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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5월 22일 서울 상사동(相思洞, 현 청진동과 종로 1가 일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건홍(河建泓)과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상만(相萬)이었으나 상옥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철물용달회사(鐵物用達會社)를 운영하다 1903년 사망하였고, 아래로 남동생 금동(今東)과 여동생 순희(順姬)가 있다. 아내 우숙자(禹淑子)와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1905년 하와이 이민시 여동생의 보정여학교(普正女學校) 1년 선배인 우숙자와 약혼하였다. 1914년 6월 12일 아내가 부친 우흥식과 함께 코리아 선편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그해 7월 5일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桑港韓人敎會)에서 결혼하였다. 결혼 예물로 아내에게 하명원(河明媛)이란 새 이름을 지어 주어, 부인은 이후 하명원으로 불렸다.
큰 딸 소정(1915. 5. 31. 생)은 192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소학교를 마쳤고, 1933년 6월 샌프란시스코 갈릴리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 졸업후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학교(Julliard Conservatory of Music)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다시 보스톤의 뉴잉글랜드 음악원(New England Conservatory of Music)으로 전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하고, 1937년 8월 졸업하였다. 1942년 미국 전시중앙정부 서무국에서 근무하였다. 홍언의 수양딸로도 유명하다.
장남 하재선(영어명 Jason, 1916. 6. 17. 생)은 1932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주니어 중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한인 청년들이 조직한 농구팀 가드로 활약하였다. 1939년 1월에는 라이스 볼 축구단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1941년 6월 미 육군으로 징병되자, 입대 전인 6월 22일 로스앤젤레스 거주 윤병희의 딸 윤세라와 약혼하였다. 그해 6월 일리노이주 훈련병영으로 간 뒤 1942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육군부대 의약부에서 근무하였다. 그해 3월 샌프란시스코 프리시오 병영으로 전근하여 6개월간 근무하였고, 10월 31일 메릴랜드 육군연습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소위(second lieutenant)로 승진하였다. 1942년 11월 8일 로스앤젤레스 한인장로교회에서 윤세라와 결혼하였으며, 1943년 11월 육군 중위로 승진하였다. 1944년 9월 미 육군부 공군 제14대에서 근무하다가 대위로 승진하였으며, 1945년 5월 공군 제14대 중국인부대 200명을 통솔하고 중국전선에 참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차남 중선(영어명 Jimmy, 1919. 2. 5. 생)은 1936년 6월 샌프란시스코의 갈릴리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42년 5월 미 육군으로 징병되어 훈련부대를 거쳐 9월 인디애나주에 있는 육군 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캘리포니아주 샌루이스 아비스 포병부대를 거쳐 오리곤주 부대로 전근되었다. 그해 11월 오리곤주 코밸리스 부대의 재정과에서 상등병으로 진급하였다. 1945년에는 상사로 유럽전선에 투입되어 독일에서 나치 섬멸에 탁월한 성적을 거두어 브론즈 훈장을 수여받았다. 독일 항복 후에는 태평양 전선으로 배치되어 일본 도쿄(東京)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차녀 소운(1922. 3. 5. 생)은 1936년 1월 샌프란시스코의 패시픽 하일소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1월 걸스 하이스쿨을 졸업하였다. 그해 봄 주립대학(State Collage)에서 수업후 가을 캘리포니주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1942년 미 전시중앙정부 서무국에서 복무하였다.
어려서 변영만(卞榮晩)의 동생 변영복(卞榮福)과 서울 계산보통학교를 다녔고, 13세부터 16세까지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소학과(小學科)를 3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상동청년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05년 단신으로 인천에서 몽골리아(Mongolia) 호를 타고 2월 2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하와이에서 1년간 노동하다가 1906년 미 본토로 이주하였다. 그해 7월 하순 양주은(梁柱殷) 등과 함께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입회를 청하였다. 그러나 1907년 1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조직되자 새크라멘토에서 이희대·윤응호·김수권·김필권·장인명 등과 대동보국회에 가입하고, 새크라멘토지방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1909년까지 미국인집 역부와 스쿨보이 등으로 일하였다.
