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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954101
성명
한자 桂玉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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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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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1 훈격 대통령표창
1906년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1908년 8월부터 12월까지 핸포드 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4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로스엔젤레스 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독립자금 총 576원을 제공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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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계옥룡은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원동리(元東里)에서 태어나 1903년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이후 1906년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조직된 한인사회단체 및 독립운동단체였다. 1908년 계옥룡은 미국 핸포드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4년 계옥룡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로스엔젤레스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분리되어 있던 미국지역 한인사회 단체를 1910년 하나의 조직체로 묶어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조직의 목표는 미주 한인 사회의 안녕과 자치 신장, 그리고 조국의 독립이었다.

이처럼 계옥룡은 미국지역 한인사회의 대표기관인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여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수백원의 독립자금, 즉 의무금,보조금,인구세,군사운동금 등을 의연(義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共立新報(1906. 12. 7, 1908. 8. 5)
  • 新韓民報(1911. 8. 16, 1913. 12. 19, 1914. 7. 23, 1917. 7. 19, 1919. 8. 21, 1920. 4. 6, 1925. 8. 20, 1926. 9. 16, 11. 5, 1937. 7. 29, 9. 30, 1940. 2. 15, 1942. 11. 19, 1944. 7. 20)
  • 계옥룡이 김병연에게 보낸 편지(독립기념관, 1937. 9. 3)
  • 미주흥사단 자료(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계옥룡 게옥룡, 영어명 : Kei, Ok Yong 평북 선천(宣川) -
본문
1882년 7월 3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원동리(元東里)에서 아버지 계철윤(桂哲允)과 어머니 김소제 슬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은 옥륜(玉輪)이고, 동생은 옥선(玉善)·옥은(玉殷)·영걸(榮傑)이다. 고향에서 아버지를 따라 장사를 배웠으며, 1888년부터 3년간 평남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금광 등지에서 노동하였다. 1890년부터 평남 순안군(順安郡, 1914년 평원군으로 통합)에 거주하였고, 1893년부터 1902년까지 함남 영흥군(永興郡)에서 각종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하와이 노동 이민 대열에 합류하여 1904년 코리아Korea호를 타고 11월 1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하였다. 그 후 미국 본토로 건너와 1906년 12월경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桑港)에 위치한 공립협회(共立協會)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1907년 5월 리버사이드지방회(河邊地方會) 회원으로 총회를 위해 2달러를 기부하였다. 이 시기 학생 김창률의 학비를 전담 후원하기도 하였다. 그해 6월 리버사이드에서 윤진오·김영일 등 3인이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확장·보급할 목적으로 「국혼환기취지서(國魂喚起趣旨書)」를 발표하자 3달러를 후원하였다. 1908년 3월에는 공립신보사의 신문 기계 구입을 위해 5달러를 기부하였고, 공립신보사가 재정 곤란으로 어려움을 겪자 매달 1달러씩 후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달에 일어난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사건 재판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공동 대응하기 위해 조직한 한인공동회에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20달러를 후원하였다. 1908년 5월 『공립신보』에 「그 마음을 먼저 독립하라」는 글을 게재하였고, 그해 6월에는 캘리포니아주 프레스노 한인들과 연합공립관을 설립하고 매월 1달러씩 기부하였다. 그해 7월 15일 핸퍼드 거주 한인 23명과 지방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공립협회 총회에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총회 인가를 얻어 8월 1일 핸퍼드지방회를 설립하고 임원을 선정할 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1월 임치호·박호빈·이재수·이근술과 함께 솔트레이크시티(鹽湖)로 이주함에 따라 부회장을 사임하였다. 