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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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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慈惠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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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4 훈격 건국포장
191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주한인부인회 대표, 1923년 구미위원부 재무, 오클랜드 대한여자애국단 지부 단장, 1927년 부인전도회 회장, 1929년 부인저금회 회장 및 오클랜드지방회 재정부위원, 1931년 중가주공동회 오클랜드지방 선전부장, 이후 1945년까지 오클랜드지방회 대의원, 수전위원, 국민회 오클랜드대표 등으로 활동했으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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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에 신한부인회가 조직되자, 5월 18일 한인부인회 대표로 신한부인회 임원들과 8월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대한여자애국단을 설립하였다.

1923년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새크라멘토 지방 재무, 1924년 대한여자애국단 오클랜드지부 단장, 1927년 부인전도회(婦人傳道會) 회장, 1929년 대한인여자저금회 회장, 오클랜드지방회 재정부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2월 조선여자대학 기부금 협찬 발기인, 10월 대한인국민회총회 오클랜드지방 선전부장으로서 일본상품 배척을 위한 선전비를 모집하였다. 이후 오클랜드지방회에서 1936년 대의원, 1938년 구제원, 1940년 집행위원장, 1941~1944년 대표원, 1945년 구제위원, 1939~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오클랜드지부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民報(1919. 2. 13, 5. 13. 5. 27, 7. 26, 10. 9, 1923. 3. 15, 9. 27, 1924. 3. 20, 1926. 12. 2, 12. 9, 1927. 3. 3, 3. 10, 1928. 3. 8, 5. 3, 10. 4, 10. 25, 1929. 1. 10, 1. 31, 3. 7, 7. 11, 1930. 2. 20, 5. 1, 1931. 2. 5, 2. 12, 3. 5, 3. 12, 10. 22, 1932. 1. 21, 2. 4, 2. 11, 2. 18, 3. 3, 3. 10, 1933. 3. 9, 4. 6, 8. 31, 10. 26, 1934. 2. 8, 10. 18, 1935. 3. 7, 9. 12, 11. 21, 12. 12, 1936. 1. 9, 2. 6, 3. 5, 8. 13, 12. 24, 1937. 3. 11, 4. 1, 5. 6, 10. 7, 1938. 4. 7, 5. 19, 6. 2, 6. 30, 12. 8, 1939. 2. 9, 4. 20, 5. 4, 5. 25, 6. 1, 9. 14, 10. 19, 1940. 2. 15, 3. 7, 3. 14, 3. 21, 4. 4, 5. 9, 9. 12, 10. 31, 12. 12, 1941. 1. 9, 2. 13, 4. 3, 5. 8, 5. 29, 7. 10, 9. 11, 11. 27, 12. 18, 1942. 1. 22, 2. 12, 3. 5, 8. 13, 10. 15, 11. 26, 12. 24, 12. 31, 1943. 1. 14, 2. 4, 2. 11, 2. 25, 3. 11, 4. 15, 6. 24, 7. 1, 9. 9, 12. 16, 12. 9, 12. 28, 1944. 2. 3, 2. 10, 3. 9, 5. 11, 7. 30, 10. 5, 1945. 2. 15, 3. 15, 3. 29, 11. 29, 11. 30, 12. 13)
  • 獨立(1944. 10. 4)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983) 제3권 602면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5) 제3권 18, 456, 334면, 제9권 639면, 제16권 374, 450, 452, 510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5) 제17권 223~224면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2004) 171~17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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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자혜 - 미상 -
본문
1884년 9월 22일 출생하였다. 1912년 7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갔다. 이후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등에 소속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17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Sacramento, 일명 朔都)에서 양제현(梁齊賢)·권영복(權永福) 등이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Dinuba)에서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가 조직되자, 5월 18일 한인부인회 대표로 신한부인회 임원들을 만나 각 지방 부인회를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통고문을 발포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같은 해 8월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부인친애회(婦人親愛會),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국부인회, 윌로우스(Willows) 부인회 대표들이 모여 합동발기대회를 열고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대표로 부인합동발기대회에 참석하여 미주 한인 부녀사회의 통합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결성에 참여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 결성 직후인 5월 하순, 양제현·이신환과 함께 미주 내 일본 간장의 시장 장악에 대해 대응하기 위한 장유회사(醬油會社)를 설립하고 고추장과 간장 등을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같은 해 10월 대한여자애국단 명의로 독립의연금 1달러 50센트를 후원하였다.1922년 12월 한인 2세를 위한 새크라멘토 국어학교 재무로 근무하였다. 1923년 3월 새크라멘토지방회 주최 3·1절 기념식에서 축사하였고, 7월 25일 새크라멘토 부인회 주최로 김마리아 환영회를 개최하고 환영사를 하였다. 같은 해 9월 국내에서 일어난 수재(水災) 구호를 위해 구제금을 기부하였으며,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새크라멘토지방 재무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후원금을 모집하여 구미위원부장 남궁염(南宮炎)에게 송부하였다.1924년 3월 오클랜드(Oakland)에 한인 가구가 56호에 달하자, 임애성 등과 함께 대한여자애국단 오클랜드지부를 조직하고 단장에 선임되었다. 그 해 6월 장인환(張仁煥) 의사의 석방을 축하하였고, 1925년 3월 국내에서 발생한 기근 구제를 위해 기부금을 후원하였다. 1927년 3월 3·1절 기념식에는 대한여자애국단 오클랜드지부 단장으로 오클랜드교회와 함께 명주 태극기를 새롭게 만들어 기증하였다. 