1910년 2월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 회원이자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부터 양식 요리사(廚工)로 생계를 꾸리는 한편, 그해 5월에는 리버사이드(河邊)에 거주하면서 클래몬트학생양성소 재정을 후원하였다. 1911년 4월 리버사이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그해 7월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이갑(李甲)을 위해 재미한인들과 256달러 50센트를 모아 후원하였다. 같은 해 9월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으로 귀환하자, 강영소(姜永韶)·정원도와 함께 동맹수련운동을 시작하여 청년학우회 운동을 계승하였다.
1912년 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 구제원로 선임되어 회장 홍언(洪焉), 대의원 안창호·강영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3년 남감리교회 교인이 되었고, 4월에는 흥사단(興士團) 창립을 위해 홍언·강영소 등과 함께 힘을 쏟았다. 그해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영소의 집에서 안창호의 영도 하에 강영소·정원도·송종익·임준기·홍언과 함께 흥사단을 창립하고 제1번 단우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30일 안창호로부터 흥사단 창립위원회 개최를 요청받자, 1차 위원회의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하자는 의견을 편지로 보냈다. 10월에는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양아법(養兒法)」이란 글을 2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14년 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 김필권이 사업 관계로 사임하자, 후임 총무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3월 26일에는 『신한민보』에 「우리도 박람회에 뜻이 있는가」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1915년 4월 흥사단 예연금(例捐金) 100달러, 단보비(團報費) 40달러, 위로금 50달러 등 190달러를 납부하였다. 6월에는 흥사단 검사부에서 각 지역 검찰원을 선임할 때, 샌프란시스코 지역 검찰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으로 지방회 사무소를 이전하였고, 7월에는 지방회 산하에 토론회를 조직하고 회장 박윤하, 학무 강영소, 서기 백일규를 선임하였다. 그해 8월 샌프란스시코지방회 주최로 국치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16년 1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과 부회장 취임식이 거행되자, 전례집행 인접원으로 취임식 진행을 보좌하였고, 아내 하명원은 창가를 불렀다. 그해 3월 로스앤젤레스 대의원으로 북미지방총회 7회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총회장 강영소로부터 총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6월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양복 세탁소를 개업하여 생활하였다.
1917년 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법무로 선출되었고, 2월 북미지방총회 제8회 대의원회에 로스앤젤레스 대의원 송종익 대리로 참석하였다. 그해 3월 북가주 한인남감리회 지방연회가 감독 램버트의 주최로 개최되자, 박윤용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지방대표로 출석하였다. 그해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맞이하여 아내를 비롯하여 박공술·황동성·윤승렬·신기선·우흥태와 함께 1일 공금(工金)을 수합하여 그동안 애국저금으로 저축한 돈 65달러 94센트, 인구세 7달러 등 72달러 94센트를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로 송금하였다. 같은 해 12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차기년도 총무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1월 지방회 회장 임정구의 사임으로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궐석된 총무에는 임정구가 되었다. 같은 달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청년회 인재국장으로 선임되었고, 31일에는 지방회 회장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 개교식을 주관하였다.
1918년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콜로라도주 푸에블로(Pueblo)로 이주한 뒤, 14일 김원용·김호·우흥태 등과 지방회를 조직하고 총회 인준을 받았다. 지방회 임원 선정시 구제원으로 선정되었으나, 8월 구제원을 사임하였다. 그해 12월 푸에블로지방회 통상회에서 명년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푸에블로지방회에 있었던 1918년 11월부터 1919년 12월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독립운동을 위해 대표의연·독립의연·21례금·애국금·공채표 등 다섯 종류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37달러를 후원하였다. 1919년 푸에블로지방회 회장으로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개최하였고, 4월에는 ‘대한공화국 건설과 신정부 조직’을 축하하는 경축식을 거행하고 그 취지를 설명하였다. 같은 해 5월 푸에블로지방회의 사임 임원을 보궐 선임할 때,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 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적십자회 본부의 명령으로 신한민보사에서 미주지부를 설치하고 회원과 회비를 모집하자, 푸에블로지방회 한인들과 지부에 가입하고 회비를 납부하였다.
