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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입정동(笠井洞, 현 중구 을지로 일대) 출신으로, 1933년 12월 29일이 회갑일이었음을 미루어 1873년생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이수근이었으나, 1916년 8월 이세창(李世昌)으로 개명하였다. 최마대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이재희를 두었으며, 멕시코에서 만난 김보배를 양녀로 삼아 쿠바에서 키웠다.
영국인 마이어스(John G. Myers)와 일본인 이민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大陸植民合資會社)의 사기극에 속아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인들과 노예이민으로 멕시코로 건너왔다. 한인 66명과 함께 에네켄 농장 중 가장 악명이 높은 야스체 농장에 배치되었다. 1909년 초 야스체 농장에서 장봉환·정춘식과 노예처럼 학대하는 농장주에게 저항하다가 쫓겨난 뒤, 농장주의 압력으로 감옥에 갇혔다. 이후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황사용(黃思溶)·방화중(邦化重) 등이 파견되어 2주간의 재판 끝에 무죄 방면되었다.
1909년 5월 4년간의 노예계약이 끝나자, 황사용과 방화중의 권유로 메리다 지방 한인들과 함께 미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를 조직하였다. 11월 초순, 작둔 경찰소(지방회보다 작은 하위 단위)에서 교장에 선임되어 교감 양귀선·천관옥과 군법체조를 보급하였다. 같은 달 4년 전 을사늑약 체결의 치욕을 되새기기 위해 도지휘관 이근영(李根永)을 위시하여 양귀선·조병하와 함께 조교가 되어 110명을 2소대로 나누어 시가행진 하였다.
1910년 2월 4일 작둔농장 경찰원 정춘식을 비롯한 임원과 일부 회원이 메리다 잇신캅 농장으로 이주해 온 뒤, 메리다지방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그해 2월 작둔지방에 숭무학교(崇武學校)가 설립되자, 군인양성운동에 합류하였다. 4월 이근영·김윤원·김제선 등과 메리다지방회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5월에는 메리다지방회 창립 1주년 기념식 후 숭무학교 특별연조금으로 5달러를 기부하였다. 1911년 7월 메리다지방회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13년과 1917년에는 메리다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7년 3월 메리다 해동학교의 재정 후원을 위한 동맹원이 되었고, 1919년에는 메리다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쿠바로 이주하여 해방 때까지 마탄사스지방에 거주하였다. 1923년 2월 1일 마탄사스지방회에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개최하자, 멕시코 시절부터 함께 활동하였던 김세원과 「국민회 역사」를 연설하였다. 3월 마탄사스지방회 주최로 열린 삼일절 기념식을 맞이하여 시가행진을 주도하였고, 행진 뒤 열린 기념식에서 「본국 역사」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9월 마탄사스에서 한인2세를 위해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고 학교 유지를 위한 찬성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마탄사스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2월 국민회 창립 제15주년 기념 경축식에서 「국민회 역사」를 강연한 데 이어, 3월 3·1절 기념식에서 「민국 6년의 역사」를 강연하였다. 그해 10월 1925년도 회장 후보자로 선정되었으며, 12월에는 1925년도 평의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2월 1일 국민회 창립 16주년 기념식에서 「국민회 역사」를 강연하였고, 그날 열린 통상회에서 국어학교 교장에로 선출되었다. 7월 마탄사스 상례회 총무가 되어 회원의 답례금으로 식품을 매입 배분하였다. 11월 마탄사스지방회 1926년도 회장에 당선되었다. 11월 28일 ‘박은식 선생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였다.
1926년 2월 국민회 창립 17주년 기념식에서 개회 선포와 식사(式辭)를 한 데 이어 「창립 제17주년 현상」이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10월에는 마탄사스 거주 중국인 교민당 창립 3주년을 맞이하여 지방회장을 초빙하자, 임원들과 함께 참석하여 양국 간의 친목을 다졌다. 11월 지방회 임원선거에서 1927년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3월 3·1절 기념식에서 「민국 8년 역사」를 강연하였다. 1928년 마탄사스지방회 학무가 된 데 이어, 1929년에는 재무로 선임되었고, 11월에는 마탄사스지방회 차기 년도 법무로 선임되었다.
1930년 1월 쿠바 카르데나스지방회에서 진성국어학교 설립을 의결하고, 그를 교사로 초빙하였다. 3월 23일 카르데나스 김세원의 집에 모여 천도교 쿠바 종리원(宗理院)을 창립하고 법도집에 선출되었다. 4월에는 청년야학 교사로 선임되었다. 그해 8월 29일 카르데나스지방회의 국치기념식에서 「합병 당시의 참절 비절한 역사」를 강연하였다.
1931년 2월 카르데나스 지방회관에서 열린 국민회 창립 기념식에서 「국민회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이어서 3·1절 기념식에서는 「본국 역사담」이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3월 10일 카르데나스 청년들이 개설한 야학의 교사로 선임되었다. 5월 천도교 종리원 원장에 당선되었다. 1932년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 예식위원, 3월 3·1절 기념식 절차위원으로 기념식을 주도하였다. 4월 진성국어학교 교사로 추천되어 2년간 근무하게 되었다.
1932년 6월 다시 마탄사스로 이주하였고, 같은 달 마탄사스지방회 청년학원에서 주최한 동화회에서 「백일홍의 이야기」를 발표하였다. 10월 31일 마탄사스지방회 주최로 열린 이봉창 의사 추도회에서 「이 의사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였고, 11월에는 1933년도 마탄사스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 2월 윤봉길의사 추도회에서 「윤 의사의 약력」에 대해 강연하였고, 3월 지방회 산하 청년학원 1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였다. 같은 달 청년학원 야학교사 겸 토론회 판사로 선임되었다. 이어서 민성국어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12월에는 1934년도 마탄사스지방회 신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개회 취지를 설명하였고, 4일에는 다시 국어학교 교사로 선임되었다. 그해 3·1절 기념식과 5월 순국충렬추도회에서 개회사를 하였고, 8월 국치기념식에서 취지 설명을 하였다. 11월에는 재차 이듬해 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35년 1월 민성국어학교 교원으로 다시 선임되었고,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개회사를 하였다. 3·1절 기념식에서 양세봉(梁世奉)·양하산(梁河山)의 추도사를 하였고, 5월 선현추도식, 8월 국치기념식에서 개회를 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이듬해 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 3월 1일 마탄사스지방회 청년부 교육부장 겸 야학교사, 위원 겸 여자반 교감을 맡았다. 그해 12월 국민회 구제부 위원이 되었고, 12월 28일 지방회 산하 청년부 대회에서 교육부장에 선임되었다. 1938년에는 마탄사스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는 동시에 민성국어학교 교사로도 계속 활동하였다.
1940년 마탄사스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1년간 중단된 민성국어학교를 재건하였다. 1941년과 1943년 마탄사스지방회 교육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 1월에는 지방회 대표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3월 민성국어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5년에는 지방회 교육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마탄사스지방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12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으로 12회 43달러, 인구세로 6회 6달러, 국민부담금 5회 3달러 1센트, 독립금으로 8회 16달러 53센트, 안창호 초청 여비 의연금 10달러, 3·1절 기념금 3회 55센트, 국민대표회 대표 파견 경비·광주학생운동 후원금·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의연금으로 각 1달러씩 등을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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