또한 1917년 새크라멘토와 맨티카(Manteca) 부인들이 조직한 한인부인전도회가 경제적 형편으로 3·1운동 이후 활동을 중단하자, 1927년 9월 양제현·신선희 등과 함께 대한인부인전도회(大韓人婦人傳道會)를 부활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의 부인 양제현·강알라스 등과 함께 대한인여자저금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1월 부인전도회의 사무를 확장하기 위하여 스탁톤(Stockton)에 문차성, 로스앤젤레스에 김원도를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3월 새크라멘토지방회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국기가를 독창한 데 이어 정혜신·박중만과 함께 창가를 합창하였다. 9월에는 국내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의 재정 곤란을 후원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의연금을 기부하였고, 10월 국민회(國民會)와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의 재정 후원과 국내에 발생한 수재(水災)를 위해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29년 1월 대한인여자저금회를 2년간 운영하여 816달러 11센트를 저축하였고, 남감리교회 캘리포니아 한인지방회 재정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같은 해 7월 한인여자저금회 임원 선거에서 다시 회장에 선임되어 서기 양제현과 재무 황보석(본명 (車寶錫))과 함께 저금회 업무를 이끌었다. 12월에는 국내 빈민 구제를 위한 구휼금을, 1930년 2월에는 동맹단연금과 후원금을 기부하였다.1931년 초 국내에 조선여자대학이 설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2월 조선여자대학 기부금 협찬 발기인으로 기부금을 모집하여 송금하였다. 3월에는 3·1절 기념식에서 남편의 취지 설명에 이어 부인전도회 회장으로 ‘장래 독립운동에 여자들의 책임’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4월에는 일본 도쿄(東京)의 한인기독교청년회 구제부와 고학생들을 위해 헌옷을 기부하였다. 10월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 선전부에서 각 지방에 선전부 조직을 독려하자, 오클랜드지방회 회장이던 남편 김은해, 서기 조성학(趙聖學) 등과 함께 선전부를 조직하고 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선장부장 취임 직후 일화(일본상품) 배척운동을 위한 선전비 12달러 50센트를 모금하였다.1932년 2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와 오클랜드지방회가 연합하여 3·1절 기념식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어 3월 1일 기념식에서 “우리가 만일에 독립을 원할진대 말로만 하지 말고 매일 페니 한 푼씩이라도 저축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아 놓아야겠다”고 연설하고 3·1기념금을 기부하는 등 매일 1센트씩 저축해서 3·1절 기념식 개최를 위한 재정 후원을 하여 한인사회의 모범이 되었다.1933년 8월 부인전도회 주최로 한국의 삼남지방 이재민을 위해 기부금을 모집하여 동아일보사로 송금하였고, 10월 수재(水災)를 당한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을 위해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34년 2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과 합작하기로 결의하고 특연금을 모집하자, 오클랜드지방회 회원들과 함께 44달러를 모집하여 송금하였다. 1935년 8월 부인전도회 회장으로 한국 동래의 실수학교 생도를 위한 의연금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1935년 11월 오클랜드지방회에서 열린 1936년도 임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임되어 회장으로 선임된 남편 김은해를 보좌하였다. 1936년 1월 대한인국민회총회 27차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총회 예산과 새로운 임원을 승낙하였다. 같은 해 8월 5일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 주최로 개최된 창립기념식에 참석하여 연설하였고, 1937년 부인전도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6월 당시 국민회 오클랜드지방회 구제원으로 활동하였고, 8월 국치기념식에서 기도를 하였다. 1939년도 국민회 오클랜드지방회 선전원으로 선임되었고, 2월 대한여자애국단 오클랜드지부 단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오클랜드지방회에서 개최한 국치기념일에서 기념사를 연설하였고, 9월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 한길수(韓吉洙)의 외교 후원을 위한 의연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 부인전도회 회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정을 후원하기 위해 중가주(中加州, 중부 캘리포니아) 각지를 순행하며 의연금을 모집하였다.1940년 2월 국내에 한재(旱災)가 발생하자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같은 해 3월 한동안 업무가 중지되었던 오클랜드지방회가 임시특별회를 개최하자, 구제위원으로 선출되어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된 남편과 함께 지방회를 이끌었다. 그 해 8월 오클랜드지방회에서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식자기계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의연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1941년 1월, 대한부인전도회 회장으로 본국의 아동 구휼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2월 1942년도 오클랜드지방회 임원선거에서 대표원으로 선임되어 집행위원장인 사위 안영호, 선전위원인 남편과 함께 지방회를 이끌었다.1942년부터 1944년까지 오클랜드지방 대표로 대한인국민회 7차 대표대회부터 9차 대표대회까지 참석하여 각종 안건을 의결하였고, 대한여자애국단 오클랜드지부 단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42년 11월 오클랜드지방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의 대일선전 1주년 기념식에서 ‘임시정부 대일선전 1주년에 대한 민족의 감상’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대한인국민회 제7차 대표대회 겸 제34회 대의원회에 지역별 대표로 참가하여 한인정치단체 통일 실현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1945년 오클랜드지방회 구제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이외에도 오클랜드지방회에서 개최한 1923·1927·1928·1931·1940·1944·1945년 3·1절 기념식, 1941~1945년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 1937·1940년 5월과 1941·1942·1944·1945년 11월 순국선열기념식 등이 개최될 때마다 기념사, 창가, 독립선언서 낭독, 순국선열에 대한 기념사, 국민회 역사 등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1918년 11월 의연금을 후원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의연금 36달러 60센트, 의무금 62달러, 인구세 8달러, 기본금 1달러, 3·1기념금 60달러 70센트, 군사운동금 27달러를 의연하였다. 그리고 국민회 보조금 12달러, 동맹단연금과 후원금 2달러, 각지 공금 36달러, 국내 구제금 8달러 50센트, 기타 지역보조금 9달러 43센트, 정신여학교, 동래 실수학교, 평양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등 기부금 4달러 등 독립운동자금을 수십 차례 기부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모범 사례로 꼽히기도 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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