會)동지회(同志會) 통합문제의 중개인, 1937년 2월 국민회 사료수집위원, 1939년 2월 한중동맹단(韓中同盟團) 부단장,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 주필로 활동하고, 1942~1943년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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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09년부터 1943년까지 국민회(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 한미구락부 및 한인협회,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 skpl) 등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산하 가마이지방회 사찰, 니지매지방회 서기 겸 학무원, 1914년 하와이 힐로구역 경찰부장, 1920년 하와이지방총회 재무 겸 서기, 1923년 호놀룰루(호항) 한인공동회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오운(吳雲)과 함께 조미구락부(朝美俱樂部)를 조직하고,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제1차 대회에 와이아와 대표로 참석하여 한인단체 통합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1930년 3월 하와이한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34년 3월에는 와히아와지방 3ㆍ1절 기념식을 주관하였다. 1935년 10월 이후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同志會)의 통합 중개인, 1937년 2월 하와이국민회 역사편찬 사료수집위원, 1938년 12월 중한민중동맹단의 부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주필을 역임하였으며,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고정휴, 2009) 제54권 135, 137, 143~144면
  • 鮮人國民會 布?地方總會 內部紛爭에 관한 報告의 건(1920. 2. 2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4)
  • 海外要注意鮮人連名簿(日本外務省)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제8집 733, 763, 772면
  • 新韓國報(1909. 3. 16, 11. 9)
  • 國民報(1914. 3. 4, 3. 21, 1937. 2. 10, 1942. 9. 23, 10. 7)
  • 新韓民報(1928. 6. 7, 1930. 3. 13, 4. 3, 1934. 3. 15, 1935. 10. 31, 1939. 2. 16)
  • 太平洋週報(1942. 5. 13, 1943. 4. 14, 8. 11, 8. 12)
  • 대한인국민회 결의문(독립기념관 소장)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최선주 崔善宙, 영어명 : Choi, Sun Choo 평남 평양(平壤) -
본문
1886년 8월 15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출생연도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하와이 이민국 자료에 의하면 1905년 당시 19세, 『신한민보』에는 1928년 환갑, 그리고 사망진단서에는 1886년으로 되어 있다. 이명은 최선주(崔善宙), 영어명은 Choi Sun Choo이다. 1902년 12월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 노동이민이 시작되자, 시베리아(Siberia)호를 타고 1905년 5월 8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 미혼이었다. 1909년 북미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통합하여 미주 한인의 최고기관인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자, 한인합성협회는 하와이지방총회(布哇地方總會)로 개편되었다. 1909년 2월 하와이지방총회 산하 학갈나 가마이지방회 통상회에서 사찰(査察)로 선임되어 함께 선정된 회장 이만수, 부회장 김사옥 등과 함께 지방회를 이끌었고, 5월 공동회 기부금으로 50센트를 기부하였다. 같은 해 7월경 니지매로 이전하여 10월 니지매지방회 통상회의 임원 선거에서 서기 겸 학무원으로 선임되었다. 1913년 5월 박용만(朴容萬)과 하와이지방총회 임원들이 하와이주정부에 하와이지방총회를 법인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이 관허(官許)로 하와이지방총회는 하와이 한인자치기관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특별경찰권까지 허락받았다. 이에 따라 1914년 3월 하와이지방총회 산하 힐로구역 경찰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경찰부장 재임시 일본인이 거짓으로 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을 퍼뜨리자, 일본인을 불러 사실 여부를 조사한 뒤 하와이 법정에 기소하려 하였다. 이에 일본인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한인(韓人)의 자치헌장에 의해 판결을 받겠다고 호소하자, 그의 죄상을 꾸짖고 벌금 25달러의 처분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경찰부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당시 재학 중이던 힐로포팅스쿨에 퇴학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학교 교장과 교사들이 만류하고 오히려 학비까지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부득이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 김종학(金鍾學)에게 사면청원서를 제출하고 경찰부장을 사임하였다. 1920년 2월 하와이지방총회 제13회 대의회(代議會)에서 재무 겸 서기로 당선되어 회장 이종관(李鍾寬), 부회장 김광제(金光濟)와 함께 지방총회를 이끌면서 국민의무금 등 각종 독립운동자금을 거둬 지방총회 재정을 충원하였다. 1923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개편을 둘러싸고 독립운동 각 단체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국내의 이상재(李商在)·최남선(崔南善)·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박영효(朴泳孝)·강매(姜邁) 등은 해외 각 단체에 「경고(敬告) 해외각단서(海外各團書)」를 발송하여 임시정부 옹호 등 4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이 경고서를 받은 하와이 호놀룰루(일명 胡港) 거주 한인들이 3월 11일 호놀룰루한인공동회(胡港韓人共同會)를 개최하자, 민찬호(閔贊鎬)·차신호(車信浩) 등과 함께 한인공동회에 참석하였다. 한인공동회가 「내지(內地) 경고서에 대한 공동회 발기문」을 작성·발표하여 임시정부 옹호 등 4개 조항 준수를 결의하였다. 1925년 4월 하와이 오아후(Oahu)섬 와히아와(Wahiawa)에서 오운(吳雲)·현도명(玄道明) 등과 함께 조미구락부(朝美俱樂部)를 조직하여 한인 1세와 2세 간 상업과 사교를 장려하였다. 1928년 5월 호놀룰루(胡港) 인근 누아누(Nuaanu) 기독청년회운동실 광장에서 대한민족통일촉성회(大韓民族統一促成會) 제1회 대회를 개최할 때, 와히아와 지방 대표로 참석하여 한인단체 통합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즈음 최창덕(崔昌德)과 함께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실업가로 손꼽혔다. 1930년 1월 말, 하와이 조용하(趙庸夏) 등이 국내의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 소식을 접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촉진할 목적으로 1대 주의와 3대 정강(政綱)을 내세우며 취지서를 발송하였다. 