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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의 부족으로 한자명과 출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료에 따르면 1931년 당시 26세로 1905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1905년 4월 멕시코로 노예이민을 떠난 이세창(李世昌)과 최마대의 아들이다. 1931년 쿠바에서 김세원의 딸 김옥분과 결혼하여 장남 선주와 5녀를 두었다.
1925년 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쿠바지역 마탄사스지방회에 입회하였고, 1926년에는 마탄사스지방회에서 의무금 수봉위원(收捧委員)으로 활동하였다. 5월경 카르데나스로 이주하여 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마탄사스로 돌아와 1927년 마탄사스지방회 사찰로 선출되었고, 1928년 12월에는 마탄사스지방회의 신구(新舊) 임원 교체식에서 서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30년 2월 5일 임시특별회에서 광주학생운동 후원금 모집을 결정하자, 후원금을 기부하였다.
1931년 3월 다시 카르데나스로 이주하여, 3월 10일 한인청년 10여 명과 천도교(天道敎) 종리원(宗理院)에 모여 청년토론회를 조직하였다. 또 실행 규약과 임원을 선정하고 임천택을 회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임천택이 고사하자, 그가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해 10월 다시 마탄사스로 이주하면서 카르데나스지방 청년토론회 회장직을 사임하였다. 12월 20일 자택에서 천도교 법도집 김세원의 딸 옥분과 천도교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쿠바 한인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1932년 마탄사스지방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3월에는 임천택·김성재 등과 청년학원 발기인이 되어 선언서를 발표하고 규칙을 제정하였다. 또 청년학원 회계로 뽑혀 원장 임천택, 서무원 김성재 등과 헌신하였다. 청년학원은 야학을 비롯하여 독서회·동화회·토론회·강연회 등을 열어 한국혼(韓國魂)과 애국심의 함양,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해 4월 청년학원 주최로 열린 제2회 동화회에 참가하여 「없음 받은 나귀」란 제목의 동화를 발표하였다. 5월에는 청년학원 주최 제5회 강연회에서 동화 「파리와 불나비」를 발표하였으며, 6월 제4차 동화회에서도 「거짓 꿈임을 맙시다」를 발표하였다. 그해 7월 청년학원 5회 토론회에 참석 토론하였다.
1933년 2월경 청년학원 회계직을 사임하였고, 3월 마탄사스지방회 서기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청년학원에서 남성반과 여성반을 조직하는 한편, 독서부를 설치하여 학생들의 국혼을 함양시킬 것을 의결한 뒤 남성반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4년 11월 1935년도 지방회 서기로 선임되었고, 12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 특연금을 모집하여 국민회 총회로 송금하였다.
1936년 8월 4일 마탄사스 한인 청년들로 조직된 재큐한인청년저금회가 창립 2주년을 맞이하여 해산하자, 9월 1일 저축 사업이 계속되길 원하는 유지들과 한인저금회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한인저금회 설립과 실행 규약을 의결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1936년 3월에는 청년학원을 마탄사스지방회 청년부로 개칭하는 한편, 원장제를 총장제로 바꾸었다. 그해 11월 마탄사스지방회 청년부의 서무부장으로 뽑혔다. 1936년 11월 청년부 주최로 열린 제14차 동화회에서 동화를 발표하였고, 1937년 1월에도 청년부 주최 20차 동화회에서 「우유 파는 노파」라는 동화를 발표하였다. 1939년 1월 마탄사스지방회 서기로 선임되었다.
1942년 8월 재무직을 사임하였으나, 1943년 다시 총무로 선임되어 국민회 창립기념식 때 기념 식사(式辭)를 하였다. 같은 해 12월 마탄사스지방회 연종대회(年終大會)에서 1944년도 총무로 선임되어 쿠바 거주한인의 사회단체·종교단체·국어교육기관 등에서 헌신하였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으로 13달러 50센트, 3.1기념금·적립금으로 40센트, 국민부담금으로 9달러 23센트, 광복군후원금으로 4원 68센트, 독립금 15달러 33센트 등 수십 차례에 44달러 14센트를 후원하였다. 1944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기관지 『독립』에 특연금 10달러를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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