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39
성명
한자 鄭翰景
이명 鄭漢慶, 鄭翰景, 鄭漢景, 鄭漢京, 鄭漢卿, Henry Cheung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1. 미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와 같이 민족대표로 선출되어 파리 강화조약회의(講和條約會議)에 파견됨
2. 이승만과 같이 기독교회와 세계약소국동맹회(世界弱小國同盟會)를 배경으로 미국정치가를 역방(歷訪)하며 국회석(國會席)에다 ‘조선독립’(朝鮮獨立) 원조를 정부에 요망케 하는 동시 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여 미국민(美國民)의 성원을 청하였다.
3. 각지의 혁명지사들과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세계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또 상해임정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줌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남 순천(順川) 사람이다.

국운(國運)이 기울기 시작하자 서재필(徐載弼)에 이어 미국으로 건너 가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 등과 한인동지회(韓人同志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하여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태평양 연안 및 뉴욕 거주 교민들을 중심으로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신고려회(新高麗會)를 조직하여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피력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미주 각지에서 모인 재미 한인전체회의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 주최로 개최되고 이 대표회의 결의에 따라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와 함께 그도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동년 12월 프랑스행 여권을 발급 받고자 하였으나 일본총영사관의 방해로 결국 프랑스행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그는 1919년 2월 2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 대표 명의로 이승만과 함께 윌슨대통령과 강화회의 각국 대표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열강(列强)은 한국을 일본의 학정으로부터 구출하라.

둘째 열강은 장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

셋째 한국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 아래 두자.

이것이 소위 위임통치안(委任統治案)으로서, 뒤에 말썽이 되어 이승만은 내외의 공격을 받았으며 임시정부의 대통령직도 탄핵 면직되었다.