1920년 3월 푸에블로지방회에서 삼일절 경축식을 개최할 때, 경축식을 주관하고 「이날을 어떻게 지킬고?」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아내는 국가와 한반도가를 부르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해 5월 구미위원부 푸에블로 지방위원 우흥태와 신기선이 공채금을 모집하자 25달러를 기부하여 푸에블로 지방에서 총액 230달러를 구미위원부 재무 송헌주에게 송금하는데 일조하였다.
1920년 7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하였다. 그해 12월 북미지방총회 12차 대의원회가 개최되자, 와이오밍 대의원 대리로 참석하였다. 이 대의원회에서 차기년도 북미지방총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또한 1921년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21년 1월 북미지방총회 1921년도 1차 임원회에 참석하였고, 2월 북미지방총회와 샌프란시스코지방회가 합동으로 국민회 창립기념 축하회를 거행하자 샌프란시스코지방회장으로 축하회를 주관하였다. 그해 1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양복세탁소를 운영하였다. 12월 국민회 총회 13차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1922년도 재무로 다시 선임되었고, 김종림·한시대·이대위·강영승과 함께 가옥방매금 대금 처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2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고, 그해 11월에는 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엡웻청년회 전도국장으로 선임되었고, 2월에는 지방회 주최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거행하고 개회와 개회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해 5월 1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김현구·최진하·김용성·전득부·황보정걸·백일규·황사선 등 16인과 민립대학후원회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6월에는 3~4년 동안 적은 자본으로 기계도 없이 단촐하게 시작한 세탁소를 기계와 설비까지 갖춘 아이딜세탁소로 발전시켜 자리잡았다. 동년 11월 차기년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1924년 2월 지방회 주최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개최하고 취지를 설명하였고, 3월에도 지방회 주최로 삼일절 경축식 준비위원이자 의장으로 경축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으며, 아내는 창가를 불러 내조하였다. 그해 4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에서 장인환·전명운 의사 축하회를 열자, 지방회장으로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고 주로 교회 관련 일을 하였다. 1929년 7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엡웻청년회가 예일대 종교철학박사 김영희를 초대하자 사회를 보았다. 그해 10월에는 남감리교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계삭회가 감회사 데이비스 목사 사회로 열리자, 동 회의에 참석하는 한편, 임원 선정시 권사로 선정되었다. 1931년 세탁소를 매각하였다. 그해 4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10월 1일 장수영·황사선·조성학·김동우·홍언과 함께 미주한인연합회 선전부 위원이 되었다. 1935년 10월에는 프래생 괄라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였다. 1945년 6월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다 순국·귀환한 한인2세들의 기념비 등을 세우기 위해 조직된 한족출정군인친족회에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08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으로 9회 65달러, 독립의연금 15달러, 총회관 경비 4달러, 특별외교비 5달러, 북미총회 보조금 5달러, 국민회 기부금 2달러, 군자금 후원금 1달러, 중국혁명 후원금 1달러, 중국항일전쟁 동정금 4달러, 광복군 후원금 10달러, 독립금 8회 70달러, 샌프란시스코 승전 행렬 참가비 10달러 등 총 192달러를 독립운동자금으로 후원하였다. 이외에도 학생양성소·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비행학교·조선여자대학 등 교육 관련 의연금으로 57달러 50센트, 본국·만주·쿠바 등 국내외 한인의 기근·수재·한재 등 구휼금으로 20달러, 국민회 관련 10달러, 교회 관련 5달러 50센트 등도 재정 후원하였다. 1980년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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