같은 달 국내의 고아들을 위해 대동고아원(大同孤兒院)이 설립되자 동맹원으로 10달러 이상의 기부를 약속하였다. 1909년 2월 공립협회가 국민회(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로 개편되자 국민회 회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와이오밍주 그린리버에 거주하며 래울린스 탄광에서 채광(採鑛) 노동자로 일하였다. 그해 2월 1일 래울린스 탄광의 한인 노동자 이재수·전지헌·최경오·김사옥·전승윤 등 50여 명과 함께 임시회를 조직하고, 2월 1일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거행하며 연설하였다. 5월에는 슈페리어 탄광과 래울린스 탄광에서 일하는 한인들과 함남 문천군(文川郡)의 기근(飢饉) 소식을 전해 듣고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8월에는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재정 후원을 위해 5달러를 기부하였다. 1910년 5월에는 캘리포니아주 업랜드Upland (일명 업플랜드, 上原)에 거주하면서 클래몬트 학생양성소를 위해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11년에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재류하던 이갑(李甲)을 위해 5달러의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13년 12월 로스앤젤레스지방회(羅城地方會)에서 열린 1914년도 임원 선거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14년 5월경 업랜드로 이주하자, 부회장직을 사임하였다. 한편, 같은 달 업랜드에서 한인들과 함께 클래몬트 학생양성소 학비와 서간도 한인의 기근 구휼금을 모집하여 송금하였다. 1917년 1월 로스앤젤레스의 북미실업주식회사에서 열린 제4회 주주총회에서 조성환과 함께 감사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5월 31일 흥사단(興士團) 제9회 이사원 통상회에서 신입 단우 신현모(申鉉謨)·박일우(朴一友)·황보정皇甫正杰과 함께 길천우(吉天友)의 반에 배속되어 복무하였으며, 9월 4일 정식으로 제68단우가 되었다. 그해 8월 국민회에서 은행채 보상 발기자를 모집하자 제4회 발기자로 가입하였다. 1918년 3월 북미실업주식회사 제5회 주주총회에서 영업 이익으로 은행 이익 13달러, 벼농사 이익 50달러 등 63달러를 배당받았다. 그해 9월 신한민보사 식자기계채 청장 동맹자를 모집하자 22회 동맹자로 서약하였다. 1918년부터 11월부터 1919년 12월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 독립운동을 위하여 대표의연·21례금·애국금·공채표·독립의연금 등 5종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175달러를 제공하였다. 1919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적십자회 본부에서 미주에 적십자회 조직과 회비 모집을 명령하자, 미주 적십자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회비 4달러를 납부하였다. 1920년 8월경 캘리포니아주 윌리엄스에서 2인 공동으로 벼농사를 경작하였고, 1922년에는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한인들과 함께 쿠바 동포 구제금을 의연하였다. 1924년 로스앤젤레스 학생회가 독일 거주 한인 고학생을 위한 동정금을 모집하자, 로스앤젤레스 한인들과 162달러 20센트를 모아 신한민보사를 통해 전달하였다. 1924년 흥사단 동맹저축에 끊임없이 참여한 5명 중 1명으로 선정되었다. 1926년 11월에는 중가주(中加州, 중부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에 거주하였다. 1930년 7월 중가주 딜라노에서 한인 2세를 위해 국어 학교를 설립하기로 하자, 인근 지역인 맥팔랜드McFarland 대표로 딜라노 국어 학교 재정을 후원하였다. 1931년 12월경 60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에 과원(果園)과 채소 농사를 경영하였다. 1935년 6월에는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서 농장을 경영하였고, 1936년에는 샌타로사에서 농장 부지를 탐사하다가 10월경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농장을 마련하기로 계획하였다. 1937년 6월 머데스토에 거주하면서 총회 경상비를 후원하였다. 1942년 6월 캘리포니아주 뉴베리에서 채소 농사에 종사하던 중 농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600여 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보았다. 그해 12월에는 액캠프에서 로스앤젤레스 한인 양로원을 위해 2달러를 기부하였다. 1943년 9월 한경서의 주선으로 한인 12인과 함께 애리조나주 챈들러로 가서 1944년 4월까지 일하다 캘리포니아주로 돌아왔다. 1945년 6월에는 팜스프링에서 일하다가 로스앤젤레스로 귀환하였다. 이후의 행적과 언제 사망했는지는 불명확하다. 1911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회 의무금으로 19회 185달러, 독립금으로 12회 290달러, 보조금으로 3회 25달러, 인구세로 7회 9달러, 총회 경상비 특연금으로 5달러, 국민회 기본금으로 2회 10달러, 군사운동금으로 50달러, 국방공채 50달러의 독립운동 자금과 클래몬트 학생양성소를 비롯하여 딜라노·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한인국어학교에 83달러 등 총 785달러에 이르는 독립운동 자금을 수십 차례에 걸쳐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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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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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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