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자료에 따르면 1904년 2월 22일 태어났다. 출신지는 알 수 없다. 윤성덕과 결혼하여 1943년 1월 28일 딸을 낳았다. 윤성덕은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의 동생이다. 윤성덕은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음악과를 졸업한 뒤 동교(同校)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1926년 8월 시애틀에 도착하였다. 그후 일리노이주 에반스톤 노스웨스트대학 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고, 1927년 시카고한인학생총회에서 활동하였다. 대학 졸업후 1929년 8월 이화여전 음악교수로 부임하여 귀국하였다. 1937년 10월 다시 도미하여 1938년경부터 뉴욕에 거주하였고, 1940년부터 뉴욕한인음악구락부 고문, 뉴욕지방회, 뉴욕한인부인구제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미국 전략첩보국(OSS)의 보고에 의하면 1919년 도명(道名) 미상 고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21년 도명(道名) 미상 순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한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1924년 2월 7일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에서 중국 난징(南京)의 협진회관(協進回關)에서 개최한 제10회 원동대회(遠東大會)에 비단우(非團友)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주요한(朱耀翰)과 한 팀이 되어 축구경기를 치렀고, 희락회(喜樂會)에도 참석하여 바이올린을 합주하였다. 또한 1920년대 전반기에는 중국 3대 사관학교로 명성이 높았던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위치한 육군 강무당(講武堂)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1926년 6월 8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 도착하였다. 1927년 사우스 다코타주(South Dakota)의 휴론대학(Huron University College)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고, 곧바로 미네소타대학에 입학하여 1932년 재학 중이었으나, 졸업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1939년 11월 12일 미국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뉴욕지방회 지방대회에서 1940년도 임원을 선거하자, 재무로 선임되어 집행위원장 조극(趙克) 등 새 임원진과 함께 지방회를 이끌었다. 1940년 3월 뉴욕지방회 재무로서 인구세와 기타 공금 수합을 위해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같은 달 28일에는 뉴욕지방회에서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의 식자기계 구입을 위한 의연금 모집을 돕기 위해 권연문을 발표하자, 의연금 모집 수합을 담당하였다. 그해 4월 7일 뉴욕 재류 한인 청년 16인이 뉴욕한인교회에서 음악 장려, 사교 친목, 지식 교환을 위해 뉴욕한인음악구락부를 조직하자, 임배세·박이근과 함께 검사위원으로 선임되어 운동·희락(喜樂)·댄스·하이킹 등의 활동을 하였다. 5월 19일 뉴욕한인음악구락부 주최로 음악대회를 개최할 때, 음악대회에서 「사자수」란 노래를 독창하였다. 5월 26일에는 뉴욕지방회에서 이동녕(李東寧) 선생 추도식을 거행하자, “한국 광복을 위한 선생의 사적, 반 만 년 내려오는 역사에 영원히 살아지이다”라는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그해 6월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6월 27일 뉴욕지방회 회원들과 모여 광복군을 후원하기 위한 자금을 수합하여 송금할 것을 의결하였다. 1940년 12월 1일 뉴욕지방회장 조극의 사회로 열린 뉴욕지방회 전체대회에서 명년도 임원을 선거하자, 서기 겸 사교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2월 서기직은 사임하고 사교부 위원직만 수행하였다. 그해 12월 10일 김호(金乎)가 뉴욕에 도착하자, 국민회 영접위원으로 임창영·윤성덕 등과 영접하였다.
1941년 1월 12일 뉴욕지방회 1차 통상회에서 국민회 창립 기념식 일체를 주관하게 하자, 2월 뉴욕지방회 주최 창립 32주년 기념식을 주관하는 한편, 기념식 이후 만찬회를 부인과 함께 준비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1942년 1월에도 뉴욕지방회 사교위원으로 활동하면서 2월 국민회 창립 33주년 기념식을 주관하였다. 특히 기념식 직후에는 1941년 말 뉴욕에서 『송 오브 아리랑(Song of Arirang)』을 출간한 저자 님 웨일즈와 그의 남편 에드가 스노우를 초청하여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한 강연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만찬회를 준비하여 담소하였다. 그해 6월 뉴욕의 한인단체인 국민회·동지회(同志會) 등이 결성하였던 뉴욕한인연합회에서 재무로 활동하던 박이근이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하자, 박이근의 뒤를 이어 뉴욕한인연합회 재무로 선정되었다. 1942년 7월 뉴욕한인연합회 주최로 시국강연회가 개최되자, 연합회 재무로서 강연회에 참석하여 “대동단결하여 국사에 노력하자는 것과 물질을 다하여 재미한족연합회를 돕자”는 당부를 하였다. 그해 11월에도 뉴욕지방회 사교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1월 뉴욕지방회 선전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자, 1월 17일 뉴욕지방회에서 8년간 서기로 일한 최창수의 미 육군 입대를 위한 종군만찬회를 열고 음악구락부 대표로 축사하였다.
1944년 10월 초 미국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약칭 OSS) 뉴욕지부 반 할시(Van R. Halsey)가 첩보국에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한국인들과 인터뷰하자, 함용준 등 4명과 함께 면담하였다. 이때 할시로부터 한국어를 비롯한 일본어·영어·중국어 북부 방언까지 유창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11월 1월 미 육군에 지원하자, 곧 바로 OSS의 한인훈련부대(Field Experim ental Unit)에 배속되어 1945년 2월부터 로스앤젤레스 연안에 위치한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약 3~4개월 동안 고된 훈련을 받았다. 냅코(Napko)작전으로 불린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한인훈련부대(FEU)가 받은 훈련은 주로 첩보·파괴·암호 교육 등이었고, 교육 수료 당시 전체 평균은 86점이었다. 이 작전에는 유일한(柳一韓)·이태모(李泰模)·이초(李超)·박기벽(朴基闢)·변일서(邊日曙) 등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훈련 직후 한국 연안에 침투하기 위한 모의 훈련으로 다른 부대원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침투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모든 훈련을 마치자,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한국 연안에 침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이 작전은 종결되었다. 그리하여 1945년 9월 13일 병장으로 OSS를 전역하였다. 1945년 10월에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의 행적은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국민회 의무금으로 20달러, 『신한민보(新韓民報)』 대금으로 10달러, 『신한민보』 식자기계 의연금으로 10달러, 광복군 후원금으로 5달러, 독립금으로 120달러 등 수 십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정부는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