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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취성동에서 아버지 강명화(姜明化)와 어머니 송씨 사이의 6남 1녀 중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6월 9일 아버지가 첫째아들 강영대(姜永大), 둘째아들 강영소(姜永韶) 부부와 막내인 강영각(姜永珏)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어머니를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인 강영문(姜永文)·강영렬(姜永烈)과 함께 국내에 남아 있었다. 국내에서 있다가 1915년 8월 17일 몽골리아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가게 되었다.
아버지 강명화가 아들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근대적 교육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강씨 형제들은 모두 미국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장남 강영대가 1924년 켄터키주의 애즈버리대학Asbury College에 입학하였다. 강영문은 캘리포니아 태프트에 있는 태프트전문대학Taft Junior College에서 수학하였고, 강영각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에 있는 명문 포모나대학Pomona College을 1921년에 졸업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학교에 다녔는지가 확인할 수 없다.
미국에 온 후 아버지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조직된 애크론지방회의 실업부원에 선임되었고, 서기는 강영문이 맡았다. 오하이오주 애크론 지방에는 둘째형 강영소가 두 동생을 데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강영문과 함께 중등학교에 재학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하이오주 애크론 지방에 있다가 중등학교를 마친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1923년 8월 샌프란시스코 제3가에서 임정수·양주은이 동업하던 양식당의 임정수 몫을 신성원과 함께 인수하여, 양주원·신성원·강영상 3명이 동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2월 강영소의 부름을 받고 시카고로 가게 되었다.
시카고에서 식당업으로 성공한 김경(金慶)의 도움을 받은 강영소는 1922년 후반에서 1923년 초반 사이에 식당을 개업하였고, 강영문과 함께 합세하였다. 처음 상호명은 로렌스 카페테리아Lawrence Cafeteria였고 9개의 테이블로 시작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우라키』 제2호에 실린 「재미동포 실업 상황」이라는 표에 의하면, 1926년 당시 로렌스 카페테리아의 자본금은 3,000달러이고, 고용원은 6명, 연 매출액은 3만 달러였다. 1926년에 디버시 파크웨이Diversey Parkway 카페테리아를 사서 디버시 카페테리아Diversey Cafeteria라는 식당을 개업하면서 사업을 확대하였다. 1925년 시카고로 이주한 천세헌(千世憲)과 동업으로 새 식당을 개업하였는데, 이것이 하워드 카페테리아Howard Cafeteria다. 디버시 카페테리아는 강씨 형제들이 동업한 것으로 로렌스 카페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식당이 있던 거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셋째형 강영문은 1927년경 본격적으로 식당 운영에 나섰다.
강씨 형제들은 로렌스 카페테리아와 디버시 카페테리아를 경영하여 1927년 당시 두 식당의 자리가 180여 개쯤 되었고, 매일 600명 정도의 손님을 받았다. 형제들의 연 수입은 9만 달러 정도였다. 1930년 말 강씨 형제들은 ‘강씨 형제 카페테리아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라고 하여 두 곳에서 영업을 하였다. 로렌스 카페테리아는 1만 6,000달러의 자본금으로 이루어진 합자회사로서 총수입이 5만 달러에 이르렀고, 고용인이 14명이었다. 강영대가 지배인을 맡고 있었다. 디버시 카페테리아는 자본금은 2만 달러, 총수입은 6만 달러였다. 고용인은 16인, 지배인은 강영소였다. 강영대·강영소·강영문·강영상·강혜순이 주주였다.
강씨 형제 카페테리아회사는 1931년 중반 윌슨가에 윌슨 카페테리아Wilson Cafeteria를 새로 개업하여 모두 3개의 식당을 경영하였다. 시카고에는 강씨 형제뿐 아니라 김경을 비롯한 한인 실업가 대부분이 국민회에 참여하여 캘리포니아 지역과 다름없을 정도로 그 활동이 두드러졌다.
시카고에 카페테리아 사업을 하던 강씨 형제들은 1931년 둘째형 강영소의 와병으로 강영대가 경영하던 로렌스 카페테리아가 파산 위기를 맞았다. 김경이 동업 형태로 상당한 자본을 투자하여 건물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1933년 2월경에 다시 문을 열었다. 1934년 6월 20일 시카고 한인교회에서 한승곤 목사의 주례하에 리벨시와 결혼을 하였다. 로렌스 카페테리아는 경영한 지 2년만에 다시 부진하게 되었다. 그래서 디버시 카페테리아만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이곳도 법정 관리로 들어갔다가 1936년 1월 전후 박필(朴必)이 매입하여 운영하였다.
강영상은 미국에 온 이후인 1916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회 의무금으로 23회에 걸쳐 205달러를 냈고, 독립금으로 90달러, 신한민보 보조금으로 23달러, 특별외교비 의연금으로 25달러 등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애크론지방회에 있을 무렵 3·1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1918년 11월 24일부터 1919년 12월 15일까지 독립의연과 21례, 애국금, 공채표 등 다섯 종류의 재정 지원 사업에 79달러 21센트를 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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