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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적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이며, 1919년 6월 대한인국민회에서 실시한 멕시코 한인 인구등록 조사 당시 43세였으므로 1876년생으로 추정된다. 아내는 조(趙) 이사벨이고, 아들 봉학(鳳鶴)·두홍(斗弘)·기홍(基弘) 3남과 딸 세실리아(또는 마리아)·말테나(한국명 이쁜이)·음전이 3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 두홍은 1932년 12월 서삼여의 둘째 딸 서로라와 결혼하였다. 장녀 세실리아와 둘째 딸 말테나는 1933년 3월 22일 베라쿠르스(Veracruz)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김명순의 장남 김귀복, 그리고 차남 김우길과 한날 한시에 결혼하였다.
1905년 4월 4일 한인 1,033명과 더불어 멕시코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계약기간인 4년 동안 멕시코 에네켄(Henequen) 농장에서 일하였다가 1909년 5월, 국민회(國民會)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를 조직하였다. 1910년 2월 산디마스농장에 거주하는 양군보·최창식·김근필·오윤옥·배기화·변안진 등과 함께 산디마스지방경찰소(지방회보다 작은 단위 조직)를 설립하고 사찰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1년 12월 17일 메리다(Merida) 지방 한인 300여 명이 와하케냐(Oaxaqueño, 일명 오학기나)로 이주하자, 1912년도 메리다지방회의 신 임원진도 궐원(闕員)이 생겼다. 이에 빠진 임원을 선정할 때, 총 9인의 평의원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17년 3월 메리다 지방에 설립한 해동학교가 재정 부족으로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메리다 한인 135명과 해동학교 유지 동맹원이 되었다. 이중 백한성(白漢成) 등 6명과 함께 매달 1달러 50센트를 부담하기로 하였다. 그해 4월에는 1916년 11월 6일 개교한 잇신캅농장 진성학교의 교감으로 선임되어 교장 서병두, 교사 최정식, 재무 유진태, 수전위원 박두현 등과 보통과에 필요한 학생들을 모집하여 역사·지리·찬술(撰述)·독서·작문·토론·체조 등을 가르쳤다.
1918년 8월에는 씨우체 경찰소의 경찰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1일 메리다 지방회 산하 오스타파갑 경찰소에서 임원을 선출할 때, 소장으로 선임되어 서기 권흥종, 법무 이원준, 재무 고명국과 함께 지방 한인들의 생활 안정과 친목에 힘썼다. 1919년 『신한민보(新韓民報)』의 기계채 청장 의연 동맹자로 가입하여 5달러를 후원하였다. 그해 2월 1일 오스타파갑 경찰소에서 소장으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주관하였다.
이후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墨京)로 이주하였으며, 1923년 멕시코시티 한인들과 멕시코 화폐로 81원을 수재의연금으로 모집하여 송금하였다. 1927년 2월 6일 그동안 정지되었던 멕시코시티지방회(墨京地方會)를 다시 설립하고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회장 이인여, 총무 이경재, 서기 황보영주 등과 함께 지방회를 이끌었다. 1928년 1월 멕시코시티지방회 임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2월 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김익주와 함께 연설하였다. 1930년에는 멕시코시티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이여순·유순명과 연설하였다. 1931년 3월 멕시코시티지방회 회장 이성도가 불법행위를 저지르자, 그를 파면하고 회장을 새로이 선출할 때 후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8월 29일에는 지방회 회장으로 국치기념식(國恥記念式)을 주관하였다.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계기로 미주 한인 단체가 모여 미주한인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1월 멕시코시티 한인 조직인 자성단을 중심으로 연합회 참가를 결정하고 혁명운동 준비금을 모집하자 동참하였다. 같은 달 이충무공(李忠武公) 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자, 멕시코 화폐로 18원 25전을 모집하여 송금하였다. 1935년 3월 3·1절 기념식에서 양세봉(梁世奉)·양하산(梁河山)의 추도식 때 추도사를 하였고, 기념식 직후에는 참석 한인들과 함께 3·1기념금 26달러 80센트를 모금하였다. 그해 5월 멕시코시티에 따로 존재했던 멕시코시티지방회와 자성단이 합동하여 국민회 지방회로 통합되었다. 이에 8월 29일 통합된 국민회 멕시코시티지방회에서 주최한 국치기념식에서 황보영주·김수권과 연속으로 연설하였다. 1938년 3월 베라크루스로 이주하였다가 이듬해 4월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왔다. 1939년 6월 멕시코시티지방회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0년 4월에도 다시 감찰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1년 3월 890명의 한인과 함께 3·1절 경축식을 거행한 뒤 광복군 후원금 246달러를 모집하였다. 1942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맞이하여 멕시코시티지방회 주최로 현기식(懸旗式)을 거행하자, 등단하여 “조국과 국기를 위하여 무엇이나 아끼지 말고 다 바쳐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강연하였다. 이후 메리다로 이주한 뒤, 1943년 11월 메리다지방회 주최로 개최한 순국선열 기념식에서 유진태·김태식과 연달아 연설하였다. 그해 12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 포고 2주년을 맞이하여 메리다지방회에서 대일선전 기념식을 거행하자, 박춘삼·유진태와 연설하였다. 1944년 3월에는 메리다지방회의 삼일기념식에서 연설하였다. 이후 다시 멕시코시티로 이주한 뒤, 11월 17일 멕시코시티지방회에서 주최한 순국선열기념식에 참가하여 이경섭·김영수·김동철과 연설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된 이후, 멕시코시티지방회의 부흥책을 연구하기 위하여 10월 7일과 11월 4일 2차에 걸쳐 대회를 열었다. 이때 모든 임원이 총사직하고 새로 임원을 선정할 때, 대표원으로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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