안원규(安元奎) 등 29인은 발기문에 서명한 후 제1차 발기회(창설회)를 소집하였다. 발기회의 목적은 하와이 한인의 정치기관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봉대(奉戴)하기 위함이었다. 2월 안원규의 집에서 열린 발기회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분열된 민족운동단체를 통합하자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3월 하와이 한인협회가 조직되었는데, 여기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3월 3.1절을 맞이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특별기념금을 거두어 독립기본금으로 삼자는 소식을 접하자, 와히아와 지방 한인들에게 적극 권유하여 매달 1인당 1달러의 독립금을 저축하도록 하였다. 1931년 8월 이승만 친위세력인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기관지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에 김원용(金元容)과 김현구(金鉉九)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으며, 김현구에 대한 비판의 글은 9월까지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하였다. 1934년 3월 와히아와지방에서 두 교회와 합동으로 3.1절 기념식을 개최하고 기념식을 주관하였다. 1935년 10월 조병요(趙炳堯)·김성옥 등과 함께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同志會)의 통합을 위해 중개인으로 나서, 두 단체의 담화회에서 사회를 보며 담화회를 열고 통합을 중재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중립적 인사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1937년 2월 하와이국민회 총임원회에서 하와이 한인역사 편찬을 위해 사료를 수집하기로 결정하자, 정두옥(鄭斗玉)·박상하(朴相夏) 등 38명과 함께 사료수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하와이에 라디오기계상회(Radio Appliance Company)를 개점(開店)하고 미국 최고의 회사인 R.C.A.와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 제품을 판매하였다. 판매제품은 냉장고·세탁기·라디오·피아노·가스오븐 등과 그 부속품이었고, 이외에도 레코드판을 만들어 판매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하와이 한인사회의 중립인사로 꼽히는 민찬호(閔贊鎬)·최창덕(崔昌德) 등과 함께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同志會)의 합동을 주선하였다. 이후 국민회와 동지회는 몇 차례 비공식 회의를 개최한 결과, 1938년 8월 하와이국민회의 요청으로 동지회와 제1차 합동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총회관에서 열린 합동회의에는 동지회 중앙부장 김이제, 상무원 김광재, 국민회 총회장과 부회장, 중립인사측 3인 등 13인이 참석하여 합동방침을 강구하였다. 이 합동회의에 민찬호·최창덕과 함께 중립인사 대표로 참석하여 8월 국치기념일 행사를 국민회와 동지회 합동으로 거행하고 합동 절차를 계속 토의하기로 의결하였다. 1938년 4월 『태평양주보』에 글을 실어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하와이 한인 1,000명이 각각 60달러씩 총 6만 달러를 모금하여 외교·항공술 연마·역사 편찬에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호놀룰루에서 한길수(韓吉洙)의 외교 활동과 순행 강연을 후원하기 위해 민찬호·차신호·최창덕·권도인(權道仁)·서재근(徐載根) 등과 함께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 Sino-Korean People’s League)을 발기·창립하였다. 1939년 당시 부단장으로 선임되어 창립 임원인 워싱턴 D.C 대표 한길수, 회장 차신호, 비서 최창덕, 재무 서재근 등과 함께 중한민중동맹단을 이끌었다. 1939년 호놀룰루에 위치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평신도대표회 제20회 회의에 참석하는 한편, 『태평양주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1940년 7월 호놀룰루와 와히아와 거주 한인들과 합동상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 이원순, 부사장 차신호, 재무 최창덕, 이사 현도명·안현경·안원규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0월 한인연합위원회를 조직하고 안원규·현순·김원용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5월부터 10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독립금 60달러를 의연하였고, 7월 와히아와에 있는 히캄 비행장(Hickam Air Force Base)에서 세탁소를 새로 개설하여 영업하였다. 1943년 4월부터 8월까지 전시공채 200달러, 한미승전후원금 100달러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같은 해 9월 그의 부인은 전후한국구제위원회(戰後韓國救濟委員會)에 한국구제금 100달러를 기부하였고, 1946년 11월 부인과 함께 국민총회관 건축을 위한 특연금 50달러를 기부하였다. 1947년 10월 호놀룰루 여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한미문화협회 총회에 참석하여 협회 산하 하와이지방회 임원을 선출하였다. 1949년 2월 몇 년 동안 활동이 정지된 와히아와구락부를 부흥시킬 목적으로 이사원·송성균·오필모·오혜근·문덕만·임성우 등과 함께 이사회를 결의하고 3월 구락부 회관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1954년 동지회 회원이자 『태평양주보』 이사원, 와히아와 기독교 평신도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동지회 중앙부 상임 이사원으로 선임되었고, 동지회 호상부 탁사회 탁사로도 활동하였다. 1957년 1월 동지회 중앙부 임원 선거에서 『태평양주보』 주필로 선임되었다. 1959년 4월 하와이 한인 2세 고국방문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하였다. 1960년 2월 동지회 중앙부 이사원으로 선임되었고, 4.19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을 비난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이승만을 옹호하였다. 1961년 2월 동지회 총무, 1962년 동지회 이사원, 1964년 동지회 상무원 등으로 활동하다 1971년 3월 11일 호놀룰루에서 별세하였다.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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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소재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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