그는 또한 기독교 인사와 세계 약소국 동맹회를 배경으로 미국 정치가들을 방문하고 미국 국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정부에 요망하게 하는 한편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여 미국민의 성원을 요청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는 "북미합중국의 동양정책(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과 "평화회의(The Peace Conference)" 등의 글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919년 4월 16일부터 3일간은 대한인국민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필라델피아의 독립기념관에서 대한독립선언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갹출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원조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위원에 임명되었다. 동년 5월에는 현 순(玄楯)이 임시정부에서 파견되어 구미위원부 위원장 겸 주미대사로 발령되어 외교와 재정을 담당하고, 그에게 선전(宣傳)을 전담하도록 하였는데 현 순은 교포 사회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알력이 일어나 결국 축출되었다. 동년 10월 그는 호놀룰루 교민들의 초청을 받고, 이승만을 대신하여 "태평양회의 한국대표"의 자격으로 참석,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에 대하여 연설함으로써 열렬한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사정(韓國事情)"을 영문으로 발행하여 한국의 역사, 지지(地誌) 및 정치관계와 일제의 교회 탄압 등 침략야욕을 지적함으로써 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아메리칸대학으로부터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한편 모교인 노스웨스턴대학의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워싱톤위원부 위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44년 5월에는 임시정부에서 그와 임병직(林炳稷)을 전후구제회의(戰後救濟會議), 태평양학회 등 국제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동년 10월 20일에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구미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駐美外務委員會)로 개편하여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으며, 그는 위원 겸 비서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김원용(金元容)·한시대(韓始大)·김 호(金乎) 등이 위원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주로 대미외교 사의(事宜)를 전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27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 140 15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63면
  • 고등경찰요사 130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6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782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7 8 9 216 219 228 230 336 337 348 358 359 361 368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51 85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330 343 344 516 857 1022 10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6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2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3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00 401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32 4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88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31 732 733 737 738 749 750 760 761 771 772 77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802 84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0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9 33 36 506 507 512 59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정한경 - 평남 순천(順川) 위임통치청원
본문
1890년 2월 28일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정용복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부유한 상인으로 유년시절 유교교육을 받았다. 박용만의 숙부인 박장현 등의 영향과 부친의 지원 및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0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건너갔다.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가서 미국인 가정의 스쿨보이(가정부)로 1년을 머물렀다. 1905년 박용만(朴容萬)의 주선으로 네브라스카주(State of Nebraska)의 커니(Kearney)로 옮겨 학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 여름부터 박용만이 주도한 한인소년병학교의 첫 훈련이 시작되자, 조진찬·임동석·유일한·박처후·김용성·김일신·구영숙·이관수 등 커니 및 헤이스팅스(Hastings)에 거주하는 학생들과 훈련에 참가하여, 1911년 8월 1회 졸업생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1913년 커니 고등학교, 1915년 네브라스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네브라스카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8~19년 동안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Northwestern Univeristy)의 연구원·조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贊鎬) 등과 한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파리(Paris)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김규식(金奎植)과 신고려회(新高麗會)를 조직하여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피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주최로 재미한인 전체회의가 개최되어,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소약국동맹회의와 파리평화회의 대표 자격을 부여하였다. 소약국동맹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약소국과 속국(屬國) 그리고 억압받는 민족들이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1918년 12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회의이다. 기독교계 인맥을 통해 미국 정치가들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공론화하는 한편,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여 미국인의 성원을 얻고자 하였다. 「북미합중국의 동양정책(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과 「평화회의(The Peace Conference)」 등의 글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 함께 파리평화회의 참석을 하고자 하였으나 미 정부는 이들의 출국 허가를 거부하였다. 1919년 2월 중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하여 한국 문제를 미 의회 안건으로 다뤄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윌슨과의 면담 요청은 거부되었으며 편지조차 전달되지 않았다. 2월 25일 「위임통치청원서」를 작성하였고, 이승만은 3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윌슨에게 보냈음을 밝혔다. 청원서는 ‘미국·하와이·멕시코·중국·러시아에 거주하는 150만 한국인을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회’의 위임으로 제출되었으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돕기 위하여 거중조정자가 되어 달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일본의 학정으로부터 한국을 구출하고, 장래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열강에 요구하였으나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 아래에 두자’는 내용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1919년 4월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이승만·서재필(徐載弼) 등과 한국의회(Korea First Congress)를 조직하였다. 4월 16일부터 3일 동안 대한인국민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필라델피아의 독립기념관에서 대한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애국성금 30만 달러를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담당하는 구미위원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5월에 현순(玄楯)이 구미위원부 위원장 겸 주미대사로 발령받자, 선전을 담당하였다. 10월 호놀룰루(Honolulu) 교민들의 초청으로 ‘태평양회의 한국대표’ 자격으로 이승만을 대신해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에 대해 연설하였다. 1921년 9월에는 이승만·서재필과 워싱턴 군비축소회의에 파견되었으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워싱턴회의에 참석하기 전에는 하와이세계기자대회에 출석하여 하와이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독려하였고, 워싱턴회의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1921년 워싱턴 D.C의 아메리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논문 제목은 󰡔한국 사정(The Case for Korea)󰡕으로, 한국의 역사와 정치관계를 알리고, 일본의 식민지배에 숨겨진 야만성을 폭로하였다. 이후 노스웨스턴대학의 강사로 재직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가 제기되던 상황에서 1921년 5월 6일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의 퇴진과 임정 개조를 요구하는 5개 항의 결의서를 임시의정원 의장 윤기섭(尹琦燮)에게 전달했다. 정한경이 작성하고 이승만이 제출한 「위임통치청원서」는 “미국의 유명한 이들과 중국과 한국의 여러 친우들”이 공유한 현실적 차선책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의 검토와 승인을 거친 것이었으며, 김규식도 「위임통치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바 있었다. 논쟁의 결과 1920년대 중반 이승만은 임정을 떠났고, 정한경 또한 Henry Chung De Young 으로 개명하고, 정치활동을 접었다. 1923~24년간 네브래스카 링컨(Lincoln)의 한 식료품회사에서 일하였고, 사진사업도 하는 등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였다. 1925년에는 서재필·유일한(柳一韓)·이희경(李熙景)과 유한주식회사 조직에 참여하였고, 1933년부터는 식료품회사를 경영하며 14개 주에 납품하는 세일즈매니저가 되었다. 다시 저술활동 및 정치활동을 재개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때였다. 신문과 󰡔아시아󰡕 등의 학술지에 소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44년 5월 임병직(林炳稷)과 함께 임시정부의 전후구제회의·태평양학회 등 국제회의 대표로 파견되었다. 10월 20일 임시정부에서 구미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로 개편하면서, 위원 겸 비서주임을 맡았다. 1945년 4월에는 샌프란시스코회의 한국대표단원에 지명되었다. 1948년 2월, 미군정의 민간인 직원으로 고용되어 귀국하였다. 1948년 5월 총선거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48년 12월 초대 주일특사로 임명되어 1949년 2월까지 재직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바로가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정한경(관리번호